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알파치노 (3)
알파치노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 사진 속의 인물이 셀리나가 아님을 깨닫고 말했다.
“…딸인가? 레이몬드와 셀리나 사이의?”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문장은 간단했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설마.”
카인의 말뜻을 이해한 알파치노의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름은 제르비아 칼타입니다. 나이는 24세. 제국력 1048년생. 셀레나가 알파치노님을 떠난 연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기억의 편린들이 알파치노의 뇌리를 스쳤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후회스런 과거의 기억들.
‘설마 셀리나가 그때 그런 행동을 보였던 이유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짚이는 구석들이 있었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젊은 시절 셀리나와 자신의 얼굴이 사진 속 여성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당신은 첫째는 딸이 좋겠다고 했죠.」
「알리아나? 예쁜 이름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여성이 자신의 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음을.
“이 주제는 여기서 넘어가도록 하지. 레이몬드의 이야기를 듣겠다.”
알파치노는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혼란스런 속마음을 감추었다.
“짚이는 부분이 없으신 겁니까?”
“그만해라.”
이제와 딸이라니.
“눈매가 알파치노 님의 것을 닮았군요.”
“그만하라고 했다.”
자식이라고. 피가 이어진.
“셀리나가 떠난 날짜와 제르비아의 생일을 계산해보면 더 정확한 추론이….”
“그만─!”
쨍!
알파치노가 술병을 내리쳤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 했다.
카인의 뺨에 옅은 상처가 생겨났다.
슬며시 피를 닦으며, 카인이 말했다.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평생 모르고 살아온 혈육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뭐 어쩌라는 건가? 이 아이가 내 딸이면? 가서 만나보기라도 하란 얘기인가? 20년도 더 지난 이제야 와서?”
“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으로 향했다.
새 술을 잔을 꺼내와 알파치노 앞에 내려놓았다.
“적절한 예법을 익히실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잠시라곤 하나, 벽 안쪽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술을 병째로 마시는 순간 주위 시선을 끌 겁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벽 안쪽?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레이몬드는 블루서펜트의 모든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벽 안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복수를 위해 긴 세월 버텨오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카인이 잔에 술을 따라 알파치노 쪽으로 밀었다.
“복수를 마쳐도 연인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분신과 같은 존재가 남아 있습니다.”
“…….”
“제르비아. 당신의 딸 말입니다. 본디 지금 벽 안쪽이 아닌 당신 곁에 있어야 할.”
알파치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임에 분명한데.
분명 그러할 터인데.
왜 자신은 귀를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알파치노가 사진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한 가지만 더 묻지. 이 아이는 경찰이 된 건가?”
사진 속 제르비아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특무대 0번대의 대장을 맡고 있고, 최근엔 치안국장으로 특진했습니다.”
“…훌륭하게 자랐군. 아비가 어느 쪽인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둘 다 범죄조직의 수장 따위나 하고 있는 작자들인데.”
알파치노의 손가락이 제르비아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것을 넘어 자신의 딸이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셀리나.’
이별 이후 다른 이를 만나지 않고 평생 홀로 지내왔다.
헌데 자신도 몰랐던 딸이 존재한다.
한 줄기 전류가 등골을 타고 흐르는 기분.
셀리나가 세상에 남긴 연결고리.
자신의 피가 이어진 개체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만나보고 싶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제르비아가 경찰이 된 것은 레이몬드의 영향이 큽니다.”
알파치노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레이몬드라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사나운 목소리가 되었다.
“상류층이라고 했지. 귀족 작위라도 있었나 보군.”
“예. 백작 작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경찰입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경찰과 범죄조직의 수장 사이에는 너무도 큰 괴리감이 있었으므로.
“머리가 조금 어질해지려는군. 이 아이가 치안국장이면, 레이몬드는 청장쯤 되나?”
“예. 맞습니다.”
알파치노는 순간 마시던 술을 뱉을 뻔했다.
“뭐라고 했나?”
“레이몬드는 경찰청장입니다. 어렵게 알아낸 정보입니다.”
“…….”
알파치노는 카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인은 서류철 둘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제르비아를 통해 입수한 경찰청 내 출근 일지입니다. 이쪽은 제가 블루서펜트 간부로 활동할 당시 보스와 가졌던 회합 날짜입니다.”
카인이 구체적인 날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장이 자리를 비운 날과 보스가 회합 때 모습을 드러냈던 날이 일치하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또한 이쪽은 목소리의 성문 분석표입니다. 동일인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평생 놀랄 일을 한 번에 몰아 겪는 것 같군.”
알파치노는 자료를 들어 찬찬히 살폈다.
날짜 대조표와 성문 분석표 외에도 카인이 세밀하게 분석한 여러 자료가 있었다.
그것들을 읽으며, 알파치노는 이제껏 블루서펜트 보스를 추적하며 가졌던 의문들이 조금씩 풀려감을 느꼈다.
“상황은 모두 이해했다. 네가 복수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하는 것도. 레이몬드가 경찰청장이며, 제르비아라는 아이가 내 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파치노가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제안을 수락하겠다. 하지만 내가 벽 안쪽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지. 그건 불가능하다. 위험성이 너무 크다. 혼자 몸이라면 상관없지만, 지금 내게는 관리해야 할 조직이 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치노가 단번에 벽 안쪽으로 들어가겠다는 대답을 했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터였다.
순전히 감정에만 근거하여 선택을 내리는 이와는 큰 계획을 함께할 수 없는 법이니까.
