#196. 국경 (4)
─피해! 날아온다!
─여기 부상자가 있다! 의무병! 의무병은 어디 있지!
쾅!
벽에 뚫린 구멍으로 폭음과 비명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소란 따위는 지금 T의 신경을 돌리지 못했다.
“카, 카인이라고? 당신이?”
바로 눈앞의 남자가 뱉은 말 때문에.
“카인이라고. 카인. 정말로 카인이라고?”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속이 울렁거렸다.
사실 답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위압적인 말투.
이지적이고 차가운 인상의 외모.
압도적인 실력의 마법.
카인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자신이 진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감격과 희열. 설렘과 혼란.
갖가지 감정에 속이 메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카인 님….”
T가 손을 뻗는 순간.
허공에 박제되어 있던 총알이 방향을 바꿔 쏘아졌다.
픽!
총알이 스친 T의 뺨에서 옅은 피가 배어 나왔다.
곧이어 카인이 손을 휘저었고, T는 염동에 의해 벽에 처박혔다.
쿵!
“컥!”
입가에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T의 몸은 미끄러지지 않고 벽에 붙은 채였다.
카인이 다가가 투구를 벗겼다.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넌 누구지? 왜 내 이름을 사칭했나?”
자신의 목숨이 상대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음에도, T는 두렵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카인 님. 당신을 정말로 뵙고 싶었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빠르게 설명해라. 시간이 썩 여유롭지 않으니까.”
T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인 님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그저 이름 없는 조직의 말단이었으니까요.”
쭉 이어진 이야기를 요약하면 간단했다.
T는 거대 조직 간의 전쟁 중 카인 덕에 목숨을 구했다.
이후 카인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그처럼 되고자 노력해왔다.
‘내 덕에 목숨을 구했다고. 현장에서 직접 마주치진 않았었나 보군. 얼굴과 목소리가 기억에 없는 걸 보면.’
투구는 당시 전쟁터의 일부였던 장비점에 굴러다니던 것이라 했다.
‘진실의 눈’ 특성이 발동했고, T의 말은 모두 진실로 판명되었다.
“카인 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을 닮고자 노력했습니다. 다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레지스탕스에 가입해 정상에 오른 건가?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예.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47번 구역에서의 전쟁 이후 소문이 끊겼으니까요. 직접 찾아갔지만 별다른 단서는 잡지 못했습니다.”
47번 구역 전쟁 직후.
‘카인’이라는 신분을 완전히 말소한 시기였다.
‘쓸만하군. 내가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던 걸 보면.’
카인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카인은 T를 살려두기로 결정했다.
능력과 충심은 검증되었다.
거기에 레지스탕스를 이미 장악해 손에 쥐고 있으니, 부하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름이 뭐지?”
“셰, 셸던입니다! 셸던!”
T, 아니 셸던이 감격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지금부터 레지스탕스는 제국군의 포위를 뚫고 협곡을 탈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예! 예! 알겠습니다!”
셸던은 앞뒤 상황도 묻지 않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신으로 삼기라도 한 광신도와 같은 모습이었다.
“에스텔. 얼굴을 다시 한번 바꿔주지. 레지스탕스를 도와 협곡을 벗어나라.”
“알겠어요.”
에스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황에 대한 모든 설명은 후에 카인이 해줄 터였다.
“활로는 내가 뚫는다.”
카인이 천천히 투구를 착용하며 말했다.
캄캄한 눈구멍 안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
카인은 허공 높은 곳에 부유해 전장을 관망했다.
─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반란군을 섬멸하라!
무너진 건물과 피어오르는 연기.
쉼 없이 울려 퍼지는 폭음과 총성.
─죽어! 이 더러운 제국 새끼들!
건물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제국의 장갑차와 군인들.
그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레지스탕스 병사들.
카인의 시선이 멀리 돌아갔다.
십수 대의 소형 전차가 협곡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제국군의 의지가 느껴졌다.
‘아벨은 보이지 않는군. 뒤늦게 합류할 생각인가. 혹은 협곡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가.’
카인은 아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에스텔이 로우택틱의 차량을 수배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탈출한 포로들을 찾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안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이용해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벨은 계획을 듣고 차분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해봅시다. 충분히 성공 확률이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카인은 몸에 위치 추적기를 달고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 후 제국군은 추적기의 신호를 따라 시간 차를 두고 출발했다.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도착했지만 계획에 지장은 없다.’
카인의 첫 번째 목표는 확고했다.
레지스탕스를 찾아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
레지스탕스는 가까운 미래에 제국을 상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귀중한 체스 말이었다.
제대로 사용하기도 전에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부서지는 일은 발생하면 안 되었다.
두 번째 목표는 제국군의 전력에 최대한의 손실을 내는 것.
현재 신분으론 불가했다.
공식적으론 황제의 특명을 받아온 ‘참모’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투구를 쓰고 있는 지금.
레지스탕스의 T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T는 이미 카인으로 소문이 나 있기에, 마법을 난사한다 해도 의심을 받을 가능성은 적었다.
중요한 건 ‘T’에서 ‘요한’으로 모습을 바꾸어 전장에 나타나는 타이밍이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된 것 같군.”
카인 주위에 원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승패는 거의 결정된 것 같군요.”
제국군 외벽수비대 1대대 3중대장.
