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황궁 무도회 (1)
반군 세력, 레지스탕스.
그들의 목적은 가난의 철폐.
벽을 무너트려 부의 재분배를 시행하는 것.
조직에서 활동하던 당시, 카인은 암암리에 레지스탕스를 지원해 왔다.
‘최종 목표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었지.’
WB-004.
과거 조직에서 활동했던 당시,
폭탄 전문가인 부하에게 지시해 개발을 마쳤던 물건이었다.
그 후엔 대량 생산을 통해 레지스탕스에 공급을 했었고.
특정 의도 하에 암시장에도 물량을 풀어, 벽이 존재하는 30번대 구역 외에 다른 구역에서도 사용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구조를 알고 있기에 해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솜씨가 제법이군. 인상적이었네.”
“아닙니다. 혹시 청장님께서는 어떤 계획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 것 없네. 폭탄을 저 위로 던져버리려고 했지.”
청장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인이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훌륭한 방법입니다.”
제르비아는 조금 황망한 시선으로 청장과 카인을 바라보았다.
감정 동요 없는 기계 같은 인간들.
상황이 발생하는 동안 잔뜩 긴장한 자신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 차례 고개를 가로젓고 바닥에 쓰러진 테러범에게 시선을 옮겼다.
몸이 쉼 없이 움찔거렸다.
출혈이 심해 가만히 놔두면 쇼크로 사망할 터였다.
‘죗값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혈을 하고 의사와 사제를 불러 치료해 주세요. 내통한 이들이 누군지 심문을 해야 하니까요.”
진정 죗값을 치러야 할 이들은, 경찰이란 가면 뒤에 숨어 세상을 좀먹는 이들이었다.
* * *
표창식 중 일어난 테러는 일단락되었다.
발 빠른 기자들이 소식을 퍼 나르며 ‘자비르’와 ‘요한’의 이름은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오후의 청장실.
“나쁘지는 않은 대처였네.”
청장은 책상에 앉아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집무를 보며, 그 앞에 서 있는 제르비아를 향해 말했다.
“요구 조건을 들어줘도 상대가 약속을 지키리란 보장이 없지. 오히려 더 큰 요구를 해 왔을 수도 있으니, 잘했네.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제르비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청찬의 칭찬.
하지만 역시 썩 기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제게 권한을 주셨으니,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치안국의 편제 개편에 들어가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하게. 슬슬 고여 있던 물은 뺄 때가 되었지.”
“감사합니다.”
제르비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이고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그때 청장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다.
“잠깐, 이걸 받고 가지.”
제르비아는 몸을 돌렸다.
청장이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고 있었다. 다가가 받았다.
“이건…?”
고급스러운 봉투 위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폐하께서 직접 전해 달라고 하셨네. 자네를 눈여겨보시는 모양이더군.”
내용물이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눈에 든 젊은 인재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무도회.
황실에 진입해 사교를 다지고,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출세의 장.
“참석할 것이라고 믿네.”
“…….”
순간 갈등했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황실로의 진출.
앞으로 청장에 올라 경찰 조직을 바꾸겠다는 목표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또한, 초대장은 일종의 명령인 셈.
제국 내 감히 누가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물론입니다.”
* * *
제르비아가 초대장을 받았다는 소식은 사교계에 순식간에 퍼졌다.
“사실 이제야 받으신 게 이상할 정도죠.”
“지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 중에 하나잖아요?”
아마 황실에서 어떻게든 소문이 새어 나오지 않았을까.
「카스라르고 사건으로 탈락한 기존 참가자들.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소식이 빠르게 퍼진 것은, 위와 같은 화두로 이미 사람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던 탓이기도 했다.
덕분에 제르비아는 참석하는 자리마다 곤욕을 치러야 했다.
“로우 매니지의 페트리입니다. 이렇게 경찰청과 협약을 맺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 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를 정하지 않으셨다면….”
“자비르 경위, 아니 총경님. 저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신다면….”
반복되는 추파.
그녀는 조용히 검을 뽑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사실 전에도 제르비아를 눈여겨보던 남성들은 많았다.
단지 그녀의 매섭고 냉랭한 이미지 때문에 쉽게 접근해 오지 못했을 뿐.
하지만 ‘무도회 참석’이란 기회가 생기며,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그만큼 ‘무도회’는 인맥을 넓히고 앞으로의 출세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시간은 흘렀다.
이제 무도회까지는 3일.
파트너를 아직 정하지 못한 그녀는 슬슬 초조해지고 있었다.
‘파트너가 있어야 입장 자체가 가능하다고.’
파트너는 반드시 필요했다.
무도회에 참석해 춤은 다른 사람과 출지언정.
“국장님. 치안 1팀에서 올라온 서류입니다.”
“알겠습니다. 처리 후 통보하겠습니다.”
치안국장의 업무를 인계받느라 시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파트너를 선정하지 못했다는 말은 핑계였다.
와르르―
“그리고 치안국에 국장님 앞으로 도착한 서신들입니다.”
“…알겠습니다.”
무수한 파트너 요청.
내용은 읽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와르르-
“여기 더 있습니다.”
“…….”
와르르-
“여기 더.”
“아니, 잠깐.”
그녀가 어디에 있든 정·재계의 젊은 남성들에게서 서신이 날아들었으니까.
