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모략 (1)
“너도 눈치챘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남자는 궁정 직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정과 움직임을 하고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범죄자를 상대해 온 카인과 제르비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잔이 뒤집혀 쌓여 있는 뷔페 테이블로 다가갔다.
품에서 마른 천을 꺼내 잔 하나를 뒤집어 입술이 닿는 부분을 닦아 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을 돌려놓은 뒤, 원래 업무인 서빙을 위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도회 2부에 입장할 황자와 황녀들을 위해 준비된 잔들이었다.
“요한. 독을 비롯한 약물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 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일단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데에는 두 사람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아직 결정적인 순간은 닥치지 않았을뿐더러, 범행을 저지른 직원도 아직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무도회장에 남아 있었다.
무도회는 진행되었다.
음악이 흐르고, 파트너가 바뀌고,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잔에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잔을 주시하는 한편, 카인과 제르비아는 무도회장에 수상한 이가 또 없는지, 범행을 저지른 직원이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는지 살폈다.
“요한 님. 그럼 다음번에는 꼭 제 저택에 한 번 방문을…!”
“확답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무도회장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달아올랐다.
빠른 템포의 곡은 참가자들의 취기와 흥분을 북돋았다.
창밖엔 한껏 차오른 달이 눈부시게 빛났다.
“황자와 황녀님들이 입장하십니다!”
경비의 힘찬 외침과 함께 문이 열리고 3명의 황족이 모습을 보였다.
유헬 프나함 2황자.
오웬스 프나함 3황자.
율리아 프나함 2황녀.
황족의 피가 흐름을 증명하는 눈부신 백색 머리가 돋보였다.
사람들의 힘찬 박수와 함께 입장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뷔페 테이블로 이동했다.
카인과 시선이 마주친 2황녀 율리아가 작게 웃으며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
카인은 살짝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이 뷔페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었다.
3명의 황족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잔에 술을 채우는 동안 사람들은 작게 속삭였다.
“1황자님과 1황녀님은 보이시지 않네요?”
“1황자님은 폐하의 명을 받아 벽 바깥에 임무를 나가 계시죠. 1황녀님은 이런 자리에 일절 관심이 없으시기로 유명하고.”
3명의 황족이 잔을 높이 들었다.
2황자가 대표로 말했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군요. 모두 바쁜신 와중에 자리에 참석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잔을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제르비아가 카인에게 속삭였다.
“범행의 추가 단서를 잡지 못했지만, 이제 움직여야 한다. 잔에 어떤 약물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
직원이 무언가를 묻혔던 잔은 3황자가 들고 있었다.
카인은 앞으로 나가려는 제르비아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이대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뭐?”
“황실의 신임을 얻어 나쁠 건 없다. 너와 나 어느 쪽의 목표든. 상황이 크게 흔들릴수록 파고들 틈이 많아지는 법이다.”
제르비아는 카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사건을 방조하자는 이야기였다.
분명 사건 전보다는 후에 범인을 잡는 것이 더 큰 인상을 줄 수 있기는 했다.
“잔에 묻힌 것이 독극물일 경우 3황자가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
“무슨 상관이지. 이제껏 작전 중 단 한 번도 민간인의 죽음을 방조한 적이 없었나?”
“…….”
“황족과 민간인이 가진 생명의 가치가 다르다는 얘기를 하진 않을 테지.”
카인의 이야기가 맞았다.
시계탑에서의 그날 이후, 매 작전에 임하는 태도는 더없이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했다.
거침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경우가 분명 존재했다.
신념의 관철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을 비롯한 자원을 더 많이 들였다면 구할 수도 있던 생명이었다.
‘나는 이미 내 이득을 위해 중요한 것들을 포기해 왔다. 이제 와 무얼 다르게 행동하려는 거지.’
제르비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카인은 눈짓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황실의 주치의를 가리켰다.
“…이해했다.”
제르비아는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잔 채우기를 마쳤다.
2황자가 선창을 하려던 때.
3황자가 잔을 살피더니 2황자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카인과 제르비아는 2황자의 입 모양을 읽었다.
「형님. 잔이 바뀐 것 같습니다.」
잔의 크기와 디자인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들 간에 사용이 정해진 잔이 있는 듯 보였다.
2황자 역시 잔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3황자와 잔을 바꾸었다.
카인은 시선을 돌려 범행을 저지른 직원을 보았다.
그는 한껏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을 위하여!”
2황자가 선창했다.
사람들이 열띤 목소리로 후창했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그들은 잔을 넘겼다.
“커헉!”
다음 일은 빠르게 발생했다.
2황자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자리에 쓰러졌다.
쨍!
잔이 바닥에 닿아 깨지며 유리 조각이 비산했다.
날카로운 비명이 무도회장을 울렸다.
“꺄아아악!”
카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혼란 속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헤치고 목표를 쫓았다.
“어딜 빠져나가려 하나.”
문으로 향하는 직원의 어깨를 잡아챘다.
카인의 손을 뿌리치려던 직원은 도리어 손목이 꺾여 단번에 제압당했다.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추후 수사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비대장과 빠르게 이야기를 마친 제르비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상황 판단이 늦어 우왕좌왕하던 이들의 움직임이 그 자리에 멈췄다.
“비키시오!”
무도회장 구석에 있던 주치의가 사람들을 헤치고 허겁지겁 앞으로 나섰다.
