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로얄 슬롯 (3)
위층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기척은 아마 킹이라는 인물의 것이리라.
“직접이라. 그 전에 내가 제안을 거절하고 카지노에 그쪽 패거리를 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스페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해볼 테면 해보시오. 그런다고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 거요.”
“자신이 있나 보군.”
“실력에 자신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당신이 제안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을 지목한 사람이 킹이오. 몇몇 주 같이 안 지냈지만 사람 보는 눈이 꽤 정확하더군.”
카인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하루 지켜봐 놓고 나라는 사람을 판단했다고.”
“중요한 건 관찰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적합도요. 킹이 그렇게 말했지.”
“직접이라. 그 사람이 판을 기획한 총괄자인가 보군.”
“무리에 늦게 합류한 사람이긴 하오. 자연스럽게 리더 역할을 맡게 되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행동력과 지휘력을 가진 인물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단순한 자금원이었다면 이곳에 직접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레드스컬의 조직원이었던 인물일 수도 있겠지.’
로얄 슬롯이 레드스컬 소유라는 사실은 극비사항까지는 아니나,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 역시 아니다.
레드스컬의 전 조직원.
가능성은 충분했다.
“자금은 얼마나 되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요. 적어도 수억 실링 단위는 된다고 자신할 수 있소.”
막대한 자금과 통솔력.
그리고 미행을 하면서 들키지 않은 실력까지.
‘설마.’
짚이는 인물이 한 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었다.
방금 떠올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누구인지 궁금해지는군. 킹을 직접 만나보지.”
어쩌면 레드스컬의 보스와 더 빠르게 엮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나서 반갑네.”
킹은 길을 지나다 마주치면 곧장 뇌리에서 잊혀질 정도로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특징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카인은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제안은 무척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저에 대한 검증이 끝나셨다니 바로 묻겠습니다. 한 사람에게 떨어질 수익과 작전에 들어갈 수 있는 날짜가 궁금합니다.”
킹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욕망 가득한 친구이군. 눈빛에서 알아보았지. 작전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 앞에 3억 실링씩은 떨어질 걸세. 물론 내 몫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야.”
“그건 상관없습니다. 자금을 대시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작전 날짜도 자네가 얼마나 빨리 계획을 숙지하고 하느냐에 따라 다르네.”
킹은 간략하게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팀원은 자네와 나를 포함해 총 다섯이네. 딜러의 패를 훔쳐볼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넷 모두 포커에 참여하네.”
포커 참가자를 팀원으로만 채워 변수를 줄인다.
카드의 문양과 숫자별로 ‘단어’나 ‘몸짓’을 정해놓아 게임 중 서로의 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물론 우리가 서로 아는 척하지는 않을 걸세. 포커 테이블에서 처음 만난 게임 상대일 뿐이지.”
게임은 계속해서 돈다.
바람잡이들은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판돈을 최대로 키우고, ‘선수’를 위한 판을 만든다.
‘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패를 바꿔치기하여 그 판에서 가장 강한 카드 조합을 만든다.
“그 선수가 저란 말씀이시군요. 바꿔친 후 공개할 카드는 이미 게임에 등장한 카드가 아니어야 할 테고 말입니다.”
“맞네. 덱을 하나만 쓰는데 같은 카드가 중복해서 나오는 건 말이 안 되지.”
“이해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단 한 가지 의문만 해결이 된다면.
“하지만 상황에 맞는 가장 강한 조합을 만들려면 모두의 패를 알아야 합니다.”
팀원의 패는 물론 딜러의 패까지 읽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빼지 않았나.”
“딜러의 패를 뒤에서 보고 정보를 전달한다면 곧장 발각될 겁니다. 카지노의 방비가 그리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요.”
무엇보다 딜러들의 뒤에는 가벽이 존재해 각도상 패를 보기가 힘들었다.
킹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뒤에서 본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네. 우리는 패를 앞에서 훔쳐볼 걸세. 스페이드, 잠깐 그것 좀 주겠나?”
“예.”
스페이드는 품에서 트럼프 덱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로얄 슬롯에서 사용하는 전용 덱일세. 관리가 철저한 물건이라 빼돌리는데 애 좀 먹었지.”
