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운명의 소용돌이 (1)
“청장님 앞으로 도착한 서신입니다. 이름이 잘못 적혀 있지만, 혹시 몰라 가져왔습니다.”
레이나가 책상 위에 서신을 두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청장은 서신을 집어 들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봉투.
한구석에 쓰여있는 낯선 필체.
─친애하는 레이몬드에게.
하지만 글씨가 나타내는 이름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청장은 직감할 수 있었다.
거대한 운명이 자신을 덮치기 위해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몹시 불편하고 혼란스럽던 때였다.
지난 며칠 수사를 계속했지만, 30번대 구역 일대에 퍼진 ‘청장’과 ‘블루서펜트’의 관계에 대한 악소문은 잡힐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서신을 뜯자 간단한 메시지가 적힌 종이가 나타났다.
「딸이 잘 컸더군.
잘 데리고 있네.
아래 장소에서 꼭 보았으면 좋겠군.
혼자 나오게.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오랜 친구 A로부터.」
종이 뒤쪽에는 114번 구역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외곽 황야의 한 지점에 X표와 함께 정확한 시간과 좌표가 쓰여 있었다.
“…….”
청장은 서신 봉투에 함께 들어있던 낡은 펜던트를 꺼냈다.
덮개를 열자 젊을 적 셀리나의 빛바랜 사진이 나타났다.
셀리나의 유품.
제르비아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청장의 눈이 펜던트 구석구석을 살폈다.
모조일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제르비아가 지니고 다니던 그 물건이 맞았다.
청장이 책상 위에 있는 버튼을 눌러 레이나를 호출했다.
“치안국장이 현장 지원을 나간 곳이 어느 구역이라고 했지.”
“38번 구역입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현장에 연락을 취해보게. 치안국장과 얘기를 나눠야겠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레이나가 집무실을 나간 후 청장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판단으로 쉴새 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이 종이 끝에 쓰인 문구로 향했다.
「오랜 친구 A로부터.」
친구라고. 감히.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청장이 곧바로 호흡을 가다듬고 감정을 가라앉혔기에, 그리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A는 알파치노일 것이다.
애초에 녀석은 자신의 정체를 그리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38번 구역. 최근 레드스컬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구역이긴 하나, 치안국장과 특무대의 무력을 고려하면 실제 인질로 사로잡혔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책상을 두드리는 청장의 손가락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펜던트는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치안국장에게서 훔쳤거나.
혹은 떨어트린 것을 주웠다거나.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모두 쉬이 납득하기는 힘든 것들이었다.
청장은 눈을 감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쨌든 38번 구역에 있는 치안국장과 연락만 된다면, 편지의 내용이 거짓임이 드러나는 셈이었다.
‘내가 치안국장을 걱정하고 있다고.’
청장의 입가가 씰룩였다.
이내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최적의 수를 선택해 범죄 세력에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질이 치안국장이 아닌 다른 인물이었어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분 뒤.
레이나가 들어와 말했다.
“38번 구역의 경찰서장과 특무대대원들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치안국장은 38번 구역에 도착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
접선 당일.
114번 구역의 황야엔 검은 차량 한 대가 서늘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안에 타 있는 건 단 두 사람이었다.
“말해두지만 레이몬드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네는 죽네. 이만한 병력을 움직이는 일도 조직 차원에선 손해가 막심하니까.”
병력이란 황야 멀리 돌산 뒤에 은닉하고 있는 레드스컬의 조직원들을 뜻했다.
레이몬드를 잡기 위해 조직 내의 모든 정예를 대동한 상태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몬드는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카인은 차량 유리 너머를 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야에는 모래와 바람, 갈라진 땅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청장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이용한다.
카인이 접선 장소로 이곳을 택한 이유였다.
“부디 그 말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지.”
알파치노의 시선이 카인의 얼굴에서 차량 유리 너머로 향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시 48분.
약속까지는 10분가량이 남은 상태.
초조한 기색이었다.
오랜 세월 축적해온 감정을 해소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알파치노가 다시 대화 운을 띄었다.
“분명 나타나겠지.”
“예. 딸을 사랑한다면 분명 나타날 겁니다. 지시대로 혼자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딸.
알파치노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이몬드는 그 아이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나.”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알파치노는 카인이 말이 사실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의 성격상, 친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면 진작에 그 아이를 내쳤을 것이다.
상황이 우스웠다.
녀석이 이 자리에 나타난다면 그건 자신의 자식도 아닌 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레이몬드에게 복수를 한 뒤에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
그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증오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있던 탓이었다.
바라는 그림은 하나 있었다.
꼬여있던 관계의 매듭이 풀려 서로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빼앗겼던 딸을 찾아 남을 생을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은 음지를 벗어날 수 없는 범죄자이며, 그 아이는 빛을 비추어 음지의 그림자를 없애는 경찰이었다.
또한 레이몬드를 제거한다면 그 아이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터였다.
“…….”
허나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장장 20년의 세월 동안 가슴 속에 칼을 품고 살아왔으니까.
그때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차량 한 대가 다가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 멈추고, 남자 하나가 내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변장용 가죽을 쓴 레이몬드란 걸, 카인과 알파치노 모두 직감할 수 있었다.
“다녀오지.”
알파치노가 문을 열고 나갔다.
황야 위에 두 남자가 마주 섰다.