조수들이 뒤를 따랐다.
주치의는 2황자의 호흡과 맥박, 피부의 변색과 체온 변화를 살폈다.
“아피오톡신…!”
피부에 닿거나 점막에 미량 흡수되는 것만으로 장기에 큰 손상을 입히는 독극물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해독하지 않으면 절명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피오톡신이 어떤 독극물인지 아는 자들이 기겁하며 유리 파편에서 멀어지려 뒷걸음쳤다.
조수들은 이미 수백 종의 배합 재료가 담긴 키트를 꺼내 펼치고 있었다.
아피오톡신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종류에 맞는 약병을 꺼내 계량을 마치고 배합을 시작했다.
카인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피오톡신의 해독제는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비효율적이었다.
주요 배합재로 쓰이는 몇 종이 몹시 희귀하고, 또 여러 해독제에 쓰이기 때문이었다.
‘아피오톡신의 해독제를 미리 만들어 두는 순간 다른 독극물에는 대처하지 못하게 되겠지. 수급이 극히 어려운 재료가 들어가니.’
카인은 주위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압하고 있던 직원을 기사 출신으로 보이는 한 무리에게 밀쳤다.
“유력 용의자이니 잘 간수하시기 바랍니다.”
“……!”
무리는 당황했지만 카인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4명의 남자가 직원의 팔과 어깨를 붙잡아 구속했다.
카인은 품에서 주사기와 약병을 꺼냈다.
주사기에 약물을 주입하며 빠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곳에 사용하려던 생각은 아니었지만.’
헥사메디컬을 인수하며 창고의 약재 역시 모두 확보했다.
웬만한 종류의 약재는 소량이나마 비축했으며, 그 후에도 큰 자금을 들여 다양한 약재를 매입했다.
시장에서 극히 구하기 힘들거나 매물 자체가 없는 약재의 경우, 직접 오지에 인원을 보내 입수했다.
그 결과, 모든 종류가 같은 수량인 것은 아니나, 현존하는 모든 독극물에 대한 해독제를 제조해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었다.
본래 스스로나 아군을 위해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하면, 2황자에게 사용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이걸 쓰십시오.”
카인은 현장 앞으로 나가 주치의에게 약물이 주입된 주사기를 내밀었다.
“이건…!”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전문가답게 아피오톡신의 해독제임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사용하십시오. 제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간 황자님의 목숨을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치의는 주어진 정보를 빠르게 분석했다.
특유의 연노랑빛은 아피오톡신 해독제만이 낼 수 있는 색이다.
상대는 제약 회사의 대표.
희소성 높은 해독제 몇 종쯤은 상비해 둘 수도 있다.
주치의는 마지막 확신을 위해 물었다.
“아피오톡신의 해독제가 확실하오?”
“확실합니다.”
주치의는 주사기를 받아 2황자의 팔에 주입했다.
카인이 경련하는 황자의 몸을 붙잡아 주치의를 도왔고, 조수들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해독제 제조를 멈추지 않았다.
“크, 컥.”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눈을 돌리거나 입을 틀어막는 이도 있었다.
“…….”
카인은 동정의 시선으로 경련하는 2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실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모든 종류의 해독제를 갖춰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된 해독제가 아니라 배합 재료만이 갖춰졌다는 것은.’
황제가 해독제를 갖추는 일을 불필요한 비용 지출로 생각했다는 의미였다.
자신은 독 따위에 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타인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함.
그리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
심지어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식들이라 할지라도.
‘그러면서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원하지 않으니, 모순된 면이 있는 소유욕이라 할 수 있겠지.’
해독제의 효력이 돌며 경련은 빠르게 멎어갔다.
2황자의 신음이 멈추고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해독되었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주치의의 진단이 내려진 순간 장내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의와 조수들의 몸은 긴장하며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2황자는 치료와 안정을 위해 들것에 실려 황궁 내에 위치한 병실로 이동되었다.
들것을 따라 이동하기 전, 주치의는 카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뵈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카인과 악수를 나누고 조수들과 함께 무도회장에서 퇴장했다.
“수사를 진행해야 하니 아직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 풀어지려던 사람들의 긴장이 제르비아의 날 선 목소리에 다시 곤두세워졌다.
이미 주 용의자는 체포한 상태지만, 그 외에 조력자가 존재할 수 있었다.
CCTV를 돌리기 전에 몸을 수색하고 알리바이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제르비아가 경비대장과 함께 경비들을 움직여 조사를 시작하려던 때, 한 참가자가 외쳤다.
“어, 어떻게 딱 맞는 해독제를 가지고 있던 것이오!”
카인을 향한 말이었다.
“아까 용의자도 곧바로 붙잡지 않았소! 이미 다 알고 있던 것 아니오? 혹시 이 모든 게 연극인 건….”
그는 마지막 말은 스스로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입을 다물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어떻게든 공감을 구하려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슷한 생각을 품은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분위기에 쉽게 나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카인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모리터 케미컬의 장남이신 켈튼 모리터 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름이 불리자 남자는 움찔했다.
신분과 가문이 장내 모두에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의심을 할 때는 그만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해독제를 가지고 있던 것은 업무상의 이유와 관련이 있고, 직원을 붙잡은 것은 그가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조사가 끝나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밝혀지겠지요”
카인이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연극이라는 그 발언.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