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모략 (4)
카인이 내뿜은 살기에 아시모프는 몸을 덜덜 떨었다.
방 안의 공기가 적의를 가득 머금고 온몸을 짓눌러 오는 기분이었다.
다닥. 다닥.
저도 모르게 이가 부딪치고,
숨은 제대로 쉴 수 없었으며,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
연회 자리에서 폐하가 진노하여 살기를 흩뿌렸던 그때.
정확히 그때와 같은 중압감이었다.
탁─ 탁─
문밖의 발소리는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셸링포드가 오고 있어.’
기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동 나이대에 견줄 이 없는 실력자.
하지만 셸링포드가 눈앞의 이 남자를 이기는 그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건 황궁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암투를 지켜봐 온 이로서의 본능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영면증으로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가 될 운명.
모질게 이어온 삶을 여기서 끝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조언하지. 안전한 길로만 가선 평생 남들보다 앞서지 못하는 법이다.”
순간 카인의 목소리가 아시모프의 정신을 현실 위로 끌어올렸다.
“그것이 황위가 되었든, 큰돈이 되었든, 명성이 되었든.”
아시모프는 고개를 들어 상대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자신이 황궁 내의 수많은 암투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유약한 인상 탓에 위협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면증이 발병한 이후로는 그 정도가 심해져, 그 누구도 자신을 경계하지 않았다.
「어차피 식물인간이 될 운명이잖아요?」
「굳이 힘들여 제거할 필요도 없지. 계승권 싸움에서 일찌감치 탈락했으니까.」
쏟아지는 비웃음과 멸시.
그 속에서 결심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그리고 비웃었던 모두를 숙청해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황위에 올라 영면증 치료에 전력을 다하겠다고도 생각했지. 지금 폐하가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쏟고 계신 건 아니니까.’
제왕학과 약학을 비롯한 온갖 분야의 공부를 섭렵하고, 이번에는 3황자를 독살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매 순간 한계를 느꼈다.
늘어나는 수면 시간과 빈도 때문이었다.
황위에 오른 자신의 모습보다는, 그 전에 영영 잠에 들어 버린 자신의 모습이 더 쉽게 상상이 되었다.
혼자 힘으론 한계가 있었으며,
외부 누군가의 결정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안전한 길로만 가선 평생 남들보다 앞서지 못하는 법이다.」
그때 이 남자가 찾아와 말했다.
귀족들과는 판이한 눈빛.
밑바닥부터 고난을 헤쳐 올라온 자의 눈빛이다.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슬럼 출신이란 소문을 익히 들었음에도.
‘어차피 죽을 목숨.’
이 남자에게 운명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남을 앞지르기 위해선 위험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 법이니까.
탁─
발소리가 문 바로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현명하군.”
결심을 마친 아시모프가 말했다.
얼굴에 묻어 있던 유약함을, 조금은 떨쳐버린 표정으로.
***
맹약 체결로부터 이 주가 지났다.
그 후 카인은 4황자의 별채를 2번 더 방문했다.
“의료품 보급은 이곳에서 받으면 되겠군요. 담당관님, 혹시 황궁 지하에도 이러한 창고가 존재합니까?”
“아뇨. 저는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는걸요. 감옥 외에 다른 시설이 있다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친 모든 인물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져 ‘검문’을 마쳤다.
“오늘 하루 중 가장 최근에 잠든 시간은 언제입니까?”
“4시간 전 정원에서 잠들었어요. 침실로 실려 와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잠에 들었고요.”
맹약을 맺은 이후 4황자의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담담했다.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생각 이상이군. 분명 최소한의 것들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았는데.’
요한의 정체.
영면증 치료제.
자신을 황제로 만들기 위한 방법.
가령 위와 같은 질문들.
하지만 카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를 제외하곤 맹약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화장실에서 잠에 들 때가 가장 곤혹스러워요.”
여러 의문에 대해 본인 나름대로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덕에 황궁 내 인물들에 대한 검문은 순조로웠다.
맹약의 유지 제한은 최대 5인.
그중 한 자리를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황제의 전령이 찾아와 초대장을 건넸다.
「식사 한 번 같이하지.」
짧고 간결한 메시지였다.
카인은 준비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황궁을 찾았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뜬 정오.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본궁 옆에 높이 솟은 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 유리벽 너머로 지상의 풍경이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띵─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넓고 호화스러운 식당이 나타났다.
테이블은 중앙의 단 하나.
거기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아닙니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인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눈을 내려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도회장에서 본 게 마지막이니 보름 정도가 되었군. 초대가 늦어서 미안하네. 업무가 워낙 바빠 말이야.”
“아닙니다.”
“유헬이 쓰러졌을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네. 훌륭하군.”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에서 황제의 만족스런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전과 같이 마나를 뿜어내 압박하지는 않는 걸 봐서는.
‘다른 부분에서 또 시험을 해오겠지.’
하지만 워낙 성격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얘기하지.”
