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로얄 슬롯 (1)
입구는 데스크가 존재하는 넓은 홀로 곧장 연결되어 있었다.
칩과 현금을 교환하는 곳으로 건장한 체격의 경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경비가 엄청 삼엄하네요.”
“안쪽 카지노 공간에도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을 거다.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쉬운 곳이니까.”
창구는 여러 곳이었다.
손님들의 회전이 빨라 딱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얼마나 교환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카인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내 창구 앞에 있는 쟁반에 올렸다.
천만 실링.
중형 차량 2대를 살 수 있는 돈.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에 소진되는 돈의 총량과 비교하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다.
일단은 적당한 돈으로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필 생각이었다.
직원이 현금이 담긴 쟁반을 창구 안으로 끌어당기고, 곧 칩을 쌓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 착─
“천만 실링. 확인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다시 쟁반이 나타났다.
칩은 금액권 별로 나뉘어 전용 홀더에 담겨 있었다.
두 손에 들어오는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지만, 안에 담긴 칩 덕에 홀더의 무게는 묵직했다.
카인은 크로스백 안에 홀더를 대충 집어넣고 카지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텔이 곁을 따랐다.
“여긴 신분이나 재산을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죠.”
“돈이 있다면 누구든 손님으로 받는다는 주의지. 이용객이 많아지면 그 자체로 카지노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그 증거로 카지노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고급 정장부터 후줄근한 평상복까지 옷차림이 다양했다.
두 사람은 바글바글한 인파를 지나 1층 카지노 구역으로 향했다.
잔뜩 상기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에스텔이 물었다.
“가끔 신기할 때가 있어요. 이런 대규모 도박장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잖아요. 경찰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녀의 말대로였다.
77번 구역 전체가 로얄 슬롯이라는 카지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경찰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발견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에스텔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세금인가요?”
“그렇겠지. 이곳에서 징수되는 세금이 다른 구역 십수 곳을 합친 크기일 테니.”
불법의 기준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몸집을 불려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크기에 달한다면, 그때는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곳의 진짜 주인이 레드스컬의 보스라는 사실까진 경찰이 알고 있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정확히 말하면 청장은 알고 있을 것이었다.
레드스컬과 블루서펜트 사이의 적대 관계는 두 보스 사이의 악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카지노에 방문한 목적은 레드스컬의 보스를 만나 제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오랜 원수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않겠느냐는 제안.
‘슬슬 청장을 제거해도 무리가 없을 시기가 되었다.’
필요한 도움은 모두 얻었으니 위험 요소는 제거해두는 것이 옳다.
그의 마나를 흡수해 회로 레벨 4 도달에 박차를 가하고, 공석이 된 청장 자리에 제르비아를 올린다.
계획은 완벽하다.
다만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카인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무력으로 청장을 죽일 수 있는가?’
며칠 전 경찰청에 방문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본청 건물 입구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앞을 지나던 호송 차량에서 범죄자 하나가 문을 부수고 뛰쳐나왔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붙잡히지 않았어!」
2미터는 될법한 신장의 범죄자였다.
단숨에 수갑조차 부수고 청장과 거리를 좁혀 주먹을 날려왔다.
「죽어!」
주먹을 감싸고 있는 섬뜩한 마나.
기세와 속도에서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꽤나 수준급이어서 놀랐다.
적어도 에스텔과 맞붙어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저 주먹에 맞으면 얼굴이 산산조각 나리라.
카인은 청장을 흘끗 보았다.
범죄자가 바로 앞에 달려오고 있음에도 그는 담담했다.
그리고 주먹이 휘둘러진 순간.
쐐액─!
청장의 몸이 움직였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범죄자는 관자놀이에 티스푼이 꽂힌 채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거리고 있었다.
청장은 카인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스푼 좀 빌려주겠나? 아직 가루가 덜 녹아서 말일세.」
카인은 상념을 마치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무력으로 청장을 죽일 수 있는가?’
대답은 ‘죽일 수 없다’이다.
에스텔을 비롯한 모든 전력과 함께 달려들어도 승산은 불분명하다.
더욱이 블루서펜트 활동을 중단한 이후 청장은 벽 안쪽에서만 지내고 있다.
전장으로는 부적합하다.
벽 안쪽은 통제하기 힘든 변수들로 가득하니까.
결국 청장을 벽 바깥으로 끌어내어 더 강한 조력자와 함께 덮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파치노가 이곳 주인이라고 했죠?”
에스텔이 속삭였다.
알파치노.
레드스컬 보스의 이름.
카인이 102번 구역에서 습득한 비자금의 원래 주인이기도 했다.
“그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긴장되네요. 청장 그 사람과 같이 엄청난 실력자라고 했잖아요.”
“당장은 아니다. 직접 만나는 건 아마 3일에서 4일 후가 될 거다.”
주말을 포함해 마탑 강의가 없는 다음 주 월요일과 화요일까지.
카인은 최대 4일간 77번 구역에 체류하며 카지노에 출입할 계획이었다.
항상 사업으로 여러 구역을 떠돌기 때문에 알파치노가 당장 이곳에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고 그가 나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레드스컬 조직원을 찾아내 보스와의 대면을 요청할 생각도 없었다.
‘시간만 낭비될 공산이 큰 비효율적인 방법이지. 자신에 관한 정보가 새는 걸 꺼리는 인물이니.’
더욱이 다른 확실한 방법이 존재하기도 했다.
