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원소장의 이해와 실제 (1)
헤일리는 얼떨결에 밀시안의 손을 잡았다.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가자 주변 풍경이 더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연기 솜씨가 제법이던데.”
“용병 생활을 할 때 사냥개를 한두 번 상대한 게 아니거든.”
어느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보였다.
총과 수트를 입은 경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자신을 납치한 사냥개들이 그들과 친근한 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헤일리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여기는….”
“슈프림 시큐리티의 뒤편입니다.”
“슈프림 시큐리티?”
“요한 님이 운영하시는 경비업체입니다.”
헤일리는 아직 상황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탁.
그때 주차장에 발소리가 울렸다.
헤일리는 고개를 돌렸다.
경비들은 어느새 한 곳에 시선을 향한 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있었다.
시선이 모인 지점에는 한 남자가 뒷짐을 지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헤일리 앞에 멈췄다.
“오는 길 고생이 많았겠군.”
카인이었다.
슈프림 시큐리티 대표인 제이슨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헤일리는 순간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 이야기하지.”
다시 양팔이 붙들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갈 뿐이었다.
***
헤일리를 태운 차량은 62번 구역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로우택틱의 대장간에 도착해 신형 변환장치 제작에 착수하게 될 터였다.
카인의 옆에 선 밀시안이 말했다.
“생각보다 말귀가 빠른 자군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곧바로 자신이 할 일을 이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황제에 대한 증오가 강렬하단 뜻이겠지.”
헤일리의 가족은 모두 실종되었다.
황제의 손에 처리되었단 사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신이 황제의 적이란 건 확실히 알겠소. 탱크의 마나를 모두 흡수하는 것이 목적이란 것도.」
헤일리의 입을 통해 3년 전 그가 투옥될 당시의 일을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도 방주는 완성 단계에 가까웠소. 지금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가동에 필요한 마나 역시 방주 안에 있는 엔진에 충전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하오.」
헤일리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헌데 아직 방주를 띄우지 않고 있다는 것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았을 거다. 그보다는 방주에 태울 인원의 확충으로 계획이 미뤄지고 있는 것 같더군.」
헤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소. 신세계에서도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노예가 필요한 것이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카인의 말에 반문했다.
「변환장치의 제작을 나더러 맡으라는 말이오?」
「공학자로서의 자부심이 담긴 역작 아니었나? 스스로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텐데.」
헤일리는 움찔 몸을 떨었다.
설계도를 파기하지 못하고 숨기는 데 그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걱정할 것 없다. 적어도 황제처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헤일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일단 변용마법을 그리 자유자재로 사용하니 실력 있는 마법사란 건 알겠소. 탱크의 마나를 흡수한다면, 황제를 죽여줄 수 있겠소?」
「그건 아직 확답할 수 없는 사항이다.」
「…알겠소. 아직 당신이 미심쩍긴 하오. 하지만 적어도 황제보다는 나은 존재일 거라 믿소.」
헤일리를 태운 차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밀시안이 말했다.
“귀족 작위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퍼졌나 보군.”
“아뇨. 아직 이곳까지는. 에스텔 사제가 말해주었습니다.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자랑을 하더군요.”
“…….”
황제가 ‘요한’에게 작위를 내렸다.
수도에는 확실히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비록 가장 낮은 계급의 남작위지만,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벽 바깥 출신에게 작위를 내린다고요? 아무리 남작위라고 해도?」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원.」
「말조심하세요. 폐하가 그 남자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요.」
귀족 작위는 명예직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벽 바깥 출신에게 주어진 적은 없다.
때문에 수도의 귀족층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소문 따위야. 하루에도 수십 번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 소문이고 여론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카인은 타인의 시선이나 목소리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수행해야 할 목표만 생각할 뿐이었다.
가장 우선은 마탑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
그래야 마탑에 공고가 내려왔을 때 율리아의 교사로 간택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다음은 율리아의 교사와 아시모프의 주치의로 황궁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넓힌다.
활동 중 황궁 지하에 있는 마나 탱크에 접근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헤일리와 맺은 맹약의 해제는 탱크의 마나를 모두 흡수하는 순간 이루어진다.
