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64화 (164/227)

#164. 모략 (2)

“연극이라는 그 발언.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이 잠시 잊었던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극이라니 조금 비약이 심한 것 아닐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

싸늘한 눈초리뿐이었다.

현재 상황에 불어야 할 쪽이 누구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함께 요한을 의심했던 무리는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죄송합니다. 죄, 죄송….”

남자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CCTV를 돌려 보았지만, 잔에 독약을 묻혔던 직원 외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참가자는 없었다.

“이번 무도회는 조기 종료 후 모두 귀가 조치하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황궁 지하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황제를 대신해, 사무관이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참가자들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는 대로 통제에 따라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본궁을 떠나는 마지막 차량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몸을 돌려 허리를 꾸벅 숙였다.

“자비르 총경님과 요한 대표님의 도움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빨리 상황을 수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도왔어야 하는 일입니다.”

카인과 제르비아는 경비대장을 따라 허리를 꾸벅 숙여 겸양을 표했다.

“지금부터는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됩니다.”

경비대장의 시선이 양팔이 구속되어 있는 직원에게로 흘긋 향했다.

직원은 현장에서 취조가 진행되는 동안 그저 덜덜 떨기만 하며 입을 열고 있지 않던 상태였다.

“대화를 돈독히 나누다 보면 결국 자신이 아는 모든 걸 뱉어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경비대장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부하들과 함께 직원을 끌고 본궁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목적지가 지하 감옥이며, 그곳에서 꽤 뜻깊은 대화가 이뤄지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었군.”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카인은 몸을 돌려 제르비아에게 말했다.

본궁 입구 앞쪽.

넓게 펼쳐진 공간.

눈이 시릴 정도의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제르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심문을 진행하겠지만, 3황자를 독살하려던 배후를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카인의 눈빛에 흥미가 번졌다.

역시 그녀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원래 독살 대상은 3황자였겠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직원은 잔을 착각해 2황자의 잔에 독을 묻혔다.

2황자와 3황자가 원래의 자기 것을 찾아 잔을 바꾸었을 때, 몹시 당황하던 직원의 모습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법이군. 2황자가 아니라 3황자가 목표였단 걸 눈치챘나?”

“카인. 너는 나를 너무 무시─.”

발끈하여 소리를 지르려던 그녀는 뒷말을 삼켰다.

이제껏 카인을 쫓아오며 옷깃 한 번 제대로 밟지 못했다.

말을 꺼내봐야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반박 대신 화제를 돌렸다.

“무도회가 일찍이 종료된 건 아쉬운 일이다. 아직 다른 참가자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인맥. 그것도 목적 중에 하나였지.”

카인이 본궁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지.”

“……?”

“인맥으로 만들기엔 최고의 인물들이 무도회장에 남아 있지 않나.”

카인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녀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타각. 타각. 타각.

두 사람은 빠르게 복도를 지났다.

무도회장에 가까워질수록 뒷정리를 위해 분주히 오가는 사용인들이 많이 보였다.

활짝 열려 있는 문을 지나 무도회장에 돌아왔다.

음악은 멈춰 있었다.

텅 빈 테이블 위엔 먹을 이 없는 음식과 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사이.

힘없는 모습으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3황자가 보였다.

2황녀 율리아가 옆에서 그를 다독이고 있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카인이 다가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3황자 오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이런 추태스러운 모습만 보이게 되었군요.”

가장 유력한 배후를 꼽으라면 같은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자나 황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웬스가 흘리는 눈물은 진심으로 보였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헬 형님은 평소 황궁 내에서도 적이 없기로 유명한데….”

“경비대장이 범인의 심문에 들어갔으니 배후를 꼭 밝혀낼 수 있을 겁니다.”

카인은 오웬스를 위로하는 동시에 진실의 눈을 통해 그의 말의 참과 거짓을 판별했다.

‘3황자는 범인이 아니다. 범행 동기만으로 따지면 같은 황자와 황녀들이 가장 유력하다 할 수 있겠지만.’

뛰어난 능력과 황제의 깊은 신임.

황위 계승자는 사실상 1황자로 정해져 있다.

때문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비교적 사이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계승 후보가 애매하게 정해져 있었다면 피 튀기는 암투가 벌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

그들 모두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야심을 드러낼 인물들이었다.

눈앞의 오웬스와 율리아가 범인이 아니라면,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범인으로 유력했다.

3황자 오웬스가 눈물을 훔쳤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인과 제르비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두 분 모두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화제의 인물인데, 무도회에 불미스런 일이 벌어져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군요.”

카인과 제르비아는 3황자와 2황녀 각각과 인사를 나누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도움에 감사드려요.”

제르비아가 물었다.

“범행에 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직원이 낯이 익긴 했습니다. 아마….”

제르비아가 팔꿈치로 카인을 허리를 툭 쳤다.

“뭐지?”

“펜과 수첩.”

“맡겨 놨나?”

그녀의 시선이 카인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말했다.

그거. 내 아공간.

“…….”

카인은 품에 손은 넣은 뒤 아공간에서 펜과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제르비아에게 건넸다.

“그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르비아와 3황자는 자리를 벌려 이야기를 나눴다.

카인과 함께 남게 된 2황녀 율리아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아쉬워요. 오자마자 당신이랑 춤을 추려 했는데.”