“도박장에 왔으니 도박을 해야겠지.”
딜러를 이겨 카지노 측 전체의 돈을 빨아들이는 것.
금고 돈이 바닥날 위기에 처한다면 알파치노는 결국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인은 에스텔과 함께 1층 카지노에 입장했다.
***
1층 카지노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슬롯머신을 위시한 오락 시설이 모여 있는 동쪽.
이용객 간 게임이 가능한 서쪽.
딜러와 게임이 가능한 북쪽.
모든 방향 곳곳에는 간이 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티니.”
“피나콜라다. 논알콜로요.”
카인과 에스텔은 그중 한곳에서 칵테일을 주문해 북쪽으로 향했다.
“멈춰! 제발 21번에서 멈추라고!”
“레이즈. 두 배로 받겠소.”
포커. 홀덤. 블랙잭. 슬롯 등.
다양한 종목의 테이블에서 이용객들이 딜러를 상대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해보고 싶은 게임이 있나.”
“어, 나도 참여해도 되는 거예요?”
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건 어때요? 블랙잭?”
“그렇게 하지.”
두 사람은 비어 있는 블랙잭 테이블로 가 앉았다.
테이블은 반원형이었다.
반원 쪽에는 손님 셋이 이미 앉아 있었는데, 서로 일행은 아닌 듯 보였다.
직선 쪽에는 딜러가 카드덱을 들고 셔플을 하며 대기하던 중이었다.
그가 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원이 모였으니 시작해도 되겠군요. 혹시 룰을 모르시는 분이 계십니까?”
에스텔과 손님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게임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참가자가 트럼프 카드 2장씩을 받습니다. 숫자 합이 21이거나 그에 가까울수록 이기는 게임이며 저는 카드 한 장을 뒷면으로….”
딜러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카인은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홀보다도 경비가 삼엄하군.’
곳곳에 CCTV가 돌아가고, 마나 탐지봉을 든 경비들이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녔다.
카지노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은 손님들의 손기술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법.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초자연 현상.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종류에 따라 작정을 하고 카지노를 털어먹으려 시도했던 마법사들이 있을 터였다.
로얄슬롯이 털렸다는 소문이 들려오질 않는 걸 보면, 이제껏 성공한 이는 없는 모양이지만.
“그럼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배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명이 끝난 모양이었다.
카인은 홀더를 꺼내 에스텔에게 칩을 얼마간 떼어 주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그중 절반을 딜러 쪽으로 밀어 배팅했다.
“…첫 게임인데 배팅은 나처럼 조금만 하는 게 낫지 않나.”
“나만 믿으라고요. 내가 운이 좋다는 거 알잖아요?”
에스텔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했고, 그사이 딜러가 카드 분배를 시작했다.
모든 참가자 앞에 2장의 카드가 깔렸다.
딜러 앞에도 2장이 깔렸지만, 그중 하나는 뒷면으로 참가자들이 숫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카드를 더 받으실지 말지 선택하시면 됩니다. 21을 초과하는 순간 패배이며, 제 패보다는 숫자 합이 높아야 합니다.”
먼저 와있던 손님들부터 순서가 돌았다.
그들은 자신의 카드 숫자 합에 따라 카드를 더 받거나 멈추거나 했다.
카인의 자신의 카드를 확인했다.
스페이드 8과 하트 9. 합이 17.
확률적으로 보았을 때 멈추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나는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다음 숙녀분은?”
카인은 에스텔의 카드를 확인했다.
클로버 10과 하트 9. 합이 19.
‘당연히 멈추겠군. 숫자 3 이상이 나오면 바로 패배….’
“당연히 더 받아야죠.”
에스텔은 예상외의 판단을 했다.
그리고 정말 예상외로, 그녀의 다음 카드는 하트 2가 나왔다.
“…….”
“와! 이러면 딜러가 같은 21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내가 이기는 거죠?”
카인은 ‘룰을 이해한 게 맞느냐’라는 질문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카드가 몇 번 더 돌았다.
딜러 역시 자신의 카드를 추가했지만, 합은 19에 불과했다.
에스텔은 두 배가 되어 돌아온 칩을 보며 후후 웃었다.
“기다려봐요. 내가 여기 칩 다 쓸어올 테니까.”
카인은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카지노의 딜러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도박꾼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사기도박을 치는 것은 아니지만, 실력적인 부분에서 일반인은 딜러를 이길 수 없었다.
한 판 한 판에서는 크게 딸 수 있어도, 판수가 쌓이고 통계적으로 보면 딜러 측의 승률이 높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초심자의 행운이란 것이 있다고 해도….’
“와! 첫 두 장에 21이 맞춰졌어요! 이러면 1.5배였나요?”
“…….”
“이거 봐요. 이번엔 20이에요!”
“아니.”
하지만 에스텔의 승리 행진은 계속되었고, 그녀 앞에 놓인 칩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증식되어갔다.
카인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이렇게 운이 좋은 인물로 설정한 기억은 없었다.
‘세계관 자체가 게임 내라는 설정이긴 하다. 만약 내부적으로 어떤 버그가 생겨났다고 가정하면….’
에스텔의 강운에 카인은 말도 안 되는 추측을 진지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 에스텔을 선두로 세워 카지노의 돈을 턴다는 계획을 떠올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을 때.
“손님.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줄지어 서 있는 경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만 그 시선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 손님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