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모략 (3)
아시모프 황자의 백색 눈동자가 카인을 향했다.
그러다 호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사람은 누구인지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저분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으로 황자 님의 병세를 살피게 된 요한 키리프라고 합니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떼려던 호위보다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아, 당신이….”
아시모프의 눈동자가 커졌다.
상대의 신분을 알았음에도, 아직 경계심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초식 동물.
그것이 4황자 아시모프의 인상이었다.
“얘기는 들었어요. 석화증 치료제를 개발한 유명 인사라고요.”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제 병을 치료하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의사가 다녀갔지만, 치료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거든요.”
석화증 치료만 해도 충분히 기적과 같은 업적이었다.
기대를 걸어볼 만함에도, 아시모프는 단번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염세적이군.’
그의 비관이 이해되기도 했다.
율리아보다 폐쇄된 시간을 보내왔을 것이다.
황궁 밖엔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고, 영면증 탓에 최근 몇 년은 안에서의 생활도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을 테니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어요.”
“일단 진료를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아시모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그의 팔을 잡아 세밀한 눈빛으로 살폈다.
“영면증은 겉으로는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요. 매번 병세를 살피는 허드슨도 아무 단서를 잡지 못했어요.”
“…….”
사실 영면증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아시모프의 병세를 살필 필요는 없었다.
제조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하는 것은 연극에 불과했다.
꾸준히 황실에 출입하여 예언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
그리고 상대도 연극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4황자는 예언자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예언자 역시 현실 세계의 인물.
작품의 진행 과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요한 키리프는 원래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주인공 라크센이 죽어 이야기의 흐름이 뒤틀렸다고 가정해도, 요한 키리프라는 인물이 일으킨 파문들은 상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는군. 적어도 아직까지는.’
카인은 아시모프의 맥을 짚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현실 세계’의 인물이 ‘요한 키리프’를 만났을 때 보일 법한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조심스런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하지만 상관없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될 터이니.
“영면증 탓에 황궁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몹시 지루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죠. 몸이 괜찮았어도 폐하가 허락하셨을지 모르겠지만요.”
카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백색 눈동자가, 아시모프의 말이 거짓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4황자는 황궁 밖을 나간 적이 있다.’
만약 그가 예언자라면, 엘렌 교수를 찾아가 라크센의 죽음을 사주했던 그날일 터였다.
하지만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예상치 못한 다른 이유로 황궁 밖을 나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니까.
카인은 당장 아시모프의 목을 쥐어 숨통을 끊고 싶은 충동을 내리눌렀다.
‘아직이다. 몇 차례 확인 작업을 더 거쳐야 한다.’
차분히 다음 질문을 던지면 된다.
그리고 아시모프 황자가 예언자로 밝혀지면, 그 순간 목을 뜯어도 늦지 않다.
카인은 뒤쪽의 호위를 향해 말했다.
“혹시 허드슨 님을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병세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홀로 4황자를 경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
분명 범상치 않은 실력자이리라.
무력을 사용한다면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으나, 불필요한 변수는 최대한 치워두는 것이 옳았다.
“…….”
호위는 제 주인을 쳐다보았다.
곁을 잠시 비워도 되느냐는 뜻이었다.
“아, 셸링포드. 다녀와도 괜찮아요.”
허락을 받고는 고개를 꾸벅인 뒤 방을 나갔다.
끼익- 탁.
문 너머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회로 내부에서의 마나 정제는 이미 5단계에 이른 상태.
여기서 자신이 조금만 수를 쓰기만 해도 황자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지워지리라.
카인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다음 질문을 던졌다.
“황자 님. 혹시 라크센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아시모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 이름을 어떻게…!”
순간이었다.
카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바람으로 화해 아시모프의 온몸을 옥죈 것은.
“크, 흐, 헉.”
바람에 목이 졸린 아시모프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황에 대한 판단은 빨랐고, 행동의 속도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친구.
허나 소설을 빼앗으려 했던 장본인.
녀석 역시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리고 이 복수의 순간을 얼마나 오래 염원해왔던가.
카인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사이로, 예언자의 현실 세계의 이름이 비어져 나왔다.
“오랜만이다. 백진우.”
카인은 아시모프의 목을 죈 바람의 강도를 낮췄다.
“배, 백진, 그, 그게, 누구, 허―.”
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시모프 황자는 백진우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황궁을 나가 엘렌 교수에게 라크센의 죽음을 사주했지. 맞나?”
“마, 맞아요. 그,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러는─.”
하지만 ‘예언자’임은 사실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카인의 사고가 빠르게 돌았다.
‘예언자는 엘렌 교수와 바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현실 세계의 인물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정보다.’
라크센을 죽인 것 역시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일 터.
두 가지 가설이 도출되었다.
첫 번째 가설.
아시모프가 ‘예언자’이되 현실 세계의 인물은 아닐 가능성.
‘백진우가 빙의한 인물은 따로 있고, 녀석에게 지시를 받아 행동한 것이라면.’
카인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부터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는 순간 너는 죽는다. 왜 라크센의 죽음을 사주했지?”
