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운명의 소용돌이 (3)
제르비아는 놀란 눈으로 구릉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백여 대 가까이의 차량이 곳곳에 나뒹굴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인원이 한데 얽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
아비규환과 다름없는 풍경.
먼 거리임에도, 비명과 병장기의 마찰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특무대가 섞여 있어. 수도를 떠날 때 분명 누구에게도 정보를 발설한 적이 없는데.’
일단 전투를 벌이고 있는 세력은 크게 넷으로 보였다.
특무대를 위시한 경찰.
소속을 알 수 없는 무장 세력.
잿빛 털을 가진 늑대 수인 무리.
그리고, 범죄 세력으로 보이는 가장 많은 숫자의 무리.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전장 최중심이었다.
무언가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한참 보고 나서야, 어마어마한 속도로 맞붙고 있는 ‘두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의 보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손에 땀이 배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곳이 카인이 말한 장소가 맞다면,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인물로는 두 조직의 보스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카인, 카인은 어디 있지?’
그녀의 눈빛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카인을 찾고 있나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비아는 흠칫 놀라 돌아섰다.
“에스텔…사제?”
“오랜만이네요. 카인은 저기 있어요.”
에스텔의 손가락이 전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허공에서 피어나고 있는 불덩이들.
마치 운석처럼 지상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피어나는 불덩이 사이에 유유히 ‘떠’ 있는 한 사내.
제르비아는 그제야 카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상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설명이요? 설명이 필요한가요?”
“예?”
정말 몰라서 반문하냐는 듯,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 사상 최악의 두 범죄 집단이 맞붙고 있어요. 할 일이 정해져 있잖아요? 당신, 경찰이니까.”
제르비아의 시선이 다시 전장을 향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총과 수트로 무장한 인원이 카인의 세력이란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경찰도 그가 끌어들인 겁니까? 이럴 거면 왜 내게 혼자 움직이라 지시를….”
“당신, 카인과 맹약을 맺었죠. 블루서펜트를 무너트리기로.”
에스텔이 제르비아의 말을 끊었다.
“저기 블루서펜트의 보스가 있어요. 레드스컬의 보스도 있죠. 전투가 꽤 오래 지속되어 둘 모두 지친 상태에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강자라도,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저리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면 급속도로 기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동의합니다. 지금 공격하면 두 보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카인은 왜….”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인은 왜 두 보스를 공격하지 않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위험하니까요.”
“…….”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했어요. 꺼져가는 불씨라도 열기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고요. 하지만.”
에스텔이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당신이라면 손에 화상을 입는 일 없이 불씨를 꺼트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몰라요. 그냥 상황이 끝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 어서 가요.”
에스텔은 입을 다물었다.
그걸로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
에스텔을 쳐다보던 제르비아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전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이크의 스로틀을 돌려 구릉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가만히 있어 봐야 상황이 변하는 건 없어.’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쓰러트려야 할 적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부아앙─!
먼 풍경으로 자리해있던 전장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추적기에 표시된 점은 두 보스의 전투 현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아, 근처에 주차된 차량 중 하나에 탐지기가 부착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전장은 코앞.
적들이 달려들기 시작하리라.
제르비아는 자세를 낮춰 바이크에 몸을 바짝 붙이고, 돌파를 준비했다.
“……?”
하지만 달려드는 적은 없었다.
서로의 전투에 집중해 이쪽이 지나가는 걸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인가.
간혹 공격해오는 레드스컬 조직원이 있었지만, 늑대 수인이나 슈프림 시큐리티에 막혀 나가떨어졌다.
무사히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이제 두 보스까지의 거리는 약 20미터.
끼익─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바이크에서 내려 검을 뽑아 들고 긴장된 걸음을 내디뎠다.
두 보스는 전투를 멈추고 대치 중인 상태였다.
거친 호흡으로 몸을 들썩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
두 범죄 집단의 수장을 실제로 목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쪽은 얼굴에 흉터가 가득했다.
다른 한쪽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찢겨진 옷 사이 보이는 문신으로, 진영을 알 수 있었다.
제르비아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온몸의 피가 바짝 말라붙고,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두 보스의 싸움터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 그랬다.
그때 반대편에 레드스컬 조직원 하나가 보였다.
블루서펜트 보스를 치기 위해 검을 꼬나쥐고 그의 등 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두려움, 공포, 불안.
제정신은 아닌 얼굴이었다.
두 보스가 뿜어내는 위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주, 죽어─!!!”
그가 자리를 박차 올라 블루서펜트 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포에 짓눌린 몸짓이었다.
하지만 몸에 밴 기본 실력 덕에,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서걱.
그리고 다음 순간.
레드스컬 조직원의 잘린 목과 몸뚱어리가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블루서펜트 보스는 여전히 부동자세였다.
들고 있는 단검에, 막 흘려진 게 분명한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을 빼면은.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제르비아는 두려움과 함께 의문이 들었다.
동작을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었다.
