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레지스탕스 (1)
“요한 키리프 남작님.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카인은 경비를 향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향했다.
순백의 회랑을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역대 황족의 초상화들이 카인을 주시했다.
‘저들 모두 황제와 다를 것 없는 이들이다. 신세계 프로젝트는 대를 이어 진행되어 왔으니까.’
카인은 황제의 전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폐하의 호출입니다. 1황자와 레지스탕스에 관한 문제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하셨습니다.」
1황자 아벨 프나함.
황실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자,
30번대 구역의 외벽을 지키는 파수꾼.
그 역시 카인이 예언자로 의심하고 있는 대상이었다.
언젠가 조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기에, 황제의 전언은 호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황제가 꺼낼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아닐 터였다.
행방불명된 경찰청장.
분명 그에 대한 언급을 하리라.
드드드─
카인이 앞에 다다르자,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드드드─ 철컹―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방 중앙에는 황제가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었다.
탁. 탁.
책상과 일정 거리에 떨어진 곳에서 카인의 걸음이 멈췄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제국의 영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오느라 고생 많았네.”
카인은 자세를 바로 세운 뒤, 황제와 직접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향했다.
“1황자와 레지스탕스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맞네. 내가 자네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부족한 자를 귀히 여겨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제는 업무 파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쪽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의자 하나가 날아와 카인 옆에 안착했다.
“앉게. 이야기가 짧진 않을 것 같으니.”
청장의 방문 때는 이런 배려가 없었음을 고려하면, 황제가 카인에게 가진 흥미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인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의자에 앉았다.
“내겐 총 6명의 자식이 있네.”
“예. 4명의 황자와 2명의 황녀로 알고 있습니다. 1황자와 1황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도회 때 본 적이 있습니다.”
“맞네. 1황녀 그 아이는 사교에 관심이 없고, 1황자는 30번대 구역의 외벽에 파견을 나가 있네.”
카인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내보이기 위해서였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벽이 무너지지 않는 건 레지스탕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는 1황자의 공이 크다고 말입니다.”
레지스탕스.
벽을 무너트려 ‘안’과 ‘밖’의 경계를 없애고, 부의 재분배를 통한 가난의 철폐를 기치로 삼는 무장 집단이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불편함이 묻어났다.
“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반란분자들이지. 원래 큰 문제는 안 되었네. 변변한 공성무기도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니까. 1황자의 임무 수행이 뛰어난 편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또각.
황제가 쓰던 펜이 그의 악력에 의해 부서져 버렸다.
“최근 문제가 생겼네. 레지스탕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고 하더군.”
“움직임이라고 하면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략적인 부분에서 말일세. 공성전이 아닌, 황야에서 벌어지는 국지전 말이지.”
1황자의 임무는 단순히 벽을 지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적의 수뇌부를 찾아 레지스탕스를 완전히 괴멸시키는 것.
때문에 벽 바깥의 황야로 수색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수색 중 마주치는 적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더군.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말이지. 수 싸움에 밀리거나 치밀한 함정에 빠지는 일도 많았네.”
부러진 펜이 허공에 떠올랐다.
불이 붙어 그대로 녹아 사라졌다.
황제는 새 펜을 꺼내 업무를 이어 나갔다.
“나는 적군에 새로운 지휘관이 생겼다고 생각하네.”
“저 역시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특무대를 파견하거나 황궁의 상주 병력을 보낼까 했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리 좋은 수는 아닌 것 같더군.”
클럽 카스라르고 사건.
청장의 행방불명.
연이은 두 사건으로 경찰청 내부의 혼란은 아직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경찰의 임무는 범죄의 박멸이지 않겠나. 이런 유형의 전쟁이 아니라 말일세.”
군인을 추가로 파견할 시, 제국이 레지스탕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를 원하네. 시민들이 불필요한 불안을 느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내려 하시는 거군요.”
1황자 아벨을 도와 레지스탕스를 상대하라.
일종의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충성심. 전투 능력. 가치관.
모두를 한꺼번에 가늠하는 시험.
‘내가 어떤 인물인지 몹시도 궁금하겠지.’
뒷조사는 당연히 했을 것이다.
‘요한 키리프’에 대한 위조된 정보밖에 찾아내지 못했겠지만.
벽 안과 밖을 오갈 때는 변용 마법을 사용했기에, 요한 키리프 외의 다른 신분에 관해서는 정보가 누출된 적이 없었다.
“해볼 수 있겠나?”
“맡겨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망감을 안겨 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황제가 손짓했다.
책상 위에 놓인 서신 하나가 카인 앞으로 날아갔다.
“가서 1황자를 만나 보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안에 적어 두었네.”
서신은 황제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흑색으로 내부가 비쳐 보일 일은 없었다.
통신을 통해 충분히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쪽을 배달책으로 쓴다는 건, 이 역시 시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게.”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예를 표한 뒤,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야.”
황제의 목소리가 카인의 발을 멈춰 세웠다.
“혹시 경찰청장을 죽인 사람이 자네인가?”
카인은 다시 방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할 순 없지만, 지금 황제의 눈동자엔 흥미로움이 가득하리라.
“경찰청장은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심을 노리고 들어온 유도신문이었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따위의 대답을 했다면 곧장 의심을 샀으리라.
얄팍한 수였다.
하지만 이런 수가 숨 쉴 틈 없이 들어오기에, 황제와의 만남 때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농담일세, 농담.”
황제가 웃음을 터트린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꺼림칙해서 말일세. 갑자기 그렇게 사라질 친구는 아니란 말이지. 차라리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편이 설득력 있지.”
“…….”
“전문가들은 경찰청 내의 정적이 저지른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지만.”
카인은 잠자코 있었다.