“좋습니다. 방법이야 많습니다. 가령 레이몬드를 벽 바깥으로 유인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생각해둔 것이 있나 보군.”
“예. 대신 레드스컬의 조직원들을 조금 빌려야겠습니다.”
카인은 천천히 자신의 계획에 대해 입을 열었다.
***
다음 날 오전.
카인과 에스텔이 탄 차량은 77번 구역을 떠나 황야를 달렸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 멀어져 가는 도시의 모습이 백미러에 비쳐 보였다.
“33번 구역으로 곧장 가면 된다고 했죠.”
“그래. 레드스컬의 조직원들은 어제 출발했으니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거다.”
33번 구역.
라이카의 관할이었던 구역으로, 그곳에서 청장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라이카와 바마의 외부 사업체는 모두 정리할 생각일세.」
외부 사업체는 구역 내에 위치한 유흥 시설이나 상점 따위를 뜻했다.
적지 않은 수입이 나고 있음에도 정리하려는 이유는 분명했다.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것이겠지. 신세계 프로젝트의 실행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범죄조직의 보스라는 이중 신분.
적은 숫자이지만 현 세계의 인원이 그대로 다음 세계로 넘어가니, 알려져서 좋을 건 없는 사실이었다.
「과연. 네 계획대로라면 레이몬드를 벽 바깥의 지정된 장소로 끌어낼 수 있겠군.」
알파치노는 제안을 수락했다.
이쪽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곧바로 발을 빼겠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청장을 만나 그를 속이는 일이었다.
‘쉽지는 않겠지.’
젊었을 적의 비교적 순진했던 레이몬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벽 안과 밖.
양지와 음지.
양측을 오가며 남들보다 배 이상 삶의 경험을 축적해온 늙은 여우 같은 사내가 존재할 뿐이다.
긴장감을 가지고 임해야 했다.
계획에 조금만 빈틈이 생기는 순간 그는 의심을 시작할 테니까.
***
33번 구역.
도심에 위치한 최고급 식당.
최상층에 위치한 별실에서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사업체들은 아까 직접 둘러보시고 정하신 금액대로 경매에 넘겨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바마 건과 관련해 나오는 수익은 이제부터 이 계좌로 받겠네.”
청장은 계좌 번호가 적힌 종이를 카인에게 보여주었다.
“알겠습니다.”
카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라이터로 불을 붙여 태워버렸다.
“사업체를 정리한 금액도 같은 곳으로 입금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추후에 입금할 곳을 다시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벽 안쪽이 아닌 바깥인 만큼, 청장의 행동 하나하나에선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얼굴에는 인공 가죽을 쓰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약간의 변조를 가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식당 역시 본인이 직접 예약을 했지.’
입구에는 금속과 전자기기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업가들에게 밀담 장소를 제공하는 것을 주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47번 구역은 간만에 방문한 것 아닌가. 운영은 잘 되고 있나?”
“예. 좋은 관리자들을 만난 덕에 한동안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더군요.”
좋은 관리자.
청장의 입장에서는 카인이 그랬다.
벽 바깥 일을 맡아 처리해주기에, 자신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경찰청 내에서 제르비아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바쁜 편이네. 특무대를 개편하고 업무를 인수인계 받는 중이지. 당분간 바마를 추적하는데 쏟을 시간은 없을 걸세.”
제르비아에 대한 언급은 그걸로 끝이었다.
카인은 식사를 하며 청장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완전한 무표정.
자기 딸에 대한 무관심.
허나 카인은 청장이 제르비아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사를 다 했으면 일어나지.”
“예. 그렇게 하시죠.”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끼익─
문이 열리고 번화가가 나타났다.
“시간이 급한 게 아니라면 커피 한잔하지.”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식후에 커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 청장의 루틴.
다만 취향이 까다롭기에 아무 커피나 마시지 않았다.
“프랑소와로 가지. 그곳이 이 근처에서 가장 괜찮더군.”
여기까지도 예상대로.
몇 블록을 지나 카페 안에 들어갔다.
주문을 마치고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뒤쪽 테이블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얼마 전에 외곽 쪽에서 여신상이 쓰러졌었잖아. 경찰과 교단 측에서 다녀가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랬지. 경찰청장과 교황이 직접 조사를 나왔었고.”
경찰과 여신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러 주제를 아울렀다.
범죄조직 블루서펜트 역시 언급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도 있더라고. 지금 경찰청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사실 블루서펜트의 보스라고.”
청장의 입가가 씰룩였다.
카인이 속삭였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소문이야 원래 넘겨짚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법입니다.”
옆 테이블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말도 안 돼. 그냥 도시 전설이나 음모론 같은 거겠지.”
“처음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이게 썰을 들어볼수록 설득력이 있더라니까?”
카인이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청장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이 구역에 블루서펜트 조직원들이 간간이 보였잖아. 그런데 지금은….”
등 뒤 테이블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카인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청장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 미리 심어둔 자들이었다.
과연 반응을 보일 것인가.
30번대 구역은 ‘벽 바깥’이긴 하지만 ‘벽 안쪽’ 주민들의 왕래가 적지 않다.
30번대 구역에서 퍼진 소문은 그대로 벽 안쪽으로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분명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그리고 의심 목록에 나를 포함할 터.’
실제로 청장은 재밌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심증에 불과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물증은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의심의 화살은 오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카인은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죠. 헛소문입니다. 벽 안까지 퍼지진 못하고 금세 사라질 겁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페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수십 번 째깍거렸다.
이윽고.
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편 테이블로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얘기, 저도 관심이 가는군요.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