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61화 (161/227)

#161. 황궁 무도회 (2)

본궁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아마 카인의 대저택을 10개쯤 합쳐 놓으면 이런 넓이가 나오지 않을까.

아치형 천장엔 샹들리에가 줄지어 달려있고, 베이지색 대리석 바닥은 광채를 발했다.

두 쌍의 구두가 그 위를 지났다.

한 사람 것은 조금 다급해 보이고, 나머지 한 사람의 것은 움직임에 여유가 있었다.

“급할 것 없다. 무도회 시작은 아직이다.”

“그래도 우리가 제일 늦어서….”

제르비아가 먼저 무도회장 문 앞에 도착하고, 그 다음 카인이 도착했다.

“자비르 칼타 님. 요한 키리프 님.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궁정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자, 문 양옆에 서 있던 경비들이 힘차게 문을 밀었다.

끼기기기─

“자비르 칼타 님과 요한 키리프 님이 입장 하십니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그 틈으로 천천히 내부 풍경이 보였다.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있는 넓은 공간 주위로는 원형 테이블과 이동식 뷔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벽 양쪽 끝에 2층으로 향하는 곡선 계단.

중앙이 트여 위층과 아래층이 서로를 볼 수 있는 구조.

‘저곳이 황제가 나타날 자리겠지.’

무도회장을 향해 둥글게 튀어나와 있는 2층 난간의 한 부분을 보고 카인은 생각했다.

“…….”

무도회장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무도회장에서 가장 빛날 한 쌍이 누구일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탓이었다.

빈 테이블은 안쪽이었다.

카인이 시선을 앞으로 한 채 제르비아에게 팔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카인의 팔꿈치 안쪽을 잡았다.

또각― 또각―

두 사람이 테이블 안쪽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카인과 제르비아가 테이블에 앉은 후에야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동시에 숨을 쉬었다.

“요한 키리프죠? 참석한다는 소문이 역시 사실이었네요.”

“서로 파트너로 올 줄은 몰랐는데, 오랜 친구라는 소문도 사실일까요?”

“그런데 두 사람 다 미모가 정말 ….”

“아름답죠.”

여러 방향에서 수군거림이 들렸다.

다른 때와 달리 다가가 말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카인과 제르비아.

두 사람의 분위기가 합쳐져 접근하기 힘든 고고함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드레스. 적이 들이닥쳤을 때 제대로 싸울 수 없을 텐데.”

“왜 무도회에서 싸울 생각부터 하고 있지.”

물론 두 사람의 현재 대화는 고고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카인은 주변 인물을 돌아보았다.

초청 명단은 100명.

파트너를 합하면 200명.

거기에 사용인들의 숫자까지 합한다면.

그리 적은 인원은 아니나, 무도회장이 넓어 실내가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는 이들이 있나?”

카인의 물음에 제르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재벌가의 후계와 각 분야에서 이름난 젊은 유망주들.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본 몇몇이 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나머지 전부는 간단한 안면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분위기가 풀어지면 네게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걸려 애를 쓸 거다. 미래의 경찰청장으로 손꼽히고 있는 인물이 너니까.”

그건 카인 너도 마찬가지겠지.

제르비아는 생각했다.

그와 자신의 차이점이라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능력 아닐까.

‘짧게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불특정다수와 장시간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정치나 문화, 예술과 마법과 같은 전문 분야에서 시시콜콜한 가십까지, 쉼 없이 대화 주제를 넘나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대저택.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물 흐르듯 대화를 이어나가던 카인.

그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 화술은 분명 타고난 것이겠지.’

그때 벽 중앙에 있는 괘종시계가 정시를 알렸다.

뎅─ 뎅─

2층에 연결된 복도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도회 참석 경험이 있는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것을 본 다른 이들도 상황을 깨닫고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카인과 제르비아 역시 그들의 동작을 따랐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무도회장.

엄숙한 분위기 속.

발소리는 2층 난간에 마련된 단 앞에서 멈춰 섰다.

“모두 바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참석해 줘서 고맙소.”

묵직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

그 주인이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대마법사의 호칭이 허락된 자이자.

제국의 명실상부한 주인.

황제. 카이드릭 프나함.

“여기 모인 여러분은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주역들이오. 각 분야에서 저 하늘의 별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지.”

황제의 연설 때 고개를 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평상시 멀리서 응시하는 것은 가능하나, 직접 대화를 나눌 땐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

같은 황족, 혹은 황제에게 직접 허가 받은 극소수가 아니고서는.

그것이 황제가 지닌 위엄과 권력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였다.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 그대들을 치하하는 의미로 이 자리를 마련했소. 각자 맡은 과업의 피로를 잊고 활력을 충전해 가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오!”

황제의 개회사는 짧고 간결했다.

마지막 말과 함께 테이블에 마련된 수백 개의 와인 잔이 일제히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 각 참가자의 가슴 앞에 멈춰 섰다.

펑!

이어서 떠오른 수십 개의 와인 병이 코르크를 스스로 축포처럼 발사했다.

곧이어 참가자 사이를 지나며 빠짐없이 잔을 채웠다.

“와…!”

“이게 폐하의 마법….”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카인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염동이군.’

다루는 사물의 종류, 무게, 거리, 숫자, 그리고 세밀한 움직임.

그것들을 고려하면 황제의 마법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예정된 미래였다면 주인공 라크센이 황제와 최종 결전을 벌였겠지.’

주인공을 제외하고 성장 한계가 처음부터 열려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이야기 후반부,

황제의 마나는 6만 대에 달한다.

마나 회로의 레벨은 5단계이며 손짓 한 번으로 산과 땅을 가른다.

