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황궁 무도회 (3)
“저는 슬럼에서 고아로 태어났습니다.”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카인의 말을 이해한 사람들이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슬럼 출신이라고? 그럼 벽 바깥에서 태어났다는 얘기잖아.”
“소문이 사실이었어.”
분위기가 크게 술렁이고, 사람들의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드러났다.
충격과 경악.
급변한 상황이 주는 긴장과 흥분.
그리고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감.
카인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이들은 떨리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까지 우리가 속은 거야?”
“출신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으니 엄밀히 말하면 속인 건 아니죠.”
“어찌되었든 핏줄이….”
웅성거림은 멎을 생각을 안 했다.
기존의 태도가 어떻든, 카인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은 공통적인 속성을 띠었다.
「천한 핏줄 따위가.」
짙은 경멸과 멸시가 그것이었다.
슬럼 출신과 친교를 쌓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자신들의 모습에 큰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카인은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핏줄이라.’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출신 성분이 그 사람의 능력을 결정짓는다는 혈통우월주의.
아득.
말할 것도 없는 개소리.
사람은 모두 다 같은 존재다.
어떤 누구의 피가 특별해 더 고귀한 색을 띠기라도 한단 말인가.
환경에 따라, 능력을 꽃피울 기회를 가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귀족가와 슬럼가에서 태어난 두 아이가 동등한 출발선을 지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였다.
카인이 굳이 거짓을 말하지 않은 것은.
출신 성분이 존재 가치를 결정짓지 않는다.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그 신념은 꺾을 생각이 없었다.
“슬럼이라.”
황제는 슬럼이라는 단어를 몇 번 되뇌었다.
그러다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따라 웃어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아하하하.”
몇몇 참가자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커져가는 황제의 웃음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들은 따라서 웃음을 크게 키웠다.
“뭐가 그렇게들 웃긴가?”
황제가 웃음을 뚝 멈추고 말했다.
따라 웃던 이들도 웃음을 멈췄다.
단 한순간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반헤일, 말해 보게. 뭐가 그리 웃긴가?”
황제의 시선을 받은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게 폐하께서 웃으시기에….”
“내가 웃는다고 따라 웃다니, 자네는 줏대가 없나?”
반헤일은 몹시 당황했다.
기회 한 번 잡아보려다 괜히 황제의 눈 밖에 나게 생긴 상황이었다.
‘무, 무슨 대답을 해야….’
황제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스, 슬럼에서 태어났다 하여 웃었습니다. 요한 키리프의 명성에 전혀 걸맞지 않은 출신 성분이기에….”
황제는 반헤일을 쏘아보다 말했다.
“형편없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혈통주의니 뭐니 하는 말이 떠돈다고 듣긴 했네만.”
황제의 시선이 좌중을 향해 빙 돌았다.
그때마다 참가자들은 부리나케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하는데 그 사람의 혈통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오히려 부유한 환경 탓에 타성에 젖을 위험이 크지.”
황제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혈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일만큼 우매한 일도 없다는 얘기일세.”
반헤일을 포함해 황제를 따라 웃은 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이 다음 무도회에서 배제되리란 사실을, 자리의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황제는 다시 카인을 보며 말했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네. 나는 출신보다는 재능 그 자체나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네.”
“…….”
카인은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마주해 ‘진실의 눈’ 특성을 발동한다면, 그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날 거라고.
‘황제 역시 계급과 혈통을 중시한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단순한 악취미였다
자신을 따라 웃은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슬럼에서 태어난 이도 석화증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일 수 있겠나?”
이 역시 자신의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가 강했다.
“예비용 치료제를 늘 가지고 다니니, 이 자리에 환자만 있다면 증명 가능합니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군.”
황제의 귓속말을 받은 호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도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오래지 않아 죄수 둘이 경비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몸이 불편한 듯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앙상하게 드러난 뼈마디.
제대로 씻지 못해 기름진 머리.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까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 사람 데어 헤일리 아니야? 라티움 수석 연구원이었던.”
“연구 자료를 빼돌리다 적발되었다더니, 황궁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나 보군.”
경비들이 두 죄수의 어깨를 내리눌러 카인 앞에 무릎 꿇렸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의 미래에 큰 위해를 끼치려던 자들이네. 신께서도 분노한 탓인지 수감 중에 석화증이 발병했지. 불칸 회장에게 일으켰던 기적을 내게도 보여주게.”
“알겠습니다.”
카인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공간에서 약병과 주사기를 꺼내, 손을 다시 밖으로 빼었다.
“잠시 병세를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 하게.”
카인은 죄수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텅 빈 눈동자에선 어떤 삶의 의지도 욕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는 돌처럼 딱딱했다.
옅은 회색빛이 돌았으며, 특정 부위에 자극을 주어도 무조건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완벽한 석화증 증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론.
하지만 황제의 치밀한 성격에 대한 의심이, 카인으로 하여금 죄수들에게 묻게 만들었다.
“석화증에 걸린 것이 맞습니까.”
“…그렇소.”
“맞소.”
두 죄수와 마주한 카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진실의 눈’ 특성에 거짓이 감지된 탓이었다.
한 명은 거짓.
석화증 환자가 아님에도 석화증과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다리를 다시 한번 살폈다.
정신을 집중하자 아주 미약한 마나의 흔적이 감지되었다.
‘마법이군.’
석화증과 같은 효과를 보이는 마법이 죄수의 다리에 걸려 있었다.
기존 세계관 내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황제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마법이라 보아야 했다.
이 역시 시험이었다.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한 시험.