최근 자신의 마나회로가 부쩍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저 괴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그림은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허공에 있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빛이 말하는 듯했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
에스텔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당신이라면 손에 화상을 입는 일 없이 불씨를 꺼트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검을 고쳐 쥐고, 시선을 다시 두 보스에게로 향했다.
그래.
이미 한배를 탄 이상 녀석의 말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제껏 녀석이 내린 지시에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탓!
제르비아가 자리를 박찼다.
그와 동시에 두 보스 역시 서로를 향해 자리를 박찼다.
먼저 붙은 것은 두 보스였다.
파직!
너클에 부딪친 단검이 부서지고, 블루서펜트 보스가 새로운 무기를 꺼내 반격을 개시했다.
‘레이피어?’
제르비아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몸은 이미 적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블루서펜트 보스의 검격에 크게 뒤로 물러난 레드스컬 보스.
어느새 레이피어에 찔렸는지, 그의 가슴에선 얇은 핏줄기가 여럿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있었다.
전투 불능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장기가 크게 손상되었으리라.
이제 이쪽과 거리가 더 가까운 것은 블루서펜트 보스였다.
먹잇감의 숨을 완전히 끊기 위해 다시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찰나였다.
‘적은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일격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승산은 …!’
거리가 좁혀졌다.
절호의 기회였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쐐액!
검을 휘두르는 순간.
블루서펜트 보스가 몸을 돌렸다.
자신의 목을 향해 궤적을 그려오는 레이피어를 보며, 제르비아는 죽음을 직감했다.
“……!”
하지만 다음으로 벌어진 일은 예상 밖이었다.
블루서펜트 보스는 이쪽을 보고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레이피어를 급히 거두었다.
동작을 억지로 튼 탓에 자세가 크게 망가졌고, 제르비아의 검에 어깨를 크게 베였다.
“큭.”
블루서펜트 보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제르비아는 순간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제르비아는 신속하게 공격을 이어나갔다.
챙! 챙!
검날이 부딪치고, 갈리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황야를 울렸다.
지켜보던 카인이 강화 마법을 사용해주었는지, 근력과 민첩성이 대폭 향상된 것이 느껴졌다.
‘이길 수 있다.’
공격을 방어해내기 급급한 상대.
점점 전투에 확신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상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어깨에 부상을 입고, 강화 마법으로 무력 차를 좁혔다고는 하지만.’
조금 전까지 압도적 무위를 뽐내던 ‘괴물’ 같은 상대.
무언가 행동에 제약이 생겨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인상이었다.
몇 차례 전장을 벗어나려 시도했지만, 카인의 마법과 자신의 추격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정말로 이길 수 있다.’
얼마나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던가.
블루서펜트라는 최악의 범죄 집단에 종말을 선사할 수 있었다.
위화감과 기시감은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목표 성취에 대한 고양과 흥분이 그 위를 짙게 덮은 상태였다.
블루서펜트 보스는 몰이 사냥을 당하는 야수처럼 점차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결국.
푸욱.
제르비아의 검에 심장이 관통당해 버렸다.
‘…허망…하군.’
레이몬드는 뜨거운 숨을 뱉었다.
입가에 피를 주륵 흘렸다.
눈동자의 초점이 풀리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딸의 얼굴을 시야에 최대한 많이 담기 위해 노력했다.
“미안…하다….”
많은 것이 담겨 있는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몬드는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평생 사랑과 증오 사이에 번민하던 사내를 중심으로, 붉은 피 웅덩이가 번져갔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여자의 아버지였다.
그뿐이었다.
“미안하다고…?”
제르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범죄 조직의 보스가 왜 자신에게 미안하단 말을 한 걸까.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짙은 희열감에 이성이 마취된 상태였다.
“끝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있을 텐데.”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비아는 몸을 돌려 레드스컬의 보스를 보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
이상했다.
그는 이쪽을 보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슴 벅차오름을 느끼나,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가 미소를 지었다.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알파치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치 제르비아의 얼굴을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듯이.
“고맙다. 정말….”
「이렇게나 잘 자라주어서.」
제르비아의 검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멀리 날아간 알파치노의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20년 동안 짓지 않았던 미소가 그의 얼굴에 피어 있었다.
공중에 떠 있던 카인은 레이몬드와 알파치노의 시체를 향해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보스─!!!”
그때.
멀리서 중첩된 외침이 들려왔다.
슈프림 시큐리티를 뚫은 레드스컬 조직원들이었다.
족히 10명은 되어 보였다.
모두 간부,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들이었다.
보스의 죽음이 그들의 분노와 증오에 불을 지폈으리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조직원들이 검을 꼬나 쥐고 카인을 향해 도약했다.
“카인! 위험하다!”
제르비아가 황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그중 하나의 목밖에 베지 못했다.
레드스컬의 검이 카인에 몸에 닿으려는 찰나.
방대한 양의 마나가 알파치노와 레이몬드의 시체에서 카인의 손안으로 빨려들었다.
카인의 온몸이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전장이 새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