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70화 (170/227)

#170. 설계도 (3)

“혹자는 나를 구원자로 부르기도 하더군.”

구원자라고.

비유적인 표현일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까.

지금 이 상황에 그것이 중요한가.

헤일리는 혼란스러웠다.

“결정해라. 자료의 위치를 넘기고 치료제를 받을지. 굳게 입을 다물고 감방에서 썩어갈지.”

헤일리는 카인의 눈을 응시했다.

확실히 이제까지 찾아온 심문관들과는 달랐다.

방주와 세계 멸망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비웃음을 날렸다.

「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지?」

하지만 이 남자는 ‘신세계 프로젝트’를 먼저 언급하고,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황제의 최측근이라 판단하는 게 옳겠지. 하지만.’

이쪽의 비밀은 어떻게 꿰고 있단 말인가.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할 시간도 부족하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이 자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라면.

그리고 자신과 같이 황제를 방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헤일리의 가슴에 순간 작은 희망이 꿈틀거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석화증을 치료한다니. 당신이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

카인이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최근 성인지를 읽다 걸린 신도 하나가 존재하긴 했지만.

“감옥에 갇혀 소문 한번 못 들었나. 직접 시험해볼 수 있도록 해주지.”

카인이 헤일리 앞에 주사기를 던졌다. 치료제가 삼 분의 일 양만 차 있었다.

“그 정도만 투여해도 효력은 확인할 수 있을 거다.”

헤일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주사기를 집어 왼쪽 다리에 꽂았다.

독극물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진작 그러했을 테니까.

“……!”

오래지 않아 왼쪽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곧 헤일리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게 무슨….”

“자료의 위치를 분다면 나머지 다리도 치료할 수 있을 거다.”

헤일리는 멍한 얼굴을 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혼란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토록 전능한데 자료의 위치는 왜 모른단 말이오?”

다음 질문과 같았다.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왜 자료의 위치를 내게 묻는가.」

단순히 답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주요 설정을 모두 미리 짜놓았다.

세계관. 굵직한 사건들.

중요 지역. 마법. 등장인물들.

유일하게 미리 짜놓지 않은 설정이 있다면 주요 사건 사이에 들어가는 자잘한 사건들이다.

‘작은 사건은 등장인물에 의해 언제든 틀어질 가능성이 존재하니까.’

등장인물은 작가의 손을 떠나 글에 도착한 순간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다른 인물, 혹은 사건과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예측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미 자신의 존재만으로 주인공 라크센이 죽고 이야기의 흐름이 크게 어그러졌지 않은가.

‘글로서 완성된 부분은 전체 플롯의 정확히 절반. 전반부.’

그 전반부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미 전개를 마쳤기에 모든 설정이 완성된 상태.

하지만 후반부에 벌어질 작은 사건들은 핵심 부분을 제외하곤 단순히 뼈대만 존재한다.

결국 미래는 완전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

생각을 마친 카인은 다시 녹음기를 재생했다.

“치료제 개발과 보물찾기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 이 세계에 완전한 존재는 없다.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존재는 없다.

작품의 뿌리와도 맞닿아 있는 말.

라크센을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절대자로 묘사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력자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었으니까.

헤일리의 눈빛이 고요히 빛났다.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없소. 자료 위치를 알려준다 해도 당신이 나를 완전히 치료해주고 황제가 나를 풀어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오.”

카인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자신이 정말로 황제를 적대시하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폐하는 그 부분까지 예상하셨다. 맹약을 맺지.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나? 요한 키리프는 황제의 명에 따른다. 연구 자료의 위치를 조건으로 데어 헤일리에게 충분한 양의 석화증 치료제를 제공한다.”

카인은 맹약에 들어갈 내용의 예를 들었다.

“또한 데어 헤일리의 석방을 포함하여, 대화를 통해 상호 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조건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카인은 ‘대화를 통해 상호간 명확히 인지’ 부분을 힘주어 발음했다.

헤일리는 카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등에 한 줄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난 황제의 적이다. 최소한 설계도가 그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CCTV의 감시를 피해 오간 대화를 맹약 조건에 포함 시키려는 것이다.

지금 역시, 황제의 눈을 피해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맹약으로 보이기 위해.

‘확실히 맹약의 맹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면….’

카인이 황제의 적대자라 그제야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맹약을 받아들이겠나?”

─ 나를 믿어라. 필요한 모든 조치는 끝내놓았으니.

눈앞에서 카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

황제의 집무실.

카인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는 황제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얘기는 잘 나누어보았나?”

집무실 한쪽 벽면엔 황실 본궁 모든 CCTV와 연결된 화면이 출력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을 것이 분명한데 모른 척 묻는 황제의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카인은 조소를 감추고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화증의 치료와 석방을 조건으로 자료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33번 구역의 북동부 쓰레기처리장. 정확한 좌표는 32.11.129입니다.”

“정말인가. 고생했네.”

황제는 담담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집무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헤일리의 입에서 좌표가 나오자마자 사람을 보냈을 테지.’

카인은 황실의 연락을 받고 곧장 출동 준비를 하고 있을 33번 구역의 경찰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쪽의 움직임이 더 빠를 테니까.

지하에서 올라오는 길에 이미 에스텔에게 무전을 마친 상태였다.

「알았어요. 밀시안 씨한테 곧장 통신을 보낼게요.」

33번 구역의 쓰레기처리장에 이미 밀시안을 배치시켜 놓았다.

구역 경찰들이 아무리 빨라 봤자 미리 대기 중이던 밀시안보다 빠를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그들 역시 설계도를 발견하긴 할 테지만.’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닌 가짜 설계도이다.