한 번에 맺을 수 있는 맹약의 한계치에는 이미 도달한 상태다.
바마와 엘렌 교수.
제르비아와 아시모프.
그리고 헤일리까지, 총 다섯.
황궁 지하에 다다를 시기엔 다섯 개의 맹약 모두 완료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때쯤엔 황궁 내에 백진우가 존재하는지 확실하게 판단하고, 많은 일들이 진행되어 있을 테니까.
“나는 이만 출발하지.”
“예. 구역은 잘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카인은 차에 올라타 다시 벽 안쪽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그는 조금도 쉴 생각이 없었다.
***
바람이 쌀쌀한 12월 초.
마탑의 겨울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이타르 장로는 마탑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지상의 학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겨울바람도 우리 학생들의 학구열은 식히지 못하는구만. 저리 추워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들이라니.”
“…….”
책상 앞에 서류를 들고 대기 중이던 조교는 잠시 당황했다.
‘그보다는 기능적인 이유가 크지 않을까요. 마탑에서 배부된 학년별 로브에는 강력한 보온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진 않았다.
아이타르가 후계자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두 달 만에 연공실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업무가 좀 정상적으로 돌아가겠죠. 마탑의 주인이 돌아왔으니까요.’
조교는 다사다난했던 지난 두 달을 떠올리며 감회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없던 동안에도 마탑은 평화… 응? 저자는 누군가?”
창밖을 내려다보던 아이타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옆에 다가가 시선을 같이 하자 마탑 입구로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가 점 형태로 보였다.
마법으로 안력을 돋워 얼굴을 대략 알아볼 수 있었다.
요한 키리프였다.
그는 교수들에게 따로 지급되는, 학생들 것과는 다른 형태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아! 요한 키리프입니다. 라이티노 장로가 데려왔는데, 이번 학기부터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비서는 요한에 대한 몇 가지 중요 사항을 재빨리 덧붙였다.
헥사메디컬의 대표.
경찰청장의 표창.
뛰어난 마법 실력.
연공실에 칩거하는 동안 아이타르는 수도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라이티노가 데려왔다고?”
“네. 라이티노 장로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아직 본인이 직접 밝히지는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가늘어진 아이타르의 눈매에 조교는 순간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타르와 라이티노가 오랜 친우이기도 하지만, 서로 경쟁심을 가진 앙숙이란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라크센이 죽었을 때 라이티노 님이 엄청 기뻐했다는 사실은 마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의식해 후계자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
순간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아이타르가 요한을 몰래 불러내어 죽임을 시도하는 그런 상상.
조교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타르 장로님은 경우와 상식이 있는 분이시지. 절대 그럴 리 없어.’
나이를 대체 어디로 취식하는지 알 수 없는 라이티노 장로와는 다르게.
그런 조교의 불안을 잠재우듯 아이타르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어. 신입 교수들 면담도 내 업무 중 하나 아니겠나?”
썩 호의적인 목소리는 아니긴 했지만.
***
마탑에 들어온 카인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이번 학기에 맡은 강의는 둘.
1학년 「원소학 개론」
3학년 「원소장의 이해와 실제」
카인은 라이티노의 말을 떠올렸다.
「둘 모두 정원이 30명 정도 되는 강의일세. 처음부터 대형 강의를 주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게나. 자네의 교수 부임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을 교수로 임명한 것만 해도 이미 파격적인 인사 처리였다.
‘아마 아이타르 장로의 눈치를 본 것도 있을 테지.’
친우이며 같은 장로라고는 하나, 마탑의 최고 권력자는 어디까지나 아이타르였다.
사실 첫 강의야 무엇을 맡든 상관없었다.
마탑의 학기는 3개월 주기.
강의나 연구 실적 평가가 좁은 간격으로 이뤄지기에, 실력만 뒷받침되면 빠른 승진이 가능했다.
1학년「원소학 개론」은 라이티노가 카인을 위해 새로 개설한 강의라고 했다.
‘1학년 중 이론 성적과 마법 실력이 부진한 학생들을 모아 놓은 강의라고 했지.’
반대로 3학년 「원소장의 이해와 실제」은 수재, 혹은 천재들을 모아 놓은 강의였다.
3학년.
