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레이몬드 (2)
치안국 지하.
기록보관소 안쪽.
제르비아는 열쇠를 돌렸다.
두꺼운 철문을 힘껏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드드─
최근 출입이 없었는지 손잡이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다수의 높은 선반에는 파일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후우―.”
그녀는 짧게 심호흡 후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선반 사이 통로를 돌며 파일 위에 붙은 기록지를 꼼꼼히 살펴나갔다.
그녀가 찾는 자료는 단 하나였다.
31번 구역에서 일어난 폭발 테러에 관한 자료였다.
평소 의문이었다.
다른 폭발 테러와 달리 왜 31번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만 극비로 분류되어 있는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31번 구역 폭발 테러.
구역 바깥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무너져 많은 금전 손실과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고 유야무야되었다.
절대 그렇게 묻힐 규모의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입김에 작용했던 게 분명해.’
당시 그녀는 기사 학교 생도였다.
사건을 파헤치려 했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존재하지 않아 벽에 가로막힌 느낌을 받았다.
막 경찰에 임용되어 기록보관소에 출입했으나, 자료 열람에 제한이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치안국장의 권한으로 모든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통로를 지나는 걸음과 파일을 훑는 손가락이 분주해졌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췄다.
「사건번호 3812」
「1067년 9월 13일」
「31번 구역」
「분류-폭발물 테러」
그녀의 손가락이 파일을 꺼내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역시 사건 개요가 달라.’
당시 언론에는 폭발 테러가 단순 사회 부적응자의 소행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파일은 폭발 테러의 원인을 범죄 조직 간 무력 충돌로 기록하고 있었다.
음지의 양대조직.
블루서펜트와 레드스컬 간의 분쟁으로 말이다.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가슴이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
사건의 분석과 기록은 경찰청 내 독립기관인 서기부에서 담당했다.
어떤 외부 세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기에, 최소한의 사건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기록을 읽어나갔다.
「…교각 하부, 1, 2, 3, 4번 기둥 각각에 시한식 폭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중 1번을 제외한 모든 기둥이 폭파되었음.」
이건 당시 그녀의 기억과 일치했다.
기둥을 휘감아 오르던 나선 계단.
중간마다 위치해 있던 널찍한 공간.
카인은 그곳에서 쓰러진 오빠와 자신을 응시하다 피 묻은 검을 떨어트리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둥 방향에서 들려온 폭발음을, 그녀는 생생히 기억했다.
「사용된 폭탄의 모델은 WB-004이며, 블루서펜트 측에서 레드스컬의 현금수송 차량을 탈취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한 증거는 ….」
이 부분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첨부된 다수의 증거가 분석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뒤쪽 페이지엔 폭발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 명단이 있었다.
족히 백여 명은 될 법한 명단 길이를 보며 제르비아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자기들 전쟁에 민간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겠지.’
역겹고도 추악한 사고방식.
자신은 평생을 가도 범죄자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폭탄을 설치한 게 블루서펜트 측이라고.’
머릿속에 곧장 떠오른 한 인물이, 범죄자에 대한 그녀의 증오심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카인.
그를 만났던 곳은 1번 기둥이었다.
그는 당시 블루서펜트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렇다면 1번 기둥에 폭탄을 설치한 사람이 그라는 이야기일까.
“…….”
그건 아닐 거라 생각되었다.
1번 기둥에서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체 완료된 폭탄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또한 최근 알게 된 사실로, 카인은 민간인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즉, 모순이었다.
카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침묵하던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추론이 번쩍 떠올랐다.
눈동자가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저도 모르게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폭탄을 해체하기 위해서…?”
1번 기둥의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카인은 폭탄이 설치된 위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폭탄 해체 능력이 있음을 일전에 증명한 적도 있다.
만약 카인이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조직 몰래 폭탄을 해체한 것이라면.
나름 신빙성 있는 추론이었다.
주어진 각 정보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일단 부정했다.
자신이 떠올리지 못한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은가.
“…….”
하지만 추론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추론을 믿고 싶은 마음.
추론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
양가적인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녀석은 다른 범죄자들과는 달라. 하지만 범죄자란 사실 자체는 합리화할 수 없어.’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파일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사락.
「현장 물품 및 증거 일람」
당시 현장에 있던 물품이나 혈흔 따위의 분석 자료가 나타났다.
그녀의 시선이 한 사진에서 멈췄다.
「증거품 8호」
「콜드스틸제 62cm 도검」
그 아래 쓰인 분석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검 끝에 혈흔이 묻어 있음. 감식 결과, 현장에 쓰러져 있던 자비르 칼타의 것과는 불일치.」
‘뭐?’
망치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줄곧 카인이 오빠를 죽였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에 묻은 피가 오빠의 것이 아니었다면.
「검에 묻은 혈흔은 계단 상부 WB-004 주위에 떨어져 있던 것과 일치.」
「WB-004 주위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 과정에 빙결 마법과 검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분석이 이어졌다.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며, 첨부된 계단 상부의 현장 사진 여럿을 집요하게 살폈다.
눈이 침침할 정도로 집중하던 때.
그녀는 사진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실? 아니야, 이건….’
길고 가느다란 빛나는 무언가.
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건 머리카락과 가장 비슷하게 보였다.
그것도 은빛.
혹시나 싶어 증거품 목록을 살폈지만 머리카락은 실려 있지 않았다.
“…….”
머리카락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감식반 인원이 현장에서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보다는.
