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레이몬드 (1)
“그 얘기, 저도 관심이 가는군요.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청장의 등장에 테이블에 있던 두 남자는 당황했다.
후드를 쓴 남자에게 돈을 대가로 지시를 받긴 했지만, 이런 상황까진 그 내용에 없었던 것이다.
서로 눈치만 볼 때 청장이 다시 한번 말했다.
“물론 이야기를 그냥 들려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면 커피값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지폐 몇 장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10만 실링.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대가로 받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
「카페에서 정해진 주제로 이야기를 하라는 지시만 받았지 별다른 제한 사항은 없었으니까.」
빠르게 눈치를 주고받은 남자 둘은 지폐를 챙기고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흠. 꽤 경우가 있으신 분이군요. 앉으시죠. 어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신 겁니까?”
청장과 카인이 자리에 합석했다.
청장이 말했다.
“현재 경찰청장이 사실 블루서펜트의 보스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도 소문에는 꽤 밝은 편인데 그런 소문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아, 그것 말입니까. 저희도 전해 들은 것뿐이긴 한데….”
두 남자는 테이블에 몸을 붙이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쓸만한 정보가 나올 때마다 청장은 고액권의 지폐를 테이블에 올렸다.
“그래서 경찰청장이 이중 신분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남자의 시선은 쌓여가는 지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부 정보를 손에 쥐고 있으니 경찰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해 피할 수 있었던 거겠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상대가 변심해 돈을 도로 집어넣을까, 열과 성을 다해 정보를 토해냈다.
쌓인 지폐가 일정 액수를 넘어섰을 때, 후드 남자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말끔히 잊혀 버렸다.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
하지만 청장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블루서펜트에 관한 최근 소문은 없습니까? 혹시 제가 접하지 못했던 것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아, 예! 몇 가지 들은 것이 있긴 합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원래 33번 구역이 블루서펜트가 점령하고 있던 구역 아니겠습니까? 헌데 요즘 거리에서 블루서펜트 조직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33번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구역도 비슷한 상황인 모양입니다. 그 자리에 레드스컬 조직원들이 대신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요.”
레드스컬.
청장은 카페에 들어오기 전 거리에서 느꼈던 수상한 기류를 떠올렸다.
마치 순찰을 하듯 주변을 경계하며 돌아다니던 일단의 무리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구정물이 사라진 곳에 또 다른 구정물이 흘러드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그래서 도는 소문이….”
남자들이 한 호흡을 쉬었다 말했다.
“블루서펜트가 레드스컬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설이 돌고 있죠.”
“경찰청장이 덜미를 잡혀 일시에 세력을 물린 거란 이야기도 있고요.”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블루서펜트는 두 번 다시 운용할 조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덜미를 잡혔다는 소문은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경찰청장과 블루서펜트.
소문으로 완성되어 퍼지기엔 너무 구체적인 내용이다.
마치 전말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청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자리에서 특정 주제로 이야기를 하라고?”
두 남자의 몸이 순간 움찔 떨렸다.
허나 청장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청장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카인이었다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 네가 꾸민 흉계가 아닌지.
“…….”
카인은 청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서 어떤 신호도 주어서는 안 되었다.
입술의 떨림.
동공의 수축과 확대.
평소와 다른 어조의 변화.
긴장감에 기인한 사소한 손동작.
어떤 징후라도 보이는 순간 청장이 세운 의심의 단초는 깊어질 테니까.
카인은 온몸에 힘을 바짝 불어넣은 뒤,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의뢰자가 있다면, 현재 이 시간에 카페 안에 있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엿듣게 되기를 원했다는 거겠죠.”
카인이 덧붙였다.
“자신의 특정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
카인의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꾸며 이득 볼 것이 없다.」
청장은 동의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시한부 동맹 관계이긴 하나, 아직까진 상대가 자신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녀석은 철저히 이득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수도에서의 편의.
벽 바깥에서의 사업 대행.
서로 적절한 이득을 주고받고 있으며, 공생 관계는 앞으로 계속 발전해갈 가능성이 컸다.
폐하께서는 녀석에게 신세계 프로젝트에 관한 암시를 주었다고 하셨다.
프로젝트의 전말을 파악하지는 못했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권력자들과 한배를 타게 될 것이며, 앞으로 중책을 맡게 되리라는 사실.
직감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자신의 이익에 눈이 밝은 영악한 녀석이니까.
‘카인이 꾸민 짓일 가능성은 낮다. 완전히 의심의 끈을 놓을 수는 없지만.’
청장의 시선은 다시 두 남자에게 향했다.
“어떻습니까? 의뢰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 그게.”
당황감을 드러낸 데에서 이미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억나는 뭐든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인상착의나 목소리, 체형 같은 것이 있겠지요.”
두 남자는 우물쭈물했다.
청장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림으로서 그들의 갈등을 해소해주었다.
쿵.
지폐 뭉치였다.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돈이었다.
***
두 남자는 지폐 다발을 품에 챙겨 누가 볼세라 거리 저편으로 허겁지겁 멀어져갔다.
“짚이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청장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번개같이 무전기를 꺼내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구역 출입로 전체를 봉쇄해라. 쥐새끼 한 마리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무리에서 벗어나려는 차량이 있다면 즉시 보고해라.”
뚝.
지시는 그걸로 끝이었다.
구역 경찰서장에게 직통으로 날린 무전이었다.
탁.
청장이 걸음을 떼었다.
카인이 청장의 뒤를 따랐다.
앞쪽에는 레드스컬의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걷고 있었다.
카인이 속삭였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면 곁에 있겠습니다.”