‘치료제 개발자와 마법사로서의 능력 둘 모두를 보겠다는 거겠지.’
반길만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2황녀 율리아의 마법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법 실력 역시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카인은 진료를 위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모두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치료제가 부족하다는 말인가?”
“아니오. 치료제는 충분합니다. 부족한 것은 환자입니다.”
“환자가 부족하다라.”
“한 명의 석화증 환자로 두 명의 완치자를 만들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탄성을 흘렸다.
“환자는 두 명이네. 눈앞에 있지 않나.”
“한 명입니다.”
“자신할 수 있나? 진단이 틀리면 내가 자네에게 벌을 내릴 수도 있네.”
그 순간 황제의 전신에서 무색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삽시간의 대기 중의 마나 농도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범위 안에 포함된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정도가 심한 이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제가 틀리다면 목을 치셔도 됩니다. 한 명은 석화증 환자가 맞지만, 다른 한 명은 마법에 걸려 있습니다.”
황제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카인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보게.”
“석화증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마법입니다. 마나의 흔적이 무(無)에 가깝고, 그 정교함은 가늠치 못할 정도니, 폐하께서 죄인을 단죄키 위해 직접 사용하신 마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카인은 이후 자신이 그러한 판단을 내린 몇 가지 근거를 덧붙였다.
설명을 듣는 동안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 끝에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군.”
마나 농도가 다시 낮아지며, 졸린 목이 풀린 것 같은 숨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황제는 경비들에게 손짓해 죄수들을 다시 감옥으로 데려가도록 지시했다.
“치료제를 시험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더 시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불칸 회장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아무 쓸모 없는 죄수들에게 귀한 치료제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카인은 약병과 주사기를 다시 품에 넣었다.
앞에서 황제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게. 잠시 허락하겠네.”
이번에는 곳곳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아무리 짧은 순간일지라도, 황제가 눈 마주침을 허용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황제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
카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형형한 빛을 발하는 백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영면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개발해볼 수 있겠나?”
“표본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석화증보다도 더 희귀한 병인지라.”
“4황자가 영면증을 앓고 있네. 왕진을 위해 황실에 주기적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횟수와 일시는 사람을 시켜 따로 전달하도록 하지.”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두 사람 모두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을 알고, 준비했던 대사를 뱉은 것처럼.
“나중에 식사 한번 같이하지.”
뒤돌아 2층 계단으로 향하던 황제가 고개를 반쯤 돌려 말했고, 카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황제는 사라졌다.
***
“요한님! 저와 잠시 대화를…!”
“저와 두 번째 곡에서 춤을 춰 주실 수 있을까요?”
황제가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카인에게 몰려들었다.
슬럼 출신이란 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상대가 황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란 점이었다.
때마침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달이 차는 11월의 밤.」
빠른 리듬과 높은음의 지속을 특징으로 하는, 무도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첫 곡이었다.
“연주가 시작되어 대화는 미뤄야 할 것 같군요.”
무도회의 첫 곡은 모두가 참여해, 파트너와 함께 추는 것이 관례.
카인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아가 제르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제르비아는 머뭇거리며 카인의 손을 잡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고, 자연스럽게 무도회장 중심으로 향하게 되었다.
제르비아는 정신이 없었다.
부관들에게 춤 특강을 받았지만, 단기간 내 모든 동작을 익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춤과 전투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검을 쓰며 단련해온 체력과 유연성은 생각만큼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조금 전 황제와 카인이 일으켰던 소란으로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황실에 출입하려는 목적이 뭘까.
또 슬럼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꾸밈없는 진실일까.
추리와 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았고, 결국 카인의 발을 밟아 크게 당황했다.
“미, 미안하다.”
“…….”
카인은 스텝을 제르비아에게 전적으로 맞춰주었다.
그러자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갔다.
한동안 춤에 집중하던 제르비아의 입술이 열렸다.
“슬럼 출신이라는 말은….”
“나라고 늘 거짓을 말하진 않는다.”
카인이 맞잡은 손을 뒤로 당기며 제르비아의 몸이 끌어 당겨졌다.
사이가 밀착되어 숨결이 가까웠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몰락한 귀족 출신이라는 설이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보여온 교양이나 화술 같은 것 모두 아주 어릴 적부터 학습해온 것이라고. 이제껏 조사해온 자료 역시 그 사실을 뒷받침했고 말이다.”
스텝을 밟으며 제르비아의 몸이 잠시 뒤로 크게 물러났다.
‘자료라.’
수사에 혼선을 주려 과거에 뿌렸던 거짓 문서들을 뜻할 터였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 술집에서 일을 했다. 벽 바깥으로 유흥을 나온 귀족들의 대화를 귀동냥했으니, 학습이라 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
“…….”
“난 가지고 태어난 게 없다. 굳이 찾자면 남들보다 조금 좋은 이해력 정도겠군.”
제르비아는 생각했다.
이해력이 조금 좋다고.
아무리 봐도 조금은 아닌 것 같은데.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뭐든 익히고, 배우고, 흡수하려 했지.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는 어린아이였고, 무언가 특출난 점이 있어야 쓰임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카인이 슬럼 출신이란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직접 사실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
그가 겪어왔을 고된 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카인 너는….”
“발을 밟았다.”
“앗. 미안하다.”
다음 동작에 맞춰 카인은 제르비아의 몸을 크게 돌렸다.
그녀는 하려던 말을 못 한 채 반강제로 회전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에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왔다.
‘……?’
그리고 풍경에서 도드라진 한 장면을 포착했다.
한 남자가 뷔페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눈치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