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운명의 소용돌이 (5)
카인은 바닥에 쓰러진 제르비아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나를 공격하려 하는지 모르겠군.”
“카인…너는…분명…모든 걸…알고 있었겠지.”
제르비아는 심장의 격통을 참아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눈가엔 눈물이 맺히고, 얼굴은 분노와 슬픔의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것은 비단 물리적 고통만이 아니리라.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악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
“…….”
카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제르비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이지?”
“블루서펜트 보스가 내 아버지였다는 사실 말이다.”
한줄기 눈물이 제르비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어째서 이런 방법을 택했지? 마나를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너라면 분명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
그녀의 말대로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두 보스를 죽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시간과 금전을 비롯한 자원 소모가 더 크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런 방법을 택했는가.
최근 카인의 머리를 줄곧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떠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많은 순간 고뇌했다.
그리고 매번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내가 떠나도 이 세계는 존속될 가능성이 크다.」
황제의 음모를 저지해 세계 멸망을 막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었다.
아마 범죄를 근절하고, 모든 이가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은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전 대륙에 구축한 뒤가 될 터였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이후.
대륙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범죄에 대한 증오를 불태울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많은 인물을 검토했다.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결격 사유가 있었다.
단 한 사람.
제르비아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이제껏 범죄에 대한 증오를 연료 삼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녀 외의 인물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애써 구축한 질서가 무너지는 그림 밖에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적임자는 그녀밖에 없다고.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도 쉼 없이 달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범죄 근절에 대한 의지가 전보다 약해진 인상을 받았다.
그건 나이를 먹음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나, 일부는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최근 협력 관계가 지속되며 변화한 제르비아의 태도.
그녀가 자신에게 품은 인간적인 호감을, 카인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품은 삶의 동력은 악에 대한 순수한 증오 그 자체이니.
마음에 생겨난 작은 균열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해, 그녀의 가치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리라.
‘제르비아. 네가 내게 품은 증오는 결코 무뎌져서는 안 된다.’
금을 보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카인은 자신이 필요악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평생토록 제르비아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왜 이런 방법을 취했냐고.”
이윽고 카인의 입이 열렸다.
명백히 비웃는 투였다.
“당연한 얘기지 않나. 이편이 가장 손쉽고 간편한 방법이기 때문이지. 덕분에 내 손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수 있었군.”
아득.
제르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그런 이유 하나 때문이었나.”
“뭐가 문제지? 네 목표는 범죄 조직을 무너트려 벽 바깥의 치안을 되찾는 것 아니었나?”
“너는 최소한 내게 미리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카인이 픽 웃었다.
“만일 블루서펜트 보스가 청장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네 검에 망설임이 없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나?”
“함께 논의했다면 분명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거다.”
“제르비아.”
이름이 불리자 제르비아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카인 역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넬 수는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악으로 남아야 하니까.
카인이 한 차례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떼었다.
“전에 말했을 텐데.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휩쓸리지 말라고. 아버지? 아버지라고 했나?”
제르비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웃기는군. 아버지가 아니라 범죄자다. 약자를 핍박해 자기 이득을 도모하던, 한낱 범죄자.”
“…….”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 두 조직 모두 손대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
“노예 사업, 고리대금, 불법 토지 노획 따위. 이득을 위해선 민간인의 목숨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지. 함께 논의했다면 더 나은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에도 피해자가 나오고 있단 사실을 모르는 건가?”
제르비아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인의 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녀석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취했을 뿐이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녀석이 보인 비인간성과 독단성에, 분노와 괴로움이 뒤섞여 용암처럼 들끓었다.
카인의 말은 끝났다.
제르비아는 항변하듯이 힘겹게 뱉어냈다.
“…그 범죄자에 너 역시 포함된다는 걸 알고 있나.”
제르비아는 알고 있었다.
카인이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는 범죄는 저지르지 않아 왔다는 것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내가 언제라도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있던가?”
“…….”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몹시 시리게 느껴졌다.
“한 가지만 묻겠다.”
결심을 마친 듯이, 달싹이기만 하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너는 자비르를 죽였나?”
이 역시 알고 있었다.
카인이 오빠를 죽인 범인일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카인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털어버릴 이유가 필요했다.
카인은 제르비아를 응시했다.
언젠가 그녀가 물어오리라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31번 구역에서 있던 테러 사건 당시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계단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경찰.
나중에야 그가 경찰청장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자비르라니. 네가 쓰고 있는 가명 말인가?”
카인은 짐짓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제르비아의 눈빛에 담긴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
“5년 전, 31번 구역 외곽 다리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 그때 너는 교각 하부의 계단에서….”
“기억나는군. 내 앞길을 가로막았던 그 경찰 말이지.”
카인은 자비르를 죽이지 않았다.
그를 지나쳐 상층에서 제이나와 전투를 벌였을 뿐.
허나 카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실과는 다른 말이었다.
“그래. 내가 죽였다.”
그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제르비아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번갈아 스쳤다.
아주 천천히, 몹시 느리게도.
충격과 혼란, 분노와 슬픔을 거쳐 끝내는 체념으로.
“카인.”
제르비아는 카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목메는 목소리로 토해냈다.
