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57화 (157/227)

#157. 멋진 신세계 (1)

타각.

드넓은 회랑.

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순백.

그 외의 색은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회랑이었다.

이어진 기둥엔 역대 황족 구성원의 초상화가 끝없이 붙어 있었다.

타각. 타각.

마치 제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풍경.

일반적인 방문객이라면 그 앞에서 압도감을 느끼거나 감탄을 터트렸을 터.

하지만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감상 따위에 젖어 있을 틈이 없었다.

회랑 끝에 위치한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한 인물에 관한 생각 때문에.

타각.

남자의 발이 문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꺾어야 끝을 올려다볼 수 있는, 높고도 거대한 문.

드드드─

문은 남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절로 열렸다.

방은 회랑과 같은 순백.

그 눈부심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드드드─

남자의 몸이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문은 다시 저절로 닫혔다.

방이 광활한 탓에 책장과 탁상 따위의 집기는 띄엄띄엄 배치된 인상을 주었다.

삭막하고 사무적인 분위기.

하지만 텅 비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방 한가운데.

책상에 있는 한 사내가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책상에 앉아 있는 존재가 말했다.

“제라트.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

이름이 불린 사내.

청장은 책상과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제국의 영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청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이 있는 곳의 바닥이 다른 곳보다 높아 자연스레 눈높이 차가 형성되었다.

고개를 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쌓인 서류에 서명해 나가는 황제의 손.

‘집무로 바쁘신 것은 여전하군.’

시선을 더 위로 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황제를 직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같은 황족뿐이었다.

“라이오넬이 조금 전 다녀갔네. 신상을 무너트린 흑마법사를 아직 잡지 못했다고 하더군.”

라이오넬은 교황의 이름이었다.

“뭐 짚이는 것 없나?”

황제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청장의 귀에 쿵 내려앉았다.

“…….”

질식할 것만 같은 위압감.

사방의 공기가 전신을 옥죄는 감각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황제가 실내의 마나를 요동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황제는 물론 블루서펜트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당황할 건 없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카인에 대한 보고를 올린 적이 없으니까.

즉.

황실과 교단은 여신상을 무너트려 마나 탱크를 소실시킨 흑마법사가 ‘카인’임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카인에 대한 보고가 올라갈 일은 없겠지.’

계속해 폭등하는 헥사메디컬의 주식을 주기적으로 양도 받고 있는 상황.

이토록 매력적인 수입원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욱이 황제는 이쪽을 신뢰한다.

동요하지 않으면 문제 될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짚이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문지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이 일어나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예상대로 실내의 마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호흡이 다시 편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 짐승의 이름이 라이카라고 했나. 자네 지시를 수행하다 얼마 전 목숨을 잃었다고.”

“예. 맞습니다.”

“꽤 쓸만한 놈이라 들었는데. 숲의 환상을 조건으로 문지기를 수락했다지.”

“자신이 무엇을 지키는지 정확히 알진 못했을 겁니다. 머리가 꽤 똑똑해, 추측은 여럿 했겠지만 말입니다.”

황제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말로 유감이군. 방주에 탔다면 신세계에 도착해 진짜 숲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수인은 태우지 않는다는 방침 아니었습니까?”

“농담일세.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펜 소리가 사각사각 울리고,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신상을 다시 세울 생각이네.”

“…다시 말입니까?”

“라티움에 전달해 두었네. 마나 송수신 설비를 다시 준비해 두라고 말이야.”

“이미 황실 지하에 방주와 마법을 가동하기에 충분한 마나가 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마나를 더 축적할 필요는….”

“방주의 탑승 인원을 늘릴 생각일세.”

“…….”

청장은 황궁 지하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배를 떠올렸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배였다.

마나로 움직이고, 하늘을 날기는 하지만.

‘방주에 승선할 인원은 이미 대부분 내정되어 있을 텐데.’

신세계에서의 높은 계급을 약속받기 위해 황제에게 천문학적인 양의 금품을 내다 바친 귀족과 정·재계의 인사들.

승선 목록은 거의 확정 되었다.

그 안에서 순위를 바꾸기 위해 계속 ‘헌금’을 내며 치열하게 경쟁을 하던 중이었다.

한데 탑승 인원을 늘리겠다니.