괜히 불필요하게 말을 꺼내,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넘겨줄 일은 없어야 했다.
“어쨌든 가보게. 자네가 죽이지 않았다니 아쉽구만.”
저의를 가늠하기 힘든 말이었다.
카인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저택 응접실.
카인은 테이블 맞은편에 있는 제르비아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직 우리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신 것 같더군.”
“…….”
“어느 정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최근 만남이 잦았던 인물이고, 너는 편지에서 직접 후계로 지목한 인물이니까.”
제르비아는 말이 없었다.
마치 모든 감정이 표백되어버린 인간처럼, 얼굴엔 어떤 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인의 말을 듣고 있던 제르비아가 테이블 위로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엔 경찰청 내 여러 인사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벽 바깥으로 업무를 보러 나가는 일시가 쓰여 있었다.
“내가 청장직을 맡는 것을 두고 경찰청 내부는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카인은 종이를 허공에 띄워 불을 붙여 태워버렸다.
“알겠다. 소리소문없이 처리해주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정 간격을 두고.”
대화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레드스컬 잔당 처리에 관한 문제였다.
“50번대 구역은 슈프림 시큐리티가 소탕을 마쳤다. 이제 60번대 구역으로 넘어갈 차례다.”
슈프림 시큐리티의 명성은 꾸준하고 확실한 치안 용역으로 높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40번대 구역과 그 인근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입사 희망자가 늘며 규모가 커졌고, 현재는 상시 전투병력만 오백 명을 넘기고 있었다.
때문에 보스와 간부를 잃고 와해 상태에 가까운 레드스컬을 소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70번대 구역은 나와 특무대가 맡도록 하겠다.”
이후 몇 가지 대화가 더 오갔다.
레드스컬 외에도 박멸해야 할 범죄 조직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제르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카인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들어보고 판단하지.”
“특무대 양성소를 만들 생각이다.”
“마땅한 인재가 없으니 아예 기르겠다는 얘기군.”
“기사 학교엔 이미 공문을 보내놨다. 이미 신청을 마친 생도가 많다고 한다. 네가 면접관으로 동행해주었으면 한다.”
현장과 야전을 무대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특무대.
현장 경험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카인이 동행한다면, 더 확실하고 정확한 인재 선별이 가능했다.
카인은 잠시 제르비아를 응시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원수’인 자신에게 동행 요청을 하는 것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깨달았나 보군. 적어도 지금 당장의 분노와 증오는 아무 의미가 없지. 맹약이 완료되지 않는 이상 상대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감정을 배제하고, 상대와의 관계에서 최대한의 실익을 보려 하는 모습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면접 날짜는 내가 다시 수도로 돌아온 뒤로 잡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알겠다.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지.”
용무가 끝난 제르비아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탁.
“…….”
카인은 그녀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바마에 대한 수색을 강화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밀수 사업을 중단하고 바마를 47번 구역으로 이동시킨 상태니까.
카인은 한동안은 이 관계가 계속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
25번 구역 외곽.
카인과 에스텔이 탄 차량이 거대한 벽 앞에 도착했다.
위잉─
창문이 열렸다.
에스텔이 창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손날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붙였다.
고개를 꺾어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매번 느끼지만 이걸 단순히 벽이라 불러도 될까 싶어요.”
약간 질렸다는 목소리였다.
25번과 35번.
두 구역을 경계 짓는 벽이었다.
높이는 수십 미터에 달했고,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져 무한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벽보다는 성벽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기는 하는군.”
카인은 동의를 표했다.
벽 꼭대기에 돌아다니는 총을 든 군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저쪽이죠? 우리가 갈 곳이.”
에스텔의 손가락이 벽 옆쪽에 자리한 일단의 건물들을 가리켰다.
건물들 주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진 높은 담이 존재했고,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주위를 더 둘러보아도 민간인이나 일반 건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군사 구역으로 지정되어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들어가지.”
카인의 말과 함께 에스텔이 핸들을 꺾었다.
앞유리 너머로 입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잠시 멈춰 주시기 바랍니다. 신분 확인이 있겠습니다.”
초병의 지시에 따라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려 신분증을 건넸다.
“요한 키리프 남작님이시군요.”
초병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요한 키리프라는 이름은 이곳까지 알려져 있었다.
“금일 방문자 명단에 등록되어 있으십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본부로 향하시면 됩니다.”
바리케이드가 위로 올라가고, 차량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중앙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
본부로 향하는 동안 창밖엔 여러 풍경이 스쳤다.
“다 군용 목적의 건물들이겠죠. 저쪽 연병장에선 훈련이 진행되고 있나 봐요.”
군인들의 고함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군사 시설 방문이 처음인 에스텔은 꽤나 신기한 기색이었다.
끼익.
본부 앞에 차가 멈췄다.
입구에는 꽤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반갑습니다. 요한 키리프 님. 안쪽에서 아벨 경비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카인의 시선이 벽면에 붙은 건물 내부도에 스쳤다.
“이쪽은 아벨 님의 집무실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 그게 지금 일을 보고 계신데, 그쪽으로 데려오라 하셔서….”
“이해합니다. 외벽의 모든 수비를 맡고 계시니 업무가 과중하시겠지요. 동시에 여러 일을 봐야 할 상황도 있을 겁니다.”
좁은 통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탕!
반복된 총성이 들려왔고, 걸음을 옮길수록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사격 연습을 하고 있나 봐요. 아니면 훈련을 지도 중이거나.”
에스텔이 속삭였다.
하지만 카인의 얼굴은 총성이 가까워질수록 싸늘하게 굳어갔다.
마침내 커다란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아벨 님. 요한 키리프 님이 오셨습니다.”
─ 들어와도 좋습니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야외 공간으로 이어졌다.
“……!”
그리고 에스텔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