“나는 기필코 너를 죽이겠다.”
***
상황이 정리되고, 제르비아와 특무대는 114번 구역을 떠났다.
특무대와 구역 경찰을 입막음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경찰청장의 죽음.
그들은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거대한 사건에 연루된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었으며, 카인이 고용한 마법사들과 맹약을 맺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적지 않은 양의 금전적 보상을 약속받고, 곧장 퇴직 후 오늘 일에 대해 영원히 함구할 것.
조금이라도 청장의 죽음에 대해 입 밖에 내는 순간 맹약의 금제가 그들의 심장을 죄일 터였다.
“모두 죽여 입막음을 하는 게 훨씬 간편할 텐데 말이지.”
카인의 주장은 그랬다.
하지만 제르비아의 맹렬한 반대로 맺어진 합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계획을 나눴다.
청장의 죽음.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의 붕괴.
경찰 조직에서 벌어질 권력 다툼.
“너를 청장으로 만들겠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평소와 같은 말투로 대화가 오갔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완전한 적과 적.
맹약에 의한 강제적 협력 관계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카인에 대한 살의를 품는 것만으로 맹약의 금제가 발동했기에, 제르비아는 고통을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맹약이 완료되는 순간 그녀의 검은 내 심장을 향할 것이다.’
카인은 바마의 밀수 사업을 중단할 생각이었다.
맹약의 조건은 블루서펜트의 괴멸.
개중에는 바마의 죽음도 포함됐다.
혹시라도 제르비아에게 꼬리를 잡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될 일이었다.
‘바마가 죽는 건 적어도 예언자를 색출하고, 더 이상 벽 안쪽에서의 볼 일이 없을 때여야 한다.’
적어도 1년 이내.
그 안에 카인은 벽 안쪽에서의 모든 활동을 끝마칠 생각이었다.
바마와 엘렌 교수를 재회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말이다.
“수도에서 보겠다.”
제르비아는 더없이 냉랭한 시선으로 카인을 응시하다, 특무대와 함께 황야를 떠났다.
이후 슈프림 시큐리티와 잿빛늑대는 카인의 지시에 따라 현장의 정리를 끝마쳤다.
“그럼 차후 47번 구역에서 뵙겠습니다.”
밀시안은 카인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모든 인원을 이끌고 47번 구역으로 떠났다.
황야에는 카인과 에스텔.
두 사람이 타고 온 차량 한 대.
그리고 지평선 너머 저물고 있는 황혼만 남았다.
에스텔은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강인하고 넓어 보이는 등.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고독함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
에스텔이 카인의 등 뒤로 다가섰다.
머뭇거리며 손을 뻗다가, 회수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카인에게 모든 전후 상황을 들은 상태였다.
극단적 상황 연출이 제르비아의 미움을 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알파치노와 레이몬드 모두 제르비아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황제가 대륙의 존망을 위협하는 모략을 꾸미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계획이라는 사실.
믿기 힘들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가 아닌 카인의 말이었으니까.
“…….”
이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지만,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망설이던 에스텔의 선홍빛 입술이 열렸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추앙받을 수 있는 존재하고 생각해요. 미움이나 증오 따위가 아니라요.”
그녀는 카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카인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그저 범죄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옆에서 보고 느낀 당신은 달랐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났다.
“굳이 악역을 자처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카인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보다 말했다.
“에스텔. 나는 범죄자일 뿐이다. 알파치노와 레이몬드.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지.”
그의 시선이 황혼으로 인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 향했다.
“나는 그림자는 될 수 있어도 결코 빛은 될 수 없다.”
***
청장이 집무실에 남긴 편지가 발견되며 수도에는 파란이 일었다.
「오랜 업무를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다. 경찰청장의 업무는 자비르 치안국장이 대신할 것이다.」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기사를 보도하며, 소식은 빠르게 벽 안쪽 전체에 퍼져 나갔다.
최초 발견자는 청장의 비서인 레이나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청장의 ‘집무실’에서 편지를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카인이 위조한 편지를 ‘발견’했다고 증언했을 뿐이었다.
「레이나. 지금의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면 앞으로 내 지시에 따르는 게 좋을 것이다.」
청장과 블루서펜트의 관계.
그것을 이용하여 그녀를 겁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 역시 상황 판단이 빨라, 자신이 어디에 다시 몸을 의탁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세간의 의견은 분분했다.
「실제로 여행을 떠난 걸 수도 있소.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넘긴 다음 자신은 물러나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지난 표창식 때 하기도 했잖소?」
「너무 낙관적인 의견 같은데 말입니다. 정적에게 살해당했다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청장의 행적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이뤄졌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수도에서 114번 구역으로의 이동.
그 과정에서 청장은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찰 내부에서의 수사 외에도, 황제 직속의 수사관들이 암암리에 황실 밖으로 파견되었다.
조사 대상은 최근 청장과 만남이 있었거나 관계가 깊은 모든 인원.
제르비아와 카인 역시 그 대상에 포함이 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미행이 붙은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2주 정도가 지나 미행이 사라졌을 때.
카인에게 황제의 전언이 도착했다.
30번대 구역의 외벽으로 나가, 레지스탕스와 교전 중인 1황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