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국경 (2)
끝없이 펼쳐진 황야.
거대한 바위 아래의 비좁은 틈새.
동굴과 같은 공간에서 5명의 소년병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제국군 부대를 벗어난 지 30분가량.
그리 많은 거리를 이동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도착한 후에 다음 방법은 강구한다고 했잖아. 도착은커녕 여기서 타 죽겠어. 그 전에 제국군에게 붙잡히든가.”
작은 동굴과 같은 구조였다.
소년병 하나가 틈새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태양의 열기로 한껏 달아오른 대지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애초에 온전치 못했던 체력은 그마저도 부대를 탈출하는데 모두 소진했다.
황야 횡단을 위한 별다른 도구도 존재치 않았다.
“에밀. 폴이 발바닥에 감각이 없대. 위험한 거 아닐까.”
넝마와 같이 찢겨진 옷.
그리고 맨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 위를 걷는 고통을 느꼈으며, 고문으로 벗겨진 피부에 태양 빛이 내리쬘 때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게 되었다.
“우린 여기까지야.”
“헛소리 하지마. 아직 에밀이 아무 말도 안 했어. 포기하든 계속 나아가든 그건 에밀이 정해.”
“정말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이 황무지에서 무슨 수로?”
소년병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에밀이라 불린 소년은 동굴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동료들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황야를 응시했다.
“…….”
에밀은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피부를 조금이라도 더 가릴 수 있도록 막내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픈 건 괜찮아.’
하지만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근 도시로 향하는 일이 쉬울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성공보다는 실패 확률이 높을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총살당하기밖에 안 할 테니까.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되게 먼 거리를 나아갔을 것이고.
자신은 동기들 중 체력과 정신력이 가장 좋은 편이었고, 실제로 지금 당장도 체력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 혼자 움직일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지금부터는 각자 행동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한다면 동료들은 모두 납득할 것이다.
자신은 늘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왔고, 동료들은 그것을 믿어왔으니까.
나라도 살고 싶다는 본능.
그것을 모두를 위한 선택으로 포장할 수 있다.
“…….”
무심코 입술을 떼어 대사를 뱉으려던 에밀은 황급히 놀라 입에 힘을 주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를 버리지 않는 것이 레지스탕스의 신념인데.
순간이지만 이기적인 생각을 한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에밀은 시선을 들어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벽을 보았다.
지금 자신들은 그토록 무너트리기를 염원했던 벽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에밀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번에는 벽의 정반대 방향으로, 멀리 도시의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 도시 너머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말로만 듣던 제국의 수도가 나타나리라.
「제국의 수도에는 비옥함이 마르지 않는 황금의 땅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이 독점한 곡식은 벽 안에서만 소비되고 있습니다.」
에밀은 T의 연설을 떠올렸다.
몇 달 전, 얼굴 전체를 가리는 투구를 쓰고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정체불명의 사내.
그는 뛰어난 지략과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고, 단번에 총대장 자리까지 추대되었다.
「벽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자본의 재분배가 이뤄져야 합니다.」
연설대 앞에 모인 사람들은 열광했다.
단순히 기존 이념을 되풀이한 연설이었음에도.
「벽을 무너트리고 평등을!」
「벽을 무너트리고 자유를!」
불투명한 미래에 조직을 이탈하는 인원이 생겨나며, 레지스탕스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때마침 변혁의 바람을 일으킬 구원자가 나타난 셈이었다.
이후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할 때가 많아졌으며, 정말 벽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기지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희망은 소년의 가슴 속에도 피어났다.
연설 당시의 열기와 흥분은 아직도 고스란히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에밀이 입을 열었다.
“출발할 준비들 해. 폴, 발이 아프겠지만 참아. 우린 모두 살아서 기지로 돌아갈 거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직한 한 마디에 말다툼이 멈췄다.
잠시 멍하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이 소년병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기다려. 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음 바위로 이동할 거야.”
에밀이 동굴 밖으로 살짝 나갔다.
드넓은 황야만 보일 뿐 제국군의 차량은 별달리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주위를 경계하며 이동을 ─.”
지평선 끝에 흙먼지가 일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에밀은 동굴 안으로 다시 몸을 숨기고, 손가락을 입에 대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로우택틱이라는 회사 이름이 옆면에 각인된 탑차였다.
제국군 차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탑차는 점점 가까워졌다.
예상과 달리, 곧바로 동굴을 지나치지 않고 무언가를 찾듯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뭐야? 왜 안 가?”
“그냥 물건 옮기는 차 아니야? 왜 안 떠나는 거지?”
소년병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탑차가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과 긴장감은 가중되었다.
끼익―
탑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동굴 쪽으로 다가왔다.
추측이나 짐작 따위가 아닌 확신에 찬 발걸음에, 모두가 최후를 직감했다.
에밀은 황무지에서 주운 돌조각을 역수로 쥐었다.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항상 최악을 가정해야 했다.
탁.
이윽고 걸음이 멈췄다.
입구 바로 옆에서였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동굴 안의 모두가 숨을 참았다.
다시 상대가 몸을 움직이며 기척을 낸 순간, 에밀이 몸을 날려 돌조각을 휘둘렀다.
탁!
에밀은 손목이 낚아채여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양손잡이였나? 저번에는 오른손으로 돌조각을 휘둘렀던 것 같은데.”
나타난 이는 카인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음에도 에밀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쉬익!