황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사용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가 나가고 때가 탄 접시 위엔 희멀건 한 스프나 바스러진 빵 따위가 올라가 있었다.
“자네가 그리워할 음식이 아닐까 하여 준비했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
슬럼 빈민층이 먹을 법한 식단.
카인은 황제의 속내를 가늠했다.
모멸감을 주어 반응을 보려는 의도.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부리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해 잘라내 버릴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카인은 건조한 몸짓으로 손을 움직였다.
준비된 포크와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빵을 집고 스프를 그릇째 들어 마셨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잠시 멍했다.
곧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 슬럼에 포크나 나이프 같은 식기가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준비가 미흡했군. 한방 먹었어.”
황제는 카인의 동작을 따라 했다.
그렇게 기묘한 방식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유헬 황자를 해하려 했던 이의 심문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죽었네. 결국 끝까지 아무 정보도 뱉지 않더군.”
눈을 볼 수 없기에 황제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배후를 밝혀냈다 하여도, 황제가 별다른 개입은 하지 않을 터였다.
황자와 황녀가 서로 죽고 죽여, 강한 이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 황제였다.
“그보다 아시모프는 어떤가? 치료의 실마리가 조금 잡히나?”
“예. 기존 연구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치료제 개발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자네가 본 아시모프는 어떤가?”
아시모프는 어떤가.
아까와 같은 문장.
하지만 이번에는 병세가 아닌, 아시모프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묻고 있었다.
“강한 분이더군요. 첫인상과 달리.”
“잘 파악했군. 겉은 심약해 보여도 안에는 독을 품고 있는 아이지.”
“…….”
단순한 비유가 아니리라.
역시 황제는 독살의 배후가 4황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황제는 커피를 홀짝이며 통유리 앞에 다가섰다.
“이리와 이것 좀 보겠나?”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옆에 다가섰다.
넓게 펼쳐진 벽 안쪽 풍경.
각 구역의 번호 대를 가르는 벽은 물론이고, 대성당이나 경찰청 같은 주요 건물들이 한눈에 보였다.
“어떤가?”
“멋지군요. 황궁에서밖에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다음 순간.
풍경을 감상하던 황제가 카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우웅―
황제의 마나가 카인의 마나 회로 안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잠깐 살펴보지.”
“…….”
카인은 담담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일부러 손을 피하지 않았다.
“흑색 마나가 쌓여있군. 라이티노가 말한 대로야.”
이 역시 예상했다.
하지만 라이티노 역시 자신의 진짜 신분은 알지 못하기에, 정보가 새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벽 바깥에서 활동한 시간이 꽤 된다고 하였지. 나쁘지 않은 방법일세. 목표를 위해선 힘이 필요하고, 힘을 위해선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황제는 카인의 흑색 마나를 지칭해 말하고 있었다.
“이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양의 마나라니, 대체 얼마나 죽인 건가?”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예측 중 하나를 사실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대륙 전역의 땅에서 흡수한 정기는 마나로 변환되어, 황궁 지하에 있는 마나 탱크로 전송된다.
거대 여신상이 무너지고 현재는 전송이 잠시 멈추었지만, 탱크에는 아직 막대한 양의 마나가 저장되어 있다.
매일 황궁 지하에 내려가 특정 장치를 통해 탱크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 황제의 일과 중 하나.
즉.
황제는 카인이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했다.
대상이 땅과 인간이라는 차이가 존재하나, 어쨌건 생명을 취해 마나를 늘린다는 점에선 본질이 같았다.
황제의 물음에 카인이 대답했다.
“세자릿수가 넘은 이후로는 세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군. 라이티노가 제자로 점찍은 이유를 알 것 같네.”
황제는 카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유리 너머로 돌렸다.
“자네가 느낀 벽 바깥은 어떻나?”
“메마르고 황폐합니다. 땅과 사람 모두.”
“맞네. 기본적으론 식량이 부족하지. 농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먹을 입은 계속 늘어나니.”
황제의 시선이 시야 끝을 향했다.
“저 벽이 보이나?”
“예. 보입니다.”
20번대 구역과 30번대 구역을 가르는 벽이었다.
“벽 안과 밖으로 천국과 지옥이 나뉘고 있네. 태어난 장소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할 수 있지.”
“…….”
“나는 그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네. 벽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죄책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벽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이었다.
벽 안쪽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슬슬 영토를 확장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 같습니다.”
“맞네. 너무도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이득에 따라 누군가는 찬성할 테고, 누군가는 반대를 할걸세.”
황제는 깊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네.”
“어떤 생각 말입니까?”
“대륙의 모든 땅이 비옥해진다면 어떨까 하고.”
“…….”
“식량난이나 굶주림 따위의 단어는 천박한 농담이 될걸세.”
“…….”
“벽 안과 밖의 구분도 무의미해지겠지.”
“…….”
“자원을 두고 서로 피를 흘리는 일도 사라질걸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만약 그런 세상이 찾아온다면?”
카인은 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황제가 자신을 방주에 태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