“확인해볼 것이 생겼네. 지시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청장의 얼굴엔 보기 드물게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당황스러움보다는 분노와 불편함에 가까웠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흉터였습니다. 이마부터 입술 밑까지 길게요.」
「목소리는 허스키한 편이었습니다. 긴 흉터 말고도 얼굴에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고요.」
「아, 그리고 소매 안쪽에 붉은 해골 문신이 보였습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억 속의 한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기억 깊은 곳에 박혀, 제르비아를 볼 때마다 함께 떠올라 감정을 쿡쿡 찔러대는 인물 말이다.
레드스컬 보스에 대한 청장의 의심은 전부터 존재했다.
레드스컬의 보스.
과거의 연적 알파치노.
두 인물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더 깊은 조사를 하지 않고 외면해왔다.
하지만 지금.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현실 한편에 끈질기게 따라 붙어온 과거의 망령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알파치노. 네 녀석인가.’
이쪽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벽 바깥에선 이제껏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 왔는데.
스스로 알아냈는가.
혹은 누군가에게 정보를 받았는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사람을 배치해 이야기를 흘린 이유는 또 무엇인가.
협박? 선전포고?
어떤 계략을 꾸미기 위함?
이 정도로 빠르게 머리가 회전하는 것은 정말 십수 년 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급하게 행동하는 것보단 일단 조사를 한 후 접근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상대는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네. 내 움직임을 지켜본 후에 이야기꾼을 배치해두었을 테니까.”
때문에 청장은 평소 완벽하던 자신의 냉철함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레드스컬 무리를 쫓는 청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미행 중 날카로운 시선으로 거리를 훑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파치노. 어디에 있는가.
네 존재를 용인해주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감히 개수작을 부리는가.
셀리나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를 닮은 제르비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던 중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알파치노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었다.
레드스컬 무리가 사라진 어느 건물 앞이었다.
높이 이어진 계단을 본 순간 뜨거웠던 청장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제야 상황을 어느 정도 차분히 돌아볼 수 있었다.
‘흥분했군.’
나이가 든 탓일까.
순간이지만 감정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언짢았다.
하지만 어쨌든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의 의도를 읽을 수 없을 때.
돌발 행동을 취해 상대의 동요를 일으키고 반응을 보는 것.
수십 년 전장을 돌며 체득한 전략이었다.
‘지켜보지.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배길 수 있을지.’
청장은 근처 화단에 있던 적당한 가지를 부러트려 손에 쥐었다.
부웅─
가지를 몇 번 허공에 휘둘러 보는 청장을 보며 카인이 말했다.
“무기가 필요하신 거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괜찮네. 파리를 잡는 데는 이 정도로 충분하네.”
그가 제대로 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건, 추후 도착한 구역 경찰들이 살인 현장을 조사할 때 쓸데없이 특정될 단서를 남기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가지. 도움을 좀 받겠네.”
“…….”
레드스컬의 아지트를 급습하는 데 동참하라는 얘기였다.
레드스컬 조직원을 죽일 수 있는지 보겠다는 의도.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했나 보군.’
아마 이쪽과 알파치노가 손을 잡고 흉계를 꾸몄을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있지 않을까.
카인은 주위에 CCTV가 없음을 확인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상관없었다.
청장이 무엇을 의심하든.
***
치안국장의 집무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눈에 띄었다.
부스럭.
서류 위로 푸른 머리의 윗부분이 빼꼼히 드러나 있었다.
제르비아였다.
초췌한 얼굴을 한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서류를 읽고 사인을 해나가고 있었다.
“…….”
읽고. 사인을 마치고. 옆으로 넘기고.
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괴담을 들었을 때와 같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
서류 더미의 높이와 개수가 몇 시간 전과 거의 그대로였다.
뭐지. 왜 안 줄어들지.
눈을 감았다 떠보기도 하고 가늘게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서류 더미는 줄어드는 법 없이 그 자리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하아.”
그녀는 의자를 뒤로 쭉 빼고 지친 몸동작으로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아무리 인수인계 기간이라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차라리 몸이 고될지라도 현장을 누비는 게 자신의 성격에 맞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
그녀는 다시 한번 서류 더미를 노려보았다.
현장의 범죄자들은 눈만 마주쳐도 도망가기 바빴지만, 당연히도 서류 더미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을 때.
문득 카인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뭘 그렇게 보고 있지? 자리에 앉지.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녀석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서류를 해치우고 있었다.
그것도 이쪽과 복잡한 내용의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비법이 뭘까.
어떤 속독법이나 기억법 같은 게 따로 있는 걸까.
다음에 만나면 한 번 방법을 떠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짐짓 목소리를 깔고 허공에 말을 이었다.
“기다릴 필요 없네. 방금 모두 읽고 사인을 마쳤으니까. 가져가게.”
카인의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었다.
허공에 파일철을 내민 상태로, 표정은 더없이 근엄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렸다.
새로운 서류를 들고 온 제르비아의 부관 헤롤드였다.
“…뭐하십니까?”
“노크를…하고 들어와야 하지 않습니까.”
“했습니다. 응답이 없어 그냥 들어왔습니다.”
“들었습니까?”
“예. 누구를 흉내 내신 겁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말투….”
제르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헤롤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류를 받아 훑었다.
“13번 구역의 도로 폐쇄 관련 건이군요. 교통국에 연락을 취해 협조를 먼저 구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돌리시는 겁니까?”
정말로 궁금하였기 때문에, 헤롤드는 제르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
“…….”
제르비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헤롤드가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참, 전 치안국장님이 이것을 전달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범죄기록보관소의 내부 구역까지 출입할 수 있는 열쇠였다.
기밀과 극비로 분류된 범죄 기록까지 열람할 수 있었다.
열쇠를 본 순간 제르비아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쳤다.
5년 전, 31번 구역.
다리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오빠와 그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던 카인.
두근.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