이미 찾아냈던 반쪽의 설계도를 보고 모조한 완전한 분량의 설계도.

더 없이 진짜 같아 보이는 가짜.

실제 제작에 막대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완성품은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황제는 헛된 기대로 신형 변환 장치의 제작을 지시하고, 완성품을 보고 설계도를 찢어버릴 것이다.

적어도 반년쯤 뒤에.

자신이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헤일리의 치료와 석방은 자료를 완전히 찾아낸 뒤로 하지. 맹약을 맺었으니, 녀석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 말이야.”

끼익-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인에게 다가갔다.

카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석화증 치료제를 조건으로 건다는 자네의 생각은 유효했네. 다른 이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그에 맞는 포상을 내려야겠지. 원하는 게 있나?”

황제의 목소리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신형 변환 장치를 사용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마나를 흡수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으리라.

‘계획을 망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포상이라.’

황제를 죽이는 건 미정 사항.

하지만 마나 탱크는 확실하게 이쪽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었다.

카인은 잠시 고민했다.

황제에게 너무 주제넘은 이미지로 비치지 않되, 실익은 확실하게 챙겨야 했다.

몇 가지 선택지가 머릿속에 오갔다. 카인이 입술을 떼었다.

“제게 작위를 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벽 바깥의 황무지.

“벽 근처에 모습을 보이는 순간 경고 없이 사격이 이뤄질 거다.”

헤일리를 떠밀다시피 내려준 차량은 멀리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멍한 시선으로 쫓던 헤일리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왼쪽에는 20번대 구역의 벽이.

오른쪽에는 30번대 구역의 벽이.

시야 멀리, 높이 솟아 있는 벽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

가야 할 방향의 벽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20번대 안쪽 구역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카이드릭 황제─!! 너를 죽이겠다─!!”

헤일리는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돌연 크게 소리쳤다.

황제에 대한 분노가 그의 가슴에 들끓고 있었다.

「너같이 하등한 것이 아무리 애를 써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석방 전.

황제가 마지막으로 던진 한마디.

“죽인다─!! 반드시─!!”

황제는 자신을 하찮게 보고 있다.

아무 방비 없이 이곳에 풀어준 것부터 알 수 있다.

“씨발 새끼─!! 내가 너를 가만둘 줄 알아─!!”

더욱 화가 나는 건, 자신이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부랑자가 아무리 황제의 음모에 대해 떠들고 다녀봐야 미친놈 취급만 받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푸흐흐흐….”

헤일리는 웃으면서 울었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허망했다.

이제껏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거적때기를 걸친 몸뚱이 하나만 남아 버렸다.

세상에 막 태어났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의 자신에겐 ‘젊음’이라는 자산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점일까.

“으아아아─!!”

헤일리는 소리치며 크게 울었다.

세상에 막 태어난 아기처럼.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고, 시린 겨울바람만 불었다.

“몸뚱이만 남았다고….”

몸을 내려다보던 헤일리의 시선이 두 다리에 닿았다.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석화증을 치료하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감옥에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인물.

아니, 엄밀히 말해 정체불명은 아니다.

“제약회사의 대표라고. 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는 없지.”

헤일리는 ‘요한’의 정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추측을 했다.

국가 전복을 꾀하는 레지스탕스일 수도 있고, 계승권을 노리는 황자의 하수인일 수도 있다.

“…….”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가 황제의 적이라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설계도가 황제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게 한다는 조건으로 맹약을 걸었으니까.

“도박이지만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고….”

헤일리는 허공에 혼잣말을 했다.

감옥에서 생긴 버릇이었다.

또한 자신의 선택을 누구든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땅에 주저앉아 하늘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던 헤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죽든 살든 할 테니까.

그리고 33번 구역을 향해 막 걸음을 옮기려던 때.

몇 대의 바이크와 차량이 헤일리 앞에 멈춰 섰다.

“사장님, 혹시 택시가 안 필요하십니까?”

손에 들고 있는 총기와 차량 주위에 덧대어진 철판.

사냥개였다.

헤일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 저, 혼자 걸어갈 수 있는데 말입니다.”

사냥개들은 헤일리의 양옆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옷을 뒤졌다.

“대장?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요?”

“거지입니다. 거지.”

대장이라 불린 자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없다고? 거기 있잖아.”

대장의 손가락이 헤일리의 배를 가리켰다.

그리고 칼을 꺼내 죽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언어 상관없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바디랭귀지였다.

“딸꾹.”

얼굴이 창백해진 헤일리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자, 자,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사장님.”

“저희가 승객분의 안정을 위해 안대를 제공하거든요.”

말과 달리 사냥개들의 손동작은 거칠었다.

헤일리를 트렁크에 쑤셔 넣은 뒤 손과 발에 밧줄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끼익- 텅!

안대로 어두워진 시야는 트렁크가 닫히며 완전히 캄캄해졌다.

곧 차량이 움직이며 헤일리의 몸이 트렁크 곳곳에 부딪쳤다.

‘이렇게 죽는 건가.’

역시 세상에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한 개인에게 이런 악독한 운명을 선사하지는 않을 테니까.

차량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감각이 차단되어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헤일리는 눈물을 흘리다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밝아진 시야에 눈을 떴다.

“──!”

“────?”

주위에선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재갈과 손발의 밧줄을 풀었다.

스륵.

안대도 곧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빛에 헤일리는 눈을 찡그리며 앞을 보았다.

단정한 인상의 중년이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혹시 모를 감시 때문에 거친 방법으로 모신 점 사과드립니다. 47번 구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