지금 당장도 라이티노와 같은 강자조차 비교되지 않을 괴물일 것이다.

황제의 마나는 지금도 회로 레벨 4의 기준인 12,500을 아득히 넘어섰을 테니까.

“모두 고개를 들어도 좋소. 선창하겠소.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황제가 자신의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참가자들이 고개를 들고 황제의 동작을 따르며 외쳤다.

“번영을 위하여!”

이백 잔의 와인이 일제히 목 뒤로 넘어갔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그렇게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

제르비아는 카인이 건넨 알코올 분해제를 얼른 삼켰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취기가 곧 가시며 몸 상태가 괜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카인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댄 브라운. 디퍼링 마인의 채광 기술은 우리 제국의 자랑이지.”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제는 두 명의 호위와 함께 무도회장을 돌며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들기 위해 일부러 황제의 이동 경로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는 척하는 이들도 보였다.

카인은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종합해온 정보상 예언자는 황자 중 하나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황제가 예언자였다면 라크센을 죽이기 위해 더 확실하되 흔적이 남지 않는 수를 썼을 것이다.

굳이 몰래 수인 용병을 고용하면서 암살을 사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또한 카인은 황제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석화증 치료제의 개발자란 소문은 황제도 들었을 터.

4황자가 앓고 있는 영면증 치료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생각할 테니까.

대신 카인은 한 자리에 머물며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 자들을 물색했다.

여러 분야의 사업에서 미술이나 음악 따위의 예체능까지.

각 계통 최고 인재들이니,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두면 미래에 언제고 이용할 기회가 있을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요한 키리프 님이시군요. 워낙 화제의 중심에 계신 분이라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말쑥한 인상의 한 사내가 카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카인이 악수를 받아주자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필두로 다른 참가자들도 대화 기회를 잡기 위해 잔을 들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자비르 총경 님. 카스라르고 클럽에서의 무용담은 잘 들었답니다. 저희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이렇게 꾸미신 모습은 처음 봤는데 너무 아름다우세요. 드레스는 어느 디자이너의 작품일까요?”

고개를 돌리자 제르비아는 이미 한 무리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납치 비슷한 형태로 멀어지고 있었다.

도움을 바라는 제르비아의 눈빛.

카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건투를 빌었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마탑 원소학과의 학과장을 맡고 있는 스테판 펠트라고 합니다.”

처음 말을 걸었던 사내가 명함을 내밀었다.

“요한 키리프입니다. 헥사메디컬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카인 역시 명함을 건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명함을 든 손이 날아들었다.

“테트라셀의 부사장 로베 우젠버그입니다.”

“국립 미술관 제로티카의 관장을 맡고 있는 비탈 라세르다입니다.”

빠른 속도로 명함 교환이 이뤄지고, 와인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첫 화두는 단연 ‘요한’에 관한 것이었다.

석화증 치료제의 개발 과정.

클럽 카스라르고 사건.

대저택의 파티와 앞으로의 계획.

그 후 대화 주제는 정치나 예술을 막론한 여러 분야로 건너뛰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군요. 조금 감탄했습니다.”

“헥사메디컬 본사가 벽 바깥에 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요한님의 의견을 들으니 안과 밖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화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빠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이 모두 빠지고 자리엔 잠시 요한과 스테판만이 남았다.

“겨울학기부터 마탑에도 부임한다고 들었습니다.”

“라이티노 님이 편의를 봐주신 덕에 분에 넘치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요.”

스테판이 손사래를 치며 반응했다.

“분에 넘치다니요. 요한님의 마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미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신 만큼 검증이 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라이티노 님이 기분에 따라 행동하시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 자리에 아무나 앉힐 분도 아니시고요.”

스테판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카인과 거리를 좁히며 속삭였다.

“저야 그렇지 않지만, 사실 요한님의 부임을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테판이 은밀한 눈짓으로 가리킨 곳엔 뷔페 테이블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남자가 있었다.

“다른 학과의 학과장들입니다. 마법 실력이 뒷받침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이니 조심하셔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력한 자기 어필이었다.

나는 너의 편이다라는.

상황을 살피고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상대에게 붙는 것은 어디를 가든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곳이 무도회장이든.

잠시 갇혔던 교도소에서든.

조직 생활 당시의 뒷골목에서든.

“잔이 비었습니다.”

카인은 그의 ‘처세’를 인지했다는 뜻으로 스테판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요한 키리프인가.”

황제의 목소리.

카인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자네 이름은 많이 들었네. 요즘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어서 내 집무실까지 들려오더군.”

“부족한 이의 이름을 귀히 기억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주변이 조용해진 것이 느껴졌다.

모두 자신과 황제의 대화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리라.

분명 비슷한 신장임에도, 마치 상대를 꾹꾹 내리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군.’

딱히 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대하는 강적에,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소문도 종류가 다양하더군. 한 사람이 단시간 내에 이뤘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

“궁금한 것 하나 물어도 되겠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폐하.”

“자네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

카인은 황제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신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이 모두 긍정적인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출신 성분에 관한 것.

몰락한 귀족의 후예.

혹은 벽 바깥의 천한 신분.

황제 역시 소문을 들었고, 그에 관해 직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황제다웠다.

그가 사람을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당황감을 불러일으켜, 가식과 겉치레가 벗겨진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과연.’

피가 끓는다.

도전과 반항 욕구가 차오른다.

하지만 섣불리 대답을 뱉을 생각은 없다.

몰락한 귀족 가문.

만일을 대비해 적절한 자료와 증거까지 위조해 놓았기에 거짓을 말한다 해도 들킬 염려는 없다.

앞으로의 활동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변수를 고려한다면.’

카인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슬럼에서 고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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