아시모프가 어떻게든 숨을 쉬려 목을 더듬었지만, 형체가 없는 바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모, 몰라요! 컥, 나, 나도 대체 내, 내가 왜 그랬, 컥, 는지!”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고, 놀라운 결론이 나왔다.
아시모프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였지만,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당시의 기억이 일부 잘려나간 것처럼.
‘누군가 아시모프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후 기억을 삭제했다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나 장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확률이 지극히 낮다.
“자, 잘못 했어요! 제발, 컥!”
카인은 아시모프의 애원을 무시한 채 사고를 이어갔다.
두 번째 가설.
기억이 ‘지워진’ 게 아니라 무의식 깊이 가라앉은 것이라면.
백진우가 이 세계 인물에 빙의했다면 자신과 같이 ‘동기화’ 과정을 거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이미 100퍼센트에 도달해 과정을 ‘거쳤던’ 것이 되거나.
카인은 현재 자신의 동기화율을 체크했다.
[‘카인 리베르’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 현 동기화율 - 99.5% ]
99퍼센트를 넘어 위험 수위에 도달한 지 한참.
그럼에도 자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정신 간섭에 면역이 되는 ‘불굴의 의지’와 기억을 잃지 않는 ‘기억력’ 특성 덕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특성이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만약 동기화가 진행됨에 따라 원래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녀석의 동기화율이 100퍼센트에 달한 거라면.’
카인은 가설을 세웠다.
현실 세계의 기억이 남아있을 때 라크센의 죽음을 사주했다.
그리고 동기화율이 100퍼센트에 달한 순간 자아가 먹혀 ‘아시모프’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었다.
“다, 당신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라크센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 알려 줘요.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현실 세계의 기억은 무의식 깊이 가라앉고, 라크센의 죽음을 바랐던 이유 역시 잊게 되었다.
현 상황을 설명 가능하다.
가설에 불과하긴 하나.
‘두 가설 모두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아시모프. 너는 지금부터 나와 맹약을 맺는다.”
카인이 손을 젓자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당장 아시모프를 죽일 수는 없다.
복수 대상이 아닐 수 있을뿐더러, 그를 죽였다간 앞으로 황궁의 출입이 힘들어질 수 있다.
“맹약이 맺어지는 순간 너는 나의 모든 말에 복종하며, 언제든 나의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바람의 강도를 한 단계 더 낮췄다.
편히 목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크게 소리치지는 못할 정도로.
“당신 저, 정체가 뭐죠? 언제 죽어도 불만이 없는 노예가 되라니. 내,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요.”
바깥에서 두 쌍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허드슨과 셸링포드이리라.
상황이 썩 여유롭진 않았다.
“잊힌 기억에 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다. 내가 너를 죽이게 되는 날짜도 확정할 수 없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죽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아시모프는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형님들이 보낸 암살자인가?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
그리고 다음 대사를 들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음 전까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지원하겠다.”
“뭐, 뭐라고요?”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이 있지 않나. 어떻게든 병을 치료하겠다는 절박함과 함께 말이다.”
카인의 시선이 테이블 가득 쌓인 책더미로 향했다.
정치, 종교, 역사를 막론한 다양한 분야의 책.
그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제왕학과 약학 관련 서적이었다.
“3황자를 독살하려 했던 것도 그쪽일 테지. 하나씩 죽여 계승권이 돌아오도록 만들 생각이었나?”
“……!”
아시모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쉼 없이 경련하는 얼굴이 그의 감정 동요를 여실히 드러냈다.
“맹약을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는다.”
“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 아무런 상황 설명 없이 다짜고짜 맹약이라니. 그런 협박 따위로 나를….”
“말했지 않나. 황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겠다고. 영면증 역시 치료해주지.”
카인이 아시모프에게 황위와 치료제를 약속한 이유는 둘이었다.
맹약은 계약자의 진실된 욕망에 반응하기에 단순 협박으론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아시모프의 힘을 키우는 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점.
‘4황자 파벌을 만들어 세력을 키운다.’
아시모프를 감시해 ‘백진우’로 밝혀지는 순간 언제든 그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아닐 경우에 대비해, ‘백진우’일 가능성이 있는 황궁 내의 다른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조사한다.
‘그러기 위해선 황궁 내에서의 활동 반경을 계속해 넓힐 필요가 있다.’
현재 황궁 내에서 출입이 허용된 곳은 4황자 아시모프의 별채뿐.
그리고 2황녀 율리아의 교사가 된다면 그녀의 별채까지.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완벽한 조사를 위해선 황궁 전체를 출입할 필요가 있었다.
4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는 그래서였다.
4황자의 입지가 늘어날수록, 그 배후에 있는 자신의 영향력과 활동 범위도 함께 늘어날 테니까.
“영면증을 고친다고요?”
“진료 따윈 필요 없다. 이미 개발이 끝나 생산에만 돌입하면 되는 단계이니까.”
탁─ 탁─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어요.”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다만 맹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카인이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너는 죽는다.”
순간 엄청난 양의 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