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국경 (3)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병사는 카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지시를 내렸다.
“수색 시작해.”
차량 뒤쪽에 대기하던 병사들이 짐칸의 문을 좌우로 열어 당겼다.
끼이익─
두꺼운 쇳소리와 함께 짐칸의 내부 공간이 드러났다.
줄지어 쌓여 있는 상자 수십 개.
독한 화약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카인이 짐짓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주시면 좋겠군요. 폭발 위험이 있는 인화 물질이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국군은 모든 종류의 화물에 대한 수색법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뒤쪽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짐칸 위에 올라섰다.
상자를 덮고 있는 천을 들추며 안쪽으로 진입해나갔다.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모두 입국 신고서에 기재된 것과 동일한 종류의 화약입니다!”
수색은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병사들은 짐칸 가장 안쪽 공간에 도착했다.
천에 덮인 5개의 상자.
다른 상자보다 크기가 컸다.
“…….”
“…….”
작은 숨소리가 들린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자리에 있는 병사들은 순간 동일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총 끝에 달린 검을 상자로 향했다.
병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상자로 다가갔다.
침을 삼키고, 총검을 이용해 단번에 천을 들어 올렸다.
홱!
“화약이네.”
“화약이야.”
다른 상자와 다를 것 없이 화약이 담겨 있었다.
병사들은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짐칸에서 내렸다.
끼이익─ 쾅!
문이 닫히고, 차단막이 올라갔다.
탑차는 검문소를 지나 벽 아래에 나 있는 통로로 진입했다.
긴 동굴과 같은 공간을 지나자 눈앞에 황야가 나타났다.
백미러엔 점점 멀어지는 벽의 모습이 비쳐오고 있었다.
“휴우.”
에스텔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들키지 않아서.”
“검문 대장을 맡은 자가 촉이 좋은 것 같더군. 결국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짐칸 가장 안쪽에는 비밀 공간이 존재했다.
카인이 짐칸 공간의 끝으로 보이도록 환각 마법을 걸어둔 가벽 안쪽에 말이다.
차량은 소년병들이 알려준 좌표 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덜컹. 덜컹.
언덕을 넘고 바위 지대를 지났다.
차체는 쉼 없이 흔들렸다.
오랜 시간을 달려 협곡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긴가 봐요.”
“제국군이 헤매는 이유도 알 것 같군.”
생전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협곡 지대였다.
좁은 입구 너머 천혜의 미로가 펼쳐져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카인은 에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지트는 여러 곳이야. 하지만 아지트를 출입할 때 눈이 가려져. 그래서 정확한 위치는 우리도 몰라.」
활동팀과 운영팀이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합류 지점에 도착한 활동팀을 아지트로 수송하는 것이 운영팀 역할이야.」
아지트 위치가 누설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함으로, 이 역시 T가 고안한 방법이라고 했다.
T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한 층 더 증폭되는 순간이었다.
굽이진 통로를 지나는 동안 협곡에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휘오오─
스산한 바람 소리.
돌 부스러기가 구르는 소리.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에스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끼익―
탑차는 지정된 좌표에서 멈췄다.
사방이 절벽에 둘러싸인 막다른 공간이었다.
“고생했어. 도착했으니 내려도 돼.”
카인과 에스텔이 짐칸을 열자 소년병들이 줄지어 내렸다.
적군 기지를 탈출해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에밀이 수신호를 보내자 협곡 위에 깃발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폭탄, 그리고 무너지는 벽.
‘기억 속에는 없는 그림이군.’
저 또한 T라는 인물이 만든 레지스탕스의 심볼로 보였다.
에밀이 깃발을 보고 환해진 얼굴로 외쳤다.
“에밀 외 4인.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협곡 위에 사람이 나타났다.
양옆으로 한두 명씩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협곡 전체를 에워쌌다.
모두 총을 든 병사로, 총구를 카인과 소년병 일행이 있는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외쳤다.
─옆의 두 사람은 누구지?
“제국군 부대를 탈출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T를 알고 있고,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T라는 이름에 협곡 위에서 동요가 일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듯 보였고, 이후 총구가 일제히 카인과 에스텔을 향해 돌아갔다.
─정확한 신분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위협적인 어투였지만, 카인과 에스텔에게 실제 위협은 되지 못했다.
‘카인이 마법 한 번만 날려도 서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몸이 사라질 텐데.’
에스텔은 흘긋 카인을 보았다.
자신이 따르는 이 남자의 힘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저런 화병기 따위로는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차 정도는 끌고 와야 했다.
이 남자를 상대하려면.
카인이 변용 마법을 해제해 목덜미의 문신을 보였다.
“이 정도면 신분 증명은 될 것 같은데.”
협곡 위에 다시 한번 동요가 일었다.
T와 관계가 있는 인물.
문신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임의로 사살할 순 없는 인물임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대답이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휘관이 외쳤다.
─좋다. T를 만나게 해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그쪽의 신변을 구속해야겠다. 동의하는가?
“그렇게 하지.”
지휘관의 신호와 동시에 협곡 입구 쪽에서 일단의 무장 인원이 나타났다.
“살아 돌아왔구나. 다행이야.”
그들은 소년병들에게 안대를 씌우며 눈물을 글썽였다.
카인과 에스텔에게는 안대와 함께 수갑을 내밀었다.
라티움에서 제작된 마나유저 결박용 수갑으로, 대륙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다만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유저에겐 효과가 없었고, 카인과 에스텔의 경우 기준치를 아득히 넘어있었다.
찰칵.
스스럼없이 내민 두 사람의 양팔에 수갑이 채워졌다.