타닥. 타닥.
업무가 끝난 한밤중.
그녀는 편지를 뜯어 읽으며 하나씩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다 겉만 번드르르한 인간들뿐이야.’
편지 중엔 다른 자리에서 얼굴은 본 적 있는 인물들도 있었지만, 마음에 차는 이는 없었다.
재산이나 정치적 영향력.
그런 것을 뛰어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끌리는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혼자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으니 가능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과제를 다 끝내지 못한 채, 다가오는 개학을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
서신 봉투를 넘기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끌리는 이.
‘말도 안 되지.’
그녀는 곧장 제 생각을 부정했다.
하지만 한 번 피어난 생각은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려 사라질 생각을 않았다.
최소한 이런 허례허식 가득한 빈 껍데기들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 전에 녀석이 제안을 수락한다는 보장은 있는가?
길고 긴 갈등과 자기 합리화 끝에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 찾아가야 할 곳이 생겼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무도회 참석을 위해 상대를 일종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 * *
“그렇게 하지.”
카인의 대답이 이리 곧바로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제르비아의 가슴에 옅은 당황이 번졌다.
“내 설명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이틀 뒤.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 그곳에 파트너로 참석해 달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카인이 벽 안쪽에서 활동하는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일단 재계와 사교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판단한 것이 아닐까.
‘일단 승낙을 받았으니 마음은 놓을 수 있겠어. 그런데….’
제르비아의 시선이 카인의 등 뒤를 향했다.
흑금발의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정확히는 노려보고 있었다.
옅게나마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달리,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에스텔 사제.’
용모는 전과 다르지만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에겐 그 사람만이 풍기는 고유의 ‘느낌’이란 것이 존재했다.
‘왜 나를 노려보는 거지. 납골당에서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은 건가.’
에스텔 사제가 카인과 함께 다니는 이유 역시 아직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 왔기에 상대의 적의나 살기는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장에서 느껴오던 적의와는 다르다. 호승심? 아냐, 이건 대체….’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 에스텔이 입을 열었다.
“춤은 출 줄 알아요?”
떨떠름한 기색으로, 일단 대답했다.
“기사학교 생도 시절 검무를 연습한 적은 있습니다.”
“연습하셔야겠네요.”
그 후 에스텔은 말이 없었다.
삐딱한 자세로 벽에 몸을 기댄 채, 제르비아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날짜와 시간은 확인했다. 그럼 그때 황궁의 본궁 앞에서 보는 걸로 하지.”
영문을 모르고 과녁이 된 제르비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카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뭇잎이 떨어지는 늦가을.
황궁의 수목은 여전히 울긋불긋 다채로운 잎사귀를 자랑했다.
전문 정원사들의 마법으로 그 계절만의 색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가을.」
황실 사람들이 가을의 황궁 풍경을 이르는 말이었다.
부아아─
흐드러진 가지와 잎사귀가 만든 아치 아래.
여러 가문의 인장을 단 고급 차량이 입장했다.
차량은 모두 본궁 앞에 위치한 주차 공간에 멈췄다.
내린 사람들은 남녀 한 쌍으로 짝을 지어 본궁 입구로 향하는 긴 계단을 올랐다.
“프리지아 님은 못 본 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셸포드 가문의 차남 벨링 셸포드라고 합니다.”
계단을 오를수록 사람들의 감정도 고조되었다.
첫 참가자들의 경우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떨림.
참가 경험이 있는 이들은 이번 역시 초대받았다는 자부심.
그들의 일렁이는 감정과 함께 하늘은 주홍빛 노을로 물들었다.
연미복과 드레스가 모래알을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잠시만요. 저기….”
계단을 모두 오른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입구 앞.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지 알아요. 요한 키리프예요.”
“역시 초대받았나 보네요. 폐하도 궁금하신 거겠죠. 그런데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 본데요?”
사람들은 남자의 외모에 감탄하며, 그의 곁을 지나쳐 본궁 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카인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50분.
무도회 시작까진 10분의 여유 시간이 있었지만, 이미 모든 이가 입장을 마친 상태였다.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만큼, 구태여 정시에 도착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때 차량 한 대가 도착했다.
급하게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나타났다.
제르비아였다.
기존에 허리까지 내려오던 푸른 머리는 위로 꽉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머리와 색을 맞춘 사파이어 빛 드레스는 밤하늘과 은하수를 함께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 평소 안 하던 귀걸이까지.
그녀 본인은 꾸미는 데에 재능이 없으니, 아마 비서관들의 작품이리라.
“늦어서─.”
그녀는 무어라 소리치며 계단을 향해 뛰어왔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탓인지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탓.
결국 계단 중간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넘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그때.
부웅─.
등 뒤에서 일은 바람이 쿠션 역할을 해 그녀의 자세를 부드럽게 바로잡았다.
“…….”
익숙한 느낌.
익숙한 장면.
묘한 안정감.
제르비아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위를 올려다보았다.
카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 계단 높은 곳에 멈춰 섰다.
“늦어서 미안하─.”
“계단이 가파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예상과 달리 질책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잡고 올라오라고 내민 손이 보였다.
“…….”
제르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카인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조금 멍했다.
카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손을 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두 남녀는 계단을 올라 본궁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