장갑차에 올라 쌍안경으로 전장을 보고 있던 그가 말했다.
대답은 차량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다른 중대장의 목소리였다.
“이런 개활지에서 싸운다면 레지스탕스 따위는 제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요. 이제껏 지형상의 이점을 이용해 전력 차를 극복해왔을 뿐.”
그들의 말대로 전황은 압도적으로 제국군 쪽에 기울어 있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요한이라는 자가 아벨 님을 단번에 설득했다고 했지요?”
“맞습니다. 포로를 풀어 본거지를 찾는다. 회의 때 몇 번 논의가 오갔던 방법이긴 하지만 위험성이 짙어 채택되지 않았었는데요.”
두 중대장은 도박을 보란 듯이 성공시킨 요한에 대해 감탄을 터트렸다.
“스스로 적진에 들어가기를 자처했으니 용기 또한 대단하죠.”
“실력 좋은 마법사라 들었습니다. 분명 안쪽 어딘가에서 자기 몸은 제대로 사리고 있을 겁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협곡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총사령관 아벨에게 승전보를 들고 갈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어?”
문득 쌍안경 렌즈의 풍경이 붉어진 것은 그때였다.
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장갑차가 뒤집혔다.
두 중대장은 멀리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 이게 무슨.”
바닥을 위로 향한 채 불타고 있는 장갑차를 보며 탄식을 흘렸다.
쐐애액─!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불덩이들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두 중대장은 급히 마나를 끌어 올려 방어막을 둘렀다.
쾅! 콰광!
폭격이었다.
불덩이는 끊이지 않고 날아들었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위다! 위! T가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에 시선이 일제히 공중을 향했다.
투구에 레지스탕스 망토를 걸친 한 사내가 유유히 공중에 떠 있었다.
“전열 1소대와 2소대는 돌아와 후방을 지원하라!”
다급한 무전이 오갔다.
후방에 위치해 있던 장갑차의 포신과 군인들의 총구가 일제히 공중의 한 점을 향했다.
“사격 개시!”
“포격 개시!”
포탄과 탄환이 허공을 수놓았다.
T에게 명중해 무수한 폭발과 소음을 일으켰다.
쾅! 쾅! 콰광! 쾅!
일개 하나의 인간에게 퍼부어진 공세라 하기엔 잔혹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격 중지 명령은 한동안 내려지지 않았다.
‘죽어라. 이 괴물 같은 자식.’
T의 악명이 지휘관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었다.
T의 지략에 농락당해 허비한 시간이 대체 얼마던가.
놈의 마법에 폭사한 제국군 병사가 대체 몇이던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자신이 있나 보지.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고.’
쾅! 콰광! 쾅!
T가 수준급의 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교전 당시 방호를 사용해 총탄이나 포탄을 막는 모습도 몇 번 보았다.
하지만 그건 협곡 위에서 ‘지형상의 이점’을 가질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정면에서 집중포화를 당한다면 아무리 T라도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그 증거로 상대에게선 반격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방호가 깨지고, 몸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조각났으리라.
“공격 중지!”
중대장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걷혀가는 연기를 보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허공을 기대했다.
─다 끝났나?
그리고 들려온 음성에 등골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카인은 방호를 유지한 채 사용된 마나량을 점검했다.
[ 회로 레벨 : 4 ]
[ 마나 13628 / 15762 ]
‘화염 마법을 제하고 방호로 소모된 마나는 1500가량.’
현재 마나 회로의 레벨은 4.
일부러 폭격을 받아내 회로의 성능을 시험했다.
두 보스의 죽음 이후 큰 전투가 없어, 무력을 점검할 기회가 없던 터였다.
‘마나의 질이 확연히 향상되었다. 폭발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전보다 훨씬 적은 양의 마나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 다시 포격을 개시하라!
지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일에 대비해 방호는 해제하지 않고, 대기에 흩뿌려둔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의 품질은 시험을 마쳤다.
이제 운용 능력을 시험할 차례였다.
쐐애액─!
포탄과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카인 주위에 다다른 순간 그대로 멈춰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한없이 0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인의 조작으로 일제히 ‘염동’으로 화한 대기 중의 마나 때문에 말이다.
카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지휘에 따라 모든 포탄과 총탄이 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폭격이 시작된 순간.
제국군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전장 중심의 허공엔 거대한 불덩이가 부유해있었다.
그곳에서 작은 화살촉과 같은 화염 줄기들이 뿜어져 나와 지상을 뒤덮었다.
“컥!”
“사, 살려줘!”
오직 제국군만을 표적으로 하여서.
중간에 군인들이 레지스탕스 주민을 희롱하려는 모습을 보았기에, 카인의 손속에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불러일으킨 방심이며.
지휘관들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행위일 터였다.
전쟁에 격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며, 패자는 승자의 처우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아벨의 성향 탓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 부대 일부라도 서슴없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카인은 마지막 레지스탕스 차량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등 뒤에 새로운 불덩이를 생성했다.
이제 슬슬 ‘T’는 사라지고 ‘요한’이 나타날 때였다.
불덩이가 카인 쪽으로 발사되었다.
카인을 집어삼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기세로 난폭하게 불타올랐다.
제국군 입장에서는, 새로 나타난 누군가 T를 요격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