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레이몬드 (3)
“블루서펜트. 그리고 레드스컬. 두 조직 보스의 위치를 알아냈다.”
제르비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집무실의 커튼을 치고, 문 바깥 복도에 누가 없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와 말했다.
“확실한 정보인가?”
“내가 언제 불확실한 정보를 전달한 적이 있던가.”
카인과 테러에 관한 생각이 순간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블루서펜트는 최근 카인이 각 간부를 제거하며 완전히 와해 되어 있던 상태였다.
남은 것은 바마와 보스뿐이었지만, 둘 모두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레드스컬의 경우 보스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중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두 보스의 위치를 동시에 알아냈다니, 믿을 수 없는 수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보스의 현재 위치가 아니라 미래 위치를 알아냈다 해야겠군.”
“미래 위치?”
“일주일 뒤. 114번 구역. 두 보스는 그곳에서 접선한다.”
제르비아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두 조직은 적대 관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양측에 심어둔 스파이를 통해 입수한 정보니 믿어도 좋다.”
“…….”
“최근 블루서펜트의 기세가 많이 꺾인 상태지. 조직 간의 합병 이야기가 오갈 것으로 추정된다.”
카인이 말한 것 중 진실은 없었다.
스파이를 심어두었다는 것도.
합병 이야기가 오갈 것이란 것도.
하지만 두 보스가 해당 날짜에 해당 구역에서 만나리란 사실은 장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 테니까.
「일단 오늘은 돌아가지.」
청장과 카인이 31번 구역에서 수도로 돌아온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사정을 얘기해주신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아닐세. 내가 잠시 착각을 했던 것 같군.」
31번 구역에서 두 사람은 눈에 띄는 모든 레드스컬의 아지트를 급습해 초토화시켰다.
또한 구역 경찰을 동원해 도시 전체를 수색했지만, 알파치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소문을 풀던 남자들에게 의뢰했던 이는 변용마법을 사용한 카인이었으니까.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카인은 청장의 목소리에서 옅은 초조함이 묻어남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이쪽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일으킬 폭풍은 그에게 의심이 깊어지고 확신으로 변모할 시간을 주지 않을 터였다.
“일주일 뒤인가. 알겠다. 즉시 인원을 꾸리겠다.”
“아니. 움직이는 건 너와 나 둘뿐이다.”
제르비아의 눈썹이 휘었다.
“보스라고 했지 않나. 특무대 전체를 동원해도 부족한 사안이다.”
“제르비아.”
카인이 한 걸음 다가섰다.
제르비아가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경찰 조직 내에 블루서펜트의 스파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이제까지 블루서펜트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며 한 번도 이상함을 느낀 적이 없나?”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카인을 포함하여, 적이 마치 이쪽의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확실하게 의문을 느꼈다. 보스의 지시 중에는 경찰의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 가는 것들이 많았지.”
제르비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치안국만큼은 조직 개편을….”
“기존 인원을 갈고 그 자리를 모두 새 인원으로 채워 넣고 있다지.”
카인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개편은 진행 중이다. 현재 치안국 내에 스파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나?”
“…….”
“경찰청 내에서 나누는 대화는 어디든 안전하지 않다. 도청의 위험이 있으니까.”
도청.
제르비아가 흠칫 놀라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물론 이곳은 안전하다. 점검을 마쳤는데 별다른 도청 장치나 마법은 숨겨져 있지 않더군.”
아니, 대체 언제.
여긴 내 집무실인데.
어쨌든 제르비아는 카인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 이해했다.
경찰청 내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114번 구역으로 암행하라는 이야기였다.
“구역 내의 정확한 접선 장소와 시각은 어떻게 되지? 그들이 이끌고 도착할 전투원의 규모는?”
제르비아는 조금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상대측 무력에 대한 언급.
정말로 너와 나 둘로 괜찮겠느냐 돌려 묻는 것이었다.
그녀의 속내를 읽은 카인이 답했다.
“정말로 믿을만한 이가 있다면 대동해도 좋다. 행여라도 일을 그르칠 일이 생기지 않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이라면.”
‘정말로’라는 단어에 은근한 강세가 들어갔다.
망설이는 제르비아의 모습을 보며 카인이 덧붙였다.
“제르비아. 내 목표는 블루서펜트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너를 경찰청장 자리에 올리는 것이다.”
그녀는 그 말에 동의했다.
협력 관계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카인에게는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오고 있었다.
“나를 믿어라.”
카인은 제르비아를 보았다.
제르비아도 카인을 보았다.
나직하고 단단한 한마디였다.
짧은 길이지만, 그 어떤 긴 문장보다도 울림은 컸다.
카인은 제르비아를 보았다.
제르비아도 카인을 보았다.
한참 동안 시선 교환이 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알겠다. 114번 구역으론 혼자서 이동하겠다. 상부에는 행선지를 거짓으로 보고해야겠지.”
***
경찰청 본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의 공동묘지.
청장은 누군가의 묘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지혜롭던 여인
셀리나 칼타
1029. 7. 24. ~ 1052. 12. 15.」
“셀리나.”
입에 담아 발음하는 것만으로 아득한 회한이 밀려드는 이름.
그녀가 죽은 직후 몇 년간은 매일.
그 이후로도 최소 한 주에 한 번씩, 청장은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건 1년이었다.
짧은 시간이나 인생 그 어떤 때보다 화려하게 불타던 시기였다.
사랑이란 불꽃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기였으니까.