“황녀님 작품입니까?”

율리아가 ‘파핫’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설마요. 저라면 더 세련된 방법을 골랐을 거예요.”

율리아의 눈을 들여다보던 카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3황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제르비아와 이야기가 끝나면 3황자 역시 진실의 눈을 통해 확인을 거쳐야 할 터였다.

“흥미진진하지 않아요? 황궁에서 일어난 모략과 암투. 그리고 살인 사건.”

“2황자님은 아직 죽지 않으셨습니다.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군요.”

“당신이 평생 황궁 안에 갇혀 봐요. 안에서 달리 할 게 있나.”

율리아는 쫑쫑거리며 뷔페 음식을 그릇에 담아 왔다.

고기 조각 하나를 포크로 찍어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마법은 언제부터 가르쳐 줄 거예요?”

“다음 달부터 마탑에 교수로 재직할 예정입니다. 그때 폐하에게 운을 띄우시면 됩니다. 다시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요.”

마탑에 공고가 내려질 것이다.

‘앞으로 황궁에 출입하며 황제의 신임을 쌓는다면 공고 없이 채용될 수도 있을 테지.’

“알았어요. 다음 달이면 시간이 조금 길긴 하지만 기다릴게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배울 생각은 없으니까.”

포크가 카인의 입가로 향했다.

끝에 고기 한 점이 찍혀 있었다.

“먹지 않겠습니다. 독이 들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율리아는 깔깔 웃더니 고기를 자신의 입에 쏙 넣었다.

“재밌네요. 농담 같은 건 전혀 안 할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와 봐요. 벽 바깥 이야기를 들려줘요.”

그녀는 그릇을 내려놓고 카인의 손을 테라스로 잡아끌었다.

달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황실 주치의 허드슨 프레밍이라고 합니다.”

4황자의 별채로 향하는 회랑.

허드슨은 고개를 꾸벅 숙인 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었지요. 요한 키리프입니다.”

명함을 교환한 두 사람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회랑 양옆에 높은 나무가 이어져 깊은 숲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2황자님의 생명엔 큰 지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해독제를 빠른 시간 내에 투여한 게 유효했지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3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

하나 황실 주치의라는 높은 직급.

‘실력은 보장되어 있겠군.’

앞으로의 황실 활동을 위해서 친분을 쌓아 둬야 할 인물 중 하나였다.

단순한 실력을 떠나 인간적으로도 어느 정도 완성된 인물로 보였다.

황제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 받았다고 했으나, 귀족 특유의 고압적인 자세나 오만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시모프 황자님은 별채에서 거의 나오지 않으십니다. 영면증으로 아무 곳에서나 잠이 드는 탓에 일상생활이 어려우신 터라….”

허드슨의 목소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적어도 중기는 넘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예. 최근에는 잠에 드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수면 시간은 반대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잠에 들어 평생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영면증이었다.

“그래도 석화증 치료라는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니,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영면증은 전부터 직접 마주해 보고 싶은 병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표본이 워낙 희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별채에 도착했다.

회랑이 끝나고, 작다고 말할 수 없는 크기의 저택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드슨 님. 그리고 요한 님이 맞으시지요.”

벨을 누르자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노집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노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군요.”

카인이 허드슨에게 속삭였다.

속삭임을 들은 노집사가 말했다.

“예. 다른 황자나 황녀님들보다 저택의 크기도 작고 사용인의 숫자도 적지요. 아시모프님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도 합니다.”

그가 덧붙였다.

“최근에는 잠이 깊어져 주위 소리에도 전혀 깨어나시지 않기는 합니다만.”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그런 말투.

일행은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인 3층에 있는 아시모프 황자의 방 앞에 도착했다.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웬만해선 깨어나시지 않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낮춰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집사는 문을 열었다.

허드슨과 카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다시 문을 닫았다.

침대에는 유약한 인상의 소년이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허리에 검을 맨 젊은 남성이 서 있었다.

이어지는 짧은 목례.

허드슨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아시모프 황자님의 호위입니다. 황자님이 일상생활 중 잠에 빠질 경우 침실로 모셔 오는 역할을 합니다.”

두 사람은 침대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허드슨은 이불을 살짝 걷고 익숙한 몸짓으로 황자의 호흡과 맥을 살폈다.

“…….”

카인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4황자 아시모프.

16살.

황자와 황녀 중 가장 어린 나이.

가느다란 얼굴선과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여러 요소가 그의 유약한 인상을 부각하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

허드슨은 잠시 내렸던 이불을 다시 황자의 가슴까지 올렸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진료 일지에 내용을 추가해 카인에게 건넸다.

“2년 전 영면증이 발병하신 이후로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예. 영면증은 아무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요. 단순히 수면 시간이 늘고, 그 빈도가 잦아지는 것 외에는.”

카인은 일지를 훑으며 호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황자의 생활 패턴이나 수면 빈도, 시간과 같은 것들이었다.

“저는 잠시 집사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허드슨이 자리를 비웠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엔 적막함이 감돌았다.

카인은 다시 팔짱을 끼고 아시모프 황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

가장 유력한 예언자 후보이자,

가장 유력한 독살 범행 용의자의 얼굴을.

그리고 그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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