하지만 왜인지 반짝이는 그것이 머리카락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만약 카인과 전투를 벌였던 이의 머리카락이라면.
은빛은 그리 흔한 색이 아니다.
길이로 보아 남성보다는 여성의 것일 확률이 높다.
문득 한 인물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이나…?”
청장의 집무실을 방문할 때마다 앞쪽 공간에서 사무를 보고 있던 은발의 비서관.
‘사무관이 테러 현장에 나타나 카인과 전투를 벌였다고?’
말이 안 되었다.
앞의 전제는 어떻게든 납득한다 쳐도, 그녀가 마법사란 얘기는 경찰 재직 5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파일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은 뒤 기록실을 빠져나왔다.
***
위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가로로 길게 뻗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문.
경찰청장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르비아는 익숙한 몸짓으로 문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넓은 방이었다.
양옆 벽면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가 가득 걸려 있었고, 정면 벽에는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이 나 있었다.
한쪽 책상에는 안경을 쓴 은발 여성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제르비아를 향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청장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신 상태인데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늘 방문을 드리던 시간이라….”
제르비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이 비서관의 은빛 머리카락을 향했다.
청장의 비서관.
레이나 미셸.
어제 기록보관소에서 느꼈던 의구심이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속에 연기를 피웠다.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기에, 제르비아는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작게 꾸벅였다.
“청장님은 언제 돌아오신다고 했습니까?”
시계를 흘긋 보자 오후 2시였다.
“확답을 못 드릴 것 같아요. 한 시간 전쯤에 나가셨는데, 평소와 달리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셔서요. 돌아오시면 치안국장님이 다녀가셨다고 말씀드릴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이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업무에 집중했다.
제르비아는 돌아가는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테러. 빙결 마법. 은발. 혈흔.
31번 구역. 다리. 블루서펜트.
연결 고리로 묶인 여러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났다.
제르비아가 레이나에게 떠보는 질문을 던질지 고민하던 때였다.
쨍강!
레이나가 진열장에서 파일을 꺼내다 꼭대기에 있는 유리 패를 떨어트렸다.
“괜찮으십니까?”
제르비아가 화들짝 놀라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손등을 조금 베인 것 빼곤. 그보다 청장님 상패가 깨져서 어쩌면 좋아.”
유리패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힌 듯 레이나의 손등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처보다는 깨진 상패와 파편으로 가득한 바닥이 더 걱정인 듯 보였다.
“정리는 제가 할 테니 응급 처치를 하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릴게요.”
레이나는 구급상자를 찾기 위해 다른 쪽 진열장으로 향했다.
제르비아는 근처에 비치되어 있던 청소 도구를 가져와 바닥을 쓸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을 보고 동작을 멈칫했다.
“…….”
감식반에 맡기면 혈액의 고유 패턴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테러 현장에 남아 있던 혈흔과 대조해본다면.
고개를 돌려 레이나를 보았다.
그녀는 상처를 소독하고 있어 이쪽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제르비아는 지퍼백을 꺼내 피 묻은 유리조각 하나를 그곳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
제르비아는 청장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1층으로 향했다.
띵─
문이 열렸을 때.
앞에 나타난 인물을 보고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카인?”
“오랜만이군.”
흠 잡을 데 없는 외모.
주인의 성격을 드러내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수트.
제르비아가 약간의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경찰청에 네가 직접 올 일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청장님을 뵈러 왔나?”
“아니, 너를 만나러 왔다. 청장실로 갔다고 치안국 직원들이 알려주더군. 자리를 옮겨 이야기하지.”
카인이 엘리베이터 내부의 CCTV를 흘긋 보며 말했다.
제르비아는 카인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 섬멸 대상을 고지하려는 것이겠지.’
최근 만나 나눴던 대화는 모두 벽 바깥 범죄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이번에도 분명 그러할 터였다.
카인과 제르비아는 본청 밖으로 나가 치안국으로 향했다.
“치안국장님이잖아? 옆에 계신 분은….”
“요한님이시잖아. 전번에 표창을 받았던 그분.”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두 분 다 선남선녀시잖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을 지나는 이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수도에서 가장 화제인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있으니 시선을 끄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함께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로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는 시선도 꽤 많아진 상태였다.
물론 지금 제르비아의 귀에는 말소리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테러에 관해 카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가.
그녀의 머리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
극악무도한 범죄자.
혈육을 죽인 원수.
카인에 대한 증오심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근 그가 일반적인 범죄자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첫 번째 이유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오빠를 죽인 인물이 녀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때는 두 번째 이유마저 흔들릴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의의가 희박해진 증오는 어떻게 될까.
갈 곳을 잃고 소멸해버리지 않을까.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그녀는 그러한 미래가 두려웠다.
경찰이 되어 수년간 멈추지 않고 달려올 수 있던 원동력은 카인에 대한 증오였다.
증오가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린다.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진다.
때문에 그녀는 카인에게 곧장 묻지 못하고 있었다.
자비르를 죽인 것이 정말로 너인 것이냐고.
“이번에 잡아야 할 조직은 규모가 크다.”
카인의 목소리가 제르비아의 정신을 상념 속에서 건져 올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카인과 함께 치안국장 집무실에 도착한 상태였다.
“조직이라. 이번엔 어느 곳이지?”
제르비아는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이어진 카인의 말을 듣고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서펜트.”
카인이 다시 한번 입술을 열어 남은 단어를 뱉어냈다.
“그리고 레드스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