허공에 매달린 자세 그대로 반대편 손을 휘둘렀다.
또 하나의 돌조각이 들려 있었으며, 목표점은 이쪽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는 카인의 손이었다.
순간 카인이 손을 놓았다.
에밀은 몸을 뒤집어 허공에서 무너지려는 자세를 추슬렀다.
그리고 몇 발짝 뒤에 착지해 카인을 향해 돌조각을 겨눴다.
에밀이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무슨 목적이야? 왜 우릴 탈출시킨 거야?”
“말했을 텐데. 나 역시 벽이 무너지기 바라는 이 중 하나라고.”
카인의 등 뒤에서 에스텔이 나타났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린 너희를 도와주려는 거야.”
“당신들 제국군이잖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에스텔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구호 활동을 하며 수많은 아이들을 보아온 그녀였다.
‘아무리 환경이 혹독해도 아이들 특유의 순수함이나 천진함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하지만 이 아이들의 메마른 눈빛에선 독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 원해서 순수를 버리진 않았을 터.
전쟁이 일으킨 비극에 그녀는 가슴이 쓰라렸다.
카인이 입을 열었다.
“정확한 신원은 밝힐 수 없지만, 제국군 측에 손님으로 초빙된 것은 맞다.”
“신원과 목적을 밝혀. 그전까지는 당신 안 믿어.”
“목적은 말해주지.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될 테니.”
카인이 한 차례 호흡을 고른 후 말했다.
“T를 만나고 싶다.”
“뭐?”
“그 대가로 벽 바깥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에밀의 경계심이 짙어졌다.
상대가 T에게 위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T에겐 무슨 볼일로?”
“내가 잘 아는 인물 같더군. 블루서펜트의 전 간부 카인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지.”
“…….”
소문은 레지스탕스 사이에도 익히 퍼져있었다.
다름 아닌 T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 이야기였다.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과 목덜미 사이에 있는 푸른뱀 문신도 사람들 앞에 보인 적이 있었다.
“…T를 잘 알아?”
카인이 목덜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다시 떼자, 변용 마법이 해제된 자리에 푸른뱀 문신이 나타났다.
“카인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에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뒤쪽의 소년병들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선택해라. 내 제안을 수락할지, 거절할지.”
고민하던 에밀은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지치고, 바라고, 닳아 있었다.
자신들에게 예정된 것은 황야에서의 죽음뿐이었다.
사실상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
카인과 에스텔은 로우택틱의 직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변용 마법으로 얼굴까지 바꿔 완전히 다른 신분의 남녀가 되었다.
탁!
차량에 올라타 문을 닫고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로우택틱의 화약을 가득 실은 탑차가 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화약 냄새가 독할 텐데. 아이들… 괜찮겠죠?”
운전대를 잡은 에스텔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다. 빵이나 스프 냄새보다 화약이나 피 냄새가 더 익숙한 녀석들일 테니.”
소년병들은 짐칸에 있는 화약 상자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휴대 식량을 주고, 직접 치료 마법도 사용해준 뒤였다.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려, 어렵지 않게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머지않아 검문소의 입구가 나타났다.
거대한 바리케이드 앞에 여러 소속의 차량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에스텔은 줄의 가장 뒤쪽으로 차를 몰았다.
검문이 세밀하게 이뤄졌기에, 줄은 꽤 느린 속도로 줄어들었다.
“포로가 탈출했다는 소식은 여기까지 퍼졌겠죠.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닐 텐데.”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위치는 포로들이 탈출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부대 북동부 근처였다.
검문소 주위로 제국군의 수색용 차량들이 보이기도 했다.
에스텔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카인이 다독여주었다.
“괜찮다. 평소 실력대로 연기를 하면 된다.”
“잠깐 손잡아도 돼요?”
아이들의 목숨이 걸려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그게 진정에 도움이 된다면.”
카인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에스텔 역시 한쪽 손으로 카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후우.”
가만히 심호흡했다.
뜨거운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에스텔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훨씬 나아졌어요.”
카인의 말대로 걱정할 것은 없었다.
부대에 적절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두고 왔기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것을 의심받을 일은 없었다.
‘나만 잘하면 돼. 카인이 세운 계획은 이제껏 엇나간 적이 없으니까.’
줄은 점점 줄어 차례가 다가왔다.
총을 든 병사들이 경광봉을 휘저으며 차량을 정지시켰다.
병사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카인은 창문을 내렸다.
“신분과 소속. 용무를 밝혀주십시오.”
“로우택틱 수송부 소속의 파엘라와 헤일입니다. 용무는 특수 화약 3종의 운송. 목적지는 64번 구역입니다.”
카인은 신분증과 출입 신고서를 병사에게 건넸다.
모두 위조가 아닌 진짜였다.
단지 기존 직원들을 대신해, 카인과 에스텔이 탑승해 있을 뿐이었다.
“…….”
병사는 신분증과 서류를 꼼꼼하게 살핀 후 카인에게 돌려주었다.
카인이 손목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통과해도 되겠습니까? 오늘따라 검문이 지연되어 시간이 촉박하군요.”
“아뇨. 짐칸 수색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탑차 뒤편에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짐칸 문으로 접근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사전에 신고된 차량은 별도 수색을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원칙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차량을 수색하라는 상급 부대의 지시가 내려와서 말입니다.”
“…….”
끼익─
짐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백미러를 바라보는 카인의 눈빛은 별달리 동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