카드는 밀봉되어 있었다.
킹은 비닐을 뜯어 카드 한 장을 뒷면으로 카인에게 건넸다.
“일반 트럼프와 구분할 수 있겠나?”
카인은 유심히 카드를 살폈다.
외관은 일반 트럼프와 다름없었다.
“뭔가 다른 점이 있으니 보여주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차이를 잘 모르겠군요.”
“맞네. 일반인들이 처음 보고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킹은 카드를 펼쳐 뒷면으로 섞었다.
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스페이드에게 물었다.
“이 카드가 뭔지 알겠나?”
“클로버 3입니다.”
카드를 지그시 쳐다보던 스페이드가 거침없이 답했다.
뒤집자 정답이었다.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고, 카인이 말했다.
“표시목이군요.”
“역시 알아보는군.”
“킹에게 한 달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세히 살피자 뒷면 문양이 아주 미세하게 달랐다.
‘내가 이 기술을 습득한다면.’
한 달까진 아니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긴박한 게임 중 카드를 식별하려면 웬만큼 기술을 익혀서는 불가능할 테니까.
“패를 식별하는 인원을 게임에 참여시키지 않고 따로 두는 건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겠군요.”
카인의 말에 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지노 측도 표시목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일세. 그마저도 죽거나 도박판을 떠났지.”
미묘한 답변이었다.
어쨌든 모든 변수를 체크 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겠지만.
“계획은 모두 이해했습니다. 상대로 물색해둔 딜러는 있으십니까?”
킹의 입에서는 곧장 대답이 나왔다.
“필레어스. 로얄 슬롯의 총 관리인으로 하지.”
***
77번 구역에서의 마지막 날.
카인은 군중 사이에 에스텔을 대기시켜놓고 필레어스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미 얼굴을 익혀둔 팀원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
“…….”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지만 잠시뿐이었다.
괜한 의심을 할 수 있기에 지금부터는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제가 마지막 자리를 채워도 되겠습니까.”
딜러인 필레어스를 포함해 한 번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은 다섯.
지금 타이밍을 놓친다면 남은 자리를 엉뚱한 손님이 채워버리고 말 것이다.
이전 게임에 쓰였던 칩과 카드를 정리하고 있던 필레어스가 카인을 보고 빙긋 미소 지었다.
“예. 물론입니다.”
끼익.
카인이 자리에 앉았다.
필레어스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덱 하나를 새로 개봉하여 셔플했다.
차라락─
“제 테이블은 기본 배팅이 다른 테이블의 100배입니다. 혹시 모르고 오신 분이 계시다면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참가자 누구에게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인은 칩홀더 여럿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퉁─!
둔탁한 소리가 테이블 위를 올렸다.
퉁─! 퉁─!
잇따라 다른 참가자들도 홀더를 올리며 소리가 연쇄적으로 퍼져나갔다.
늪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진득한 공기는 철망처럼 주위를 에워싼 경비나 구경꾼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퉁─!
걸리는 칩의 무게.
그만큼 테이블 위에 흐르는 공기도 무거워지기 마련이니까.
카인은 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필레어스의 테이블에는 승부사들이 많이 모이는 편이네. 가볍게 즐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지.」
기본 배팅 100배.
숫자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니었다.
게임 템포가 그만큼 빠르며, 어지간한 자금으론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첫 카드 4장입니다.”
카드가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각 참가자 앞에 번갈아 도착했다.
끄트머리를 살짝 들어 4장 모두를 확인한 참가자들은 1장을 버리는 더미에 놓았다.
“선 플레이어는 확인했습니다. 각 1장씩 추가로 받습니다.”
카드가 다시 미끄러져 들어왔다.
모두 확인을 마치고 앞면으로 공개했다.
앞면 2장. 뒷면 2장.
총 4장이 각자 앞에 깔린 상태.
“기본 배팅은 백만입니다. 추가 배팅을 먼저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필레어스가 카인을 보며 말했다.
하트 A와 클로버 K.