“내 딸은 어디 있나?”
먼저 입을 연 쪽은 레이몬드였다.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했던 알파치노는 이내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목소리를 듣고 상대가 진짜 레이몬드가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알파치노가 웃음을 뚝 그치고 정색하며 말했다.
“여전하구나. 상대를 깔보는 그 재수 없는 말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다시 한번 묻지. 내 딸은 어디 있나?”
순전히 자신의 할 말만 하는 레이몬드의 태도에 알파치노가 으르렁거렸다.
“그딴 식으로 나오면 네 딸의 목숨은 없을 거다. 진짜 얼굴을 보여. 과거의 인연을 만났는데 그 정도 성의쯤은 보여야지?”
“…….”
레이몬드는 알파치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네 딸의 목숨은 없을 거라니.’
이 더러운 뒷골목 출신의 잡배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납치한 이가 스스로의 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라는 투로, 레이몬드가 대답했다.
“가면 따위야 벗어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인질의 안위를 먼저 확인하고 싶다. 그게 거래의 기본이지. 그렇지 않나? 알파치노?”
마지막 이름에 강세가 들어갔다.
알파치노는 흥분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디스크 모양의 영상 장치를 꺼냈다.
우웅─
마법이 발동하며 수갑이 채워진 채 기절해있는 제르비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딘가의 지하 감옥으로 보였다.
청장의 눈동자가 고요히 영상을 응시했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것이라. 당연히 네 목숨 아니겠어? 셀리나를 빼앗고 내 삶을 망가트린 대가를 치러야 하지.”
“빼앗은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녀가 가진 격은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았지.”
묵은 감정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 대화가 쌓아 올려졌다.
“너는 셀리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만난 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었으니까.”
“우습군. 사랑의 깊이가 꼭 기간에 비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꼴이.”
대화는 이어졌다.
마치 20년 전 술집에서의 첫 만남 때로 돌아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셀리나가 행복했을 거라 생각하나.”
“그녀는 행복했다. 적어도 너 따위 뒷골목 잡배와 함께 있었을 때보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바싹 마른 부싯돌처럼 까끌하고도 건조했다.
조금이라도 부딪치는 순간 불이 붙어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카인은 차량 내부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 밖에서 안이 보일 일은 없었다.
‘청장이 제 역할을 잘하고 있군.’
카인은 자신이 청장에게 일러두었던 말을 떠올렸다.
「먼 위치에 자리를 잡고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알파치노가 치안국장의 위치를 발설하도록 대화를 유도하십시오.」
이중 스파이 역할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알파치노와 레이몬드.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에 두 사람 모두 평소의 여유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또한 카인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부하들에게 내리는 지시에 평소의 배 이상의 주의를 기울였다.
모든 작업은 레이몬드와 알파치노를 주연으로 한 무대 뒤에서 은밀하게 진행을 마친 상태였다.
「…알겠네. 일단 그 아이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으로 하지.」
가장 먼저 한 것은 알파치노와 함께 제르비아를 납치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모든 행로를 알고 있고, 레드스컬 내에 강자가 많기에 납치는 성공할 수 있었다.
「더러운 범죄자들! 박멸시켜주마!」
맹수를 포획하듯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어쨌든.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연출했다.
벽 바깥에서 운용할 병력이 적은 청장은 예상대로 도움을 요청해왔다.
「청장님의 부탁을 제가 거절할 리 있겠습니까.」
병력 지원.
그리고 제르비아의 위치에 대한 단서를 잡는 즉시 수색을 개시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청장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제르비아의 영상에 장소를 특정할 몇몇 단서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적정 시간이 지나고 청장의 귀에 있는 무선 장치로 신호를 보내는 일뿐이다.
바로 제르비아의 신변을 무사히 확보했다는 신호를.
그렇게 몇 분여가 지나고, 더없이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보며 카인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건물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곧바로 구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무전기를 꺼내 말함과 동시에 레이몬드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땅에 인 먼지가 사라지기도 전, 레이몬드의 신형이 알파치노의 머리 위 허공에 나타났다.
쐐액!
머리를 쪼갤 듯 내리치는 단검을, 알파치노는 손을 들어 착용하고 있던 무쇠 너클로 막아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전투는 속행되었고, 두 사람의 신형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쇳소리가 사납게 공기를 긁어댔고, 바닥 곳곳에는 흙먼지가 피어났다.
움푹움푹 패이는 대지로 두 사람의 위치를 겨우 가늠할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요란한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황야의 동쪽과 서쪽 지평선 끝.
두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차량이었다.
처음엔 양쪽에 각기 하나씩만 보이던 차량 지붕이 순식간에 수십으로 늘어났다.
한쪽은 특무대 일부와 구역 경찰.
또 한쪽은 레드스컬 정예들이었다.
달칵.
카인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목적은 레이몬드와 알파치노 두 사람 모두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
계산상 둘의 무력은 비등하다.
이대로 둔다면 둘 모두 빈사에 가까운 상태가 될 것이다.
때문에 누군가의 전투 개입을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전투에 끼어들어 봐야 돌풍에 말려든 것처럼 갈려 나가기밖에 안 하겠지만. 변수는 차단하는 게 좋겠지.’
카인은 지평선 끝에 몰려오는 차량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무전을 날렸다.
“사냥을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