검은 안대가 씌워지고 시야가 차단되었다.
우우웅─
협곡 입구에서 차량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다. 불필요한 의심을 살 행동은 하지 마.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총알이 곧장 머리를 뚫을 테니까.”
레지스탕스가 으르렁거리며 카인과 에스텔을 차량 쪽으로 밀쳤다.
“잠깐만요. 그렇게 거칠게 다룰 필요는…!”
소년병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피아 식별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도와준 건 사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인과 에스텔은 차량 의자에 앉혀졌다.
귀마개가 씌워져 청각 역시 차단되었다.
‘…….’
의자가 크게 흔들려, 차량이 출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속도는 시속 15km. 우회전 한 번. 7초 직진 후 다시 좌회전.’
카인의 머릿속에 협곡 지도가 그려져 나가기 시작했다.
눈과 귀를 가렸지만 마나유저의 발달한 감각을 완전히 차단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신체 강화’ 특성으로 수인과 같은 오감을 지니고 있는 카인이었으니까.
“내려라.”
차량은 정확히 32분 5초를 이동해 멈췄다.
안대와 귀마개가 벗겨지고 시야와 청각이 돌아왔다.
수갑은 아직 채워진 상태로, 카인과 에스텔은 차에서 내렸다.
“작은 마을 같네요. 꽤 놀라운데요.”
“이런저런 용도의 시설이 존재해야겠지. 단순히 전투원의 수용만을 위한 공간이 아닐 테니까.”
절벽에 둘러싸인 넓은 공터였다.
수준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꽤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다양한 용도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레지스탕스 병사들은 카인과 에스텔을 공터 중심에 있는 건물로 이끌었다.
계단을 올라, 방 앞에 멈춰서 노크를 했다.
“보고했던 인물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출한 집무실이 나타났다.
책상에는 창을 향해 몸을 돌린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탁.
병사들이 문을 닫고 양옆에 도열 했다.
카인과 에스텔은 책상 앞 의자에 앉혀졌다.
끼익.
남자가 의자를 돌렸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철 투구.
보이는 건 T자형 구멍 너머의 눈빛뿐이었다.
“이야기는 간략히 전해 들었다.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움을 준 데에 감사를 표하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헌데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에스텔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실제 카인과 상당히 유사한 말투.
목소리 톤만 같다면 완전히 카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당신이 블루서펜트의 전 간부 카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블루서펜트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지. 조직은 나를 버렸으니까.”
“…그래서 복수를 하신 겁니까? 47번 구역에서 전쟁을 일으켜?”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떠보는 질문을 던지며 상대의 정체를 가늠하던 카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니.
그건 도리어 이쪽이 할 말이었다.
말투와 제스쳐의 정교한 흉내는 상대에 대한 상당한 연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요. 저는 카인 님의 오랜 부하였으니까요.”
카인은 옷깃을 내려 목덜미의 문신을 보였다.
“당신은 가짜입니다. 카인 님이 아닙니다. 제가 진짜 카인 님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죠.”
레지스탕스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불안이 스쳤다.
자신들이 따르는 이에 대한 신뢰가 깨질까 두려운 것이었다.
T는 눈구멍 너머로 카인의 문신을 고요히 응시했다.
그러다 픽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이 블루서펜트를 사칭하는 놈들을 많이 보아왔지.”
순간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T의 목소리에 섞인 미세한 떨림을 감지한 것은 방 안에서 카인뿐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내 부하를 사칭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T의 등 뒤로 불덩이가 몇 개 생성되었다.
‘그래도 아예 근본 없는 녀석은 아닌 것 같군.’
사람 얼굴만 한 크기로, T가 꽤 수준급의 마법사임을 알 수 있었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카인 님이 아닙니다.”
“그 전에 우선 네가 내 부하라는 걸 증명해야겠지.”
“당신이 카인 님이 아님을 증명하는 게 빠를 겁니다. 투구를 벗어 보십시오.”
변용 마법은 고난도로 아무 마법사나 쉬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어찌 사용해 카인으로 얼굴을 위장했다 해도, 분명 티가 날 것이었다.
“우습군. 감히 내게 명령이라니.”
“애초에 투구를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군요.”
카인과 T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그때.
쾅─!!
폭발과 함께 오른쪽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벽 쪽에 있던 병사 몇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바깥 풍경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쾅!
문이 열리고 병사 하나가 나타났다.
“제, 제국군입니다! 제국군이 쳐들어왔습니다!”
“……!”
T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카인을 쏘아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짓인가? 분명 추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아지트 위치를 알렸지?”
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국군을 유도한 것은 자신이 맞지만, 굳이 대답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에스텔 역시 당황스런 시선을 보냈다.
완벽한 계획을 위해, 제국군을 부르는 일은 그녀에게도 비밀로 한 상태였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그녀는 마음이 약해지는 편이었으니까.
“모두 밖으로 나가 전투태세를 갖춰라!”
T의 외침에 방 안에 있던 병사들이 신속하게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쾅!
그 순간에도 포탄이 날아와 건물을 때렸다.
건물의 흔들림 속에 T가 몸의 중심을 잡으며 총을 꺼냈다.
“나는 카인이다. 내가 바로 카인이다. 사칭꾼, 죗값은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탕!
총알이 쏘아졌다.
허물어진 벽으로, 또 다른 포탄이 날아들었다.
“아니, 너는 카인이 아니다.”
카인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순간 그의 몸에서 발산된 마나가 폭풍처럼 주위에 몰아쳤다.
바로 앞에 도착한 포탄과 총알이 카인의 염동에 의해 허공에 멈췄다.
카인이 손바닥을 내려 진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바로 카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