테이블 위에 공개된 것 중 숫자가 가장 높으며, 상위 조합이 여럿 가능한 강력한 패였다.
“200만. 레이즈.”
착─!
카인은 패 앞에 칩을 쌓았다.
동시에 팀원들을 살폈다.
“팁을 드릴 테니 칵테일을 사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스다이스로 부탁드립니다.”
‘팁’에서 검지가 책상을 두드린다.
‘데스다이스’에선 입꼬리 왼쪽이 미세하게 씰룩인다.
클로버 6. 하트 2.
공개된 것과 조합해도 그리 강한 조합은 나오지 않는다.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만. 콜.”
“다이.”
“400만. 레이즈 하겠습니다.”
“400만. 콜.”
카인과 필레어스가 맞붙었다.
카드 몇 장을 더 받고 각자 패를 공개했다.
카인의 투페어.
필레어스의 풀하우스.
“A와 K 투페어면 충분히 강한 패인데 아쉽게 되셨군요.”
“…….”
카인은 말없이 필레어스 쪽으로 칩을 밀었다.
사실 현재 게임의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초반은 분위기를 띄우고 판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며, 판돈은 어느 쪽으로 오가든 결국 마지막엔 회수될 돈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구경꾼 사이에 섞여 있는 스페이드.
그가 필레어스의 패를 읽고 은밀히 보냈던 신호.
「다이아 9와 클로버 10.」
전달이 약간 늦긴 했지만, 예측은 성공했다.
이후 게임은 반복해서 돌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기분.
“250만.”
“레이즈. 500만.”
“콜.”
“다이.”
“다이.”
팀원 모두가 필레어스라는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감이 좋은 인물이니 조심해야 하네.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알아차릴 테니까.」
킹은 필레어스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임은 장기전으로 가야 하네. 그래야 처음의 경계가 어느 정도 풀어질 테니까.」
“다이.”
“300만.”
“콜.”
“콜.”
“900만.”
「반드시 딸 수 있다는 확신을 그의 뇌리에 심어주어야 하네. 백 퍼센트 이기는 게임이며 카지노의 재산을 늘릴 기회라는 확신을 말이야.」
「상대가 미끼를 물었음은 어떻게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필레어스가 먼저 기본 배팅을 올리자고 할 걸세.」
“체크.”
“500만.”
“콜.”
“500만. 따라가겠습니다.”
“다이.”
한 번에 오가는 칩의 양이 많아지고 분위기는 고조되어 갔다.
“이런. 거기서 플러시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군요.”
“칩을 조금 교환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팀원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서로 대화의 물꼬를 튼 척 대사를 주고받으며 카인에게 패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전문 배우들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행동과 대사에 위화감이 없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CCTV에도.
경비들의 시선에도.
그리고 필레어스의 시선에도.
“하핫.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제가 먹게 되었습니다.”
저렇게 너스레를 떨며 게임에 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런. 저는 스트레이트입니다. 좋은 패가 나오셨는데 안타깝게 되었군요.”
필레어스는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신경을 긁는 말을 던졌다.
상대의 페이스를 말려 게임에서 계속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으로 보였다.
어쩌면 겉으론 드러나지 않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그만의 방법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게임은 굉장히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칩을 교환하러 사람을 좀 보냈습니다. 벌써 5천만 째군요.”
“저도 오늘은 잘 안 풀리네요.”
바람잡이 역할을 맡은 팀원들의 대사였다.
필레어스를 게임에 더 깊이 매몰시키기 위해 그들은 일부러 돈을 잃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돈을 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임 양상은 ‘호구들’의 돈을 누가 더 빨리 갈라 먹는가의 구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꽤 잘 풀리시는군요. 좋습니다.”
필레어스는 카인이 바람잡이들에게 돈을 딸 때마다 조급함을 내비쳤다.
마치 자신의 돈이 줄어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의도한 대로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게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뿐더러, 상대가 언제든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는 일이니까.
게임은 돌고, 판돈은 높아져 갔다.
바람잡이가 실수로 테이블 밑에 떨어트린 카드를 주워 올렸을 때.
“잠깐.”
필레어스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기본 배팅을 높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다간 종일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