그 끝은 결국 파국이었지만.
덕분에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이면으로 가지는 감정이란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녀석이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소.”
녀석은 알파치노를 의미했다.
그리고 셀리나는 죽는 순간 청장이 아니라 알파치노의 이름을 불렀다.
셀리나는 벽 바깥의 연인이었던 알파치노를 끝내 잊지 못했다.
애써 부정해오던 막연한 심증이 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고, 알파치노에 대한 농도 짙은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저 순간의 연적이라 생각했던 이가, 평생의 연적이 되어 자신을 괴롭힐 줄은.
“참 재미있지 않소. 녀석이 지난 20년 동안 나를 쭉 찾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묵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오.”
은퇴를 계획 중이었다.
부하 직원들에게도 어느 정도 언질을 준 상태이며, 방주에 탑승할 그날까지 안식년을 가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알파치노의 존재로 그러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리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과거의 업보를 등에 업고 이쪽을 향해 굴러 오는 기분.
청장은 손바닥을 쥐었다 피었다.
준비를 해야 될 터였다.
자신을 눌러 죽이기 위해 굴러 오는 바퀴를 깨부술 준비를.
청장은 그 뒤 한참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묘지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입구 쪽에 나타난 한 인물을 발견했다.
제르비아였다.
새로운 치안국장이자, 자신의 딸.
아니, 엄밀히 말해 자신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
셀리나가 죽고 그녀의 일기장을 보고 알게 되었다.
자비르와 제르비아가 자신의 자식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파치노.
녀석은 이쪽의 진짜 신분이 경찰청장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청장이 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녀석은 제르비아가 자신의 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제르비아와 청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청장을 향해 다가갔다.
‘카인의 말이 맞았어. 이곳에 계실 거라고 하더니.’
제르비아는 청장 앞에 섰다.
“…….”
“…….”
청장이 어머니의 묘비 앞에 있는 풍경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청장은 평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과 오빠에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들려오는 얘기로, 어머니가 과거 생전 몹시 홀대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 사람은.
제르비아는 잠시 망설였다.
경찰청 밖에서 청장을 마주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고, 또한 어머니의 묘비 앞이었다.
순간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맞을지.
혹은 평소대로 청장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지.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자비르 치안국장.”
치안국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가 결정을 내려준 셈이었다.
그녀는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용무가 있던 건 맞지만,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청장님.”
그녀의 시선이 청장 등 뒤 셀리나의 묘비를 힐끔거렸다.
조심스러운 눈짓이었지만 청장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궁금한 것이다.
평소 아내에 대한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던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그것을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용무라. 무슨 일이지.”
“벽 바깥에 파견을 나간 특무대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제르비아는 파일과 함께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벽 바깥의 마약상 하나를 추적 중이며, 생각보다 큰 규모의 조직이 얽혀 있다는 것.
“치안국 내에 처리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현장 인원만으론 일을 처리하기 곤란하단 말인가?”
“예. 제가 직접 현장에 나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치안국 정비는 부관들에게 업무를 분배해 시일 내에 끝내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청장은 파일을 다시 한번 살폈다.
확실히 현장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었다.
“…….”
청장은 시선을 위로 들어 제르비아를 보았다.
젊을 때의 셀리나가 보였다.
머리 뒤쪽이 빳빳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셀리나를 사랑했는가.’
그 질문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는가.’
셀리나의 분신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당연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생각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게 만들었다.
‘친자가 아닐 수도 있다.’
혈액 검사를 하면 금방 판별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두려움이 진실을 밝히는 것을 가로막았다.
알파치노를 만나기 꺼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두려움은 관성이 되어 상황을 고착시켰고, 시간은 어쩌지 못하고 흘러갔다.
그 사이 셀리나와 자식들에 대한 감정은 사랑과 증오를 오가며 끓었다 식기를 반복했다.
정신은 황폐해졌다.
지금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현장 지원을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14번 구역입니다.”
114번 구역.
경찰청장과 블루서펜트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곳은 30번대 구역이기에, 이 아이가 소문을 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다.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 있기에 다쳐서 돌아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가를 내리기 꺼려지는 까닭은.
‘알파치노. 내가 녀석을 의식하고 있는 것인가.’
청장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부정하며 나직이 말했다.
“지원을 나가도 좋네.”
“감사합니다.”
제르비아가 돌아가지 않고 자리에 서 있자 청장이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아, 저도 그분을…뵙고 가려고 합니다.”
제르비아의 시선은 셀리나의 묘비에 향해있었다.
청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르비아를 지나쳐 묘지 입구로 멀어져 갔다.
“청장님.”
그때 한참 망설이던 제르비아가 몸을 돌려 청장을 불러세웠다.
청장의 걸음이 멈추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이곳에는 자주 오십니까?”
“…….”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하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이른 새벽이나 깊은 밤에 방문하긴 하지만.
오늘 이 시각에 방문한 것은 감정의 동요 탓으로, 조금 예외적인 경우였다.
“…….”
“…….”
한참 제르비아의 시선을 마주하던 청장은 아무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묘지를 떠났다.
제르비아는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묘비에 준비했던 꽃을 놓았다.
12월 15일.
셀리나의 기일이었다.
묘비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 뒤 제르비아 역시 묘지를 떠났다.
아무도 남지 않은 묘지에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었다.
그리고 제르비아가 수도를 떠난 당일로부터 정확히 5일 뒤.
제르비아를 인질로 붙잡아 감금하고 있다는 서신이 청장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