이론과 실전에 숙달되어 자부심이 가장 높을 학년.
때문에 교수를 바라보는 시선도 굉장히 깐깐한 편에 속한다고 했다.
거기에 마탑의 학생은 대부분 귀족가의 자제들로 자존심까지 높다.
「특히 이번 ‘원소장의 이해와 실제’에는 신입 교수에게 텃세 부리기 좋아하는 악동들 이름이 보이더군.」
실제로 직전 학기에 신입 교수 한 명이 텃세를 못 이기고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원소장 자체도 다루기 어려운 분야이네만, 자네가 괜찮다 했으니 큰 걱정은 없겠지.」
띵─
카인 앞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백색 로브를 걸친 1학년들이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카인이 탑승하자 겁먹은 참새 떼처럼 구석으로 쭉 밀려났다.
“……”
“……”
카인을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말을 거는 학생은 없었다.
띵─
카인이 내리고 복도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숨 막히는 정적이 깨졌다.
“저분이 새로 오신 요한 교수님이야?”
“잘생기셨어.”
“잘생기셨지.”
“보통이 아니라 엄청.”
“인사라도 건네보지 그랬어. ‘교수님,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에일라예요’하고.”
“부끄럽잖아. 무섭기도 하고.”
모두 ‘파하’ 숨을 내쉬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벽 바깥에서 오셨다는데.”
“슬럼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었어.”
마탑에 돌고 있는 소문은 학생들이 카인에게 말을 거는데 서로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있었다.
카인의 차가운 인상 역시 학생들의 머뭇거림에 한몫했다.
─잘생기셨어.
─그것밖에 기억이 안 나니.
─너 요한 교수님 강의 수강 신청한 거 있어?
학생들의 대화는 카인의 등 뒤로 멀어졌다.
탁.
카인은 강의실 문 앞에 멈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57분.
3학년「원소장의 이해와 실제」
강의 시작 3분 전이었다.
끼익─
문을 열었다.
방사형으로 높아지는 경사에 책상이 배치된 구조.
타각- 타각-
카인의 등장과 함께 강의실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학생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경계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카인의 걸음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타각.
카인의 걸음이 강단 앞에 멈췄다.
단 위에는 출석부와 강의용 전공 서적, 그리고 강의계획서가 올려져 있었다.
「원소장 구조 해체서-전(電)」
카인은 자신이 들고 온 교재의 이름을 확인했다.
「원소장 구조 해체서-화(火)」
원소장이란 단어가 둘 다 제목에 들어가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서적이었다.
원소장 안에서도 분야가 세밀하게 나뉘는 법이니까.
“…….”
고개를 들자 학생들 책상에 놓인 ‘원소장 구조 해체서-전(電)’ 서적이 보였다.
강의계획서도 사전에 조교에게 전달받은 것과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뻔한 장난질을 쳐놨군. 나중에 교재 이름을 헷갈렸다고 둘러댈 생각인가.’
아무래도 적의를 드러내는 이는 학생이나 교수뿐만이 아닌 듯했다.
카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강단에 놓인 ‘원소장 구조 해체서-전(電)’를 빠르게 읽어나갔다.
내용은 이미 다 머릿속에 있었다.
다만 교재 목차에 맞춰 커리큘럼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야?”
“책을 다른 걸 들고 오셨는데?”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강의 준비를 안 해오신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완전히 다른 책을 들고 오셨잖아.”
“왜 저걸 읽고 계신 거야? 자기 주원소가 아니면 읽어봤자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할 텐데.”
원소장은 핵심이 되는 원소에 따라 이론이나 실제가 판이한 학문이었다.
때문에 각 속성의 원소장을 맡은 담당 교수가 존재하며, 서로 별개의 학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휘리릭. 탁-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카인은 전공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뒤표지를 덮었다.
“그냥 강의 준비를 제대로 안….”
다시 찾아온 정적을 인지 못 했던 학생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카인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강의실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오늘부터 ‘원소장의 이해와 실제’ 강의를 맡은 요한 키리프다. 바로 강의를 시작하지.”
카인의 말과 함께 강의실 시계가 종을 울렸다.
오전 10시.
일 초의 어긋남도 없는 정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