청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까닭으로 생각을 바꾸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 건 아닐세. 신세계에 젊은 인재가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우리 같이 나이 든 자들을 위해 일을 할 인재 말일세.”

“…….”

“그래서 마나를 더 모을 생각일세. 적어도 앞으로 1년 정도는.”

“이해했습니다.”

청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말에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손가락 하나로 이쪽을 아무렇지 않게 눌러 죽일 수 있는 존재이며, 신세계 프로젝트에 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조금의 변덕 정도야 계획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청장의 최우선 목표는 신세계에서 현재와 같이 높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

이미 지배 계급을 약속받았다.

새로운 탑승객들과는 그 격차가 단번에 좁혀질 일이 없다.

‘장단을 조금 맞춰 드리도록 하지.’

남은 1년간 할 일.

지금까지와 다르진 않다.

다만 시간 여유가 생긴 걸 안 뒷순위 주자들이 경주에 박차를 가할 터.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이쪽도 속도를 낼 필요는 있었다.

‘카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이 더욱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말일세. 황궁 밖이 꽤나 소란스럽더군.”

황제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자비르 칼타. 이름이 계속 들려와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17번 구역의 마약 범죄를 뿌리 뽑았다고 하던데.”

청장은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임을 직감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아이입니다.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직위 해제나 근신 같은 처벌을 내리면….”

딱히 딸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안위뿐이니.

청장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하며, 황제가 말을 꺼낸 의도를 가늠했다.

벽 안쪽에서 일어나는 범죄.

황제는 큰 관심이 없다.

방치할 이유가 없지만,

동시에 근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지금까지 그래 왔고, 신세계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순간까지 앞으로도 쭉 그럴 터였다.

「벽 안쪽에서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청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때문에 카인이 클럽 카스라르고를 급습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벽 안쪽에서의 활동.

천한 신분 때 채우지 못한 욕구를 현재에 보상받으려는 것이리라 생각했으니까.

「자비르 경위의 시선을 바마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효과도 있겠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마가 죽는 순간 제르비아의 검 끝은 다시 카인을 향할 테니, 그것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나름의 유희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게.」

그래서 허락했다.

자신은 신경 쓰지 않겠노라고.

어차피 카인이 벽 안쪽에서 누리는 신분도, 경찰이란 조직도 방주가 가동되는 순간 아무 쓸모가 없어지니.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앞에서 황제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벌이라니, 그 반대이지. 옳은 일을 했으니 포상을 내려야 하는 일 아니겠나? 남들이 쉬쉬하는 일을 솔선수범하여 처리했으니 말일세.”

“포상 말입니까.”

“키워 보게. 신세계에 데려갈 재목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포상.

진급과 그에 따른 권한 부여.

뭐,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쪽에 피해를 주는 일만 없다면.

“그리고 이름 하나가 더 들려오더군. 요한 키리프, 들어본 적 있나?”

제르비아의 이름이 나왔다면 그다음으로 당연히 언급될 이름이었다.

「이번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헥사메디컬의 대표 요한 키리프 덕입니다.」

제르비아의 발언.

또한, 석화증 치료제의 개발자와 대저택 소유주로 그간 보여 온 행보.

현재 벽 안쪽에서 소문이 가장 뜨거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그였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

요한의 정체는 카인.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나름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만, 워낙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이라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많더군. 마탑의 장로에 버금가는 마법사니, 몰락한 귀족의 후예니.”

다시 정적.

사각거리는 펜 소리.

황제가 말을 이었다.

“아예 근거 없는 소문들이라 생각하진 않네. 소문이 그만큼 퍼졌다면 어느 정도 밑바탕은 있다는 이야기지.”

“불칸 회장의 석화증이 완치된 건 사실 같더군요.”

“그래. 나도 그 소문에 가장 주목했지.”

“‘인재’로 생각 중이신 겁니까?”

“나는 직접 본 것이 아니면 잘 믿지 않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청장은 황제의 다음 말을 알 것 같았다.

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긴 시간을 함께한 친우이자 신하로서.

“자비르 경위의 이름은 전부터 몇 번이고 들려왔네. 성능이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는 뜻이지.”

“반면 요한이라는 인물은 한 번 불타오르고 꺼질 불씨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정확하네. 그러니 자네가 조사를 계속하고 지켜보게.”

“알겠습니다.”

드드드─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황제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집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청장은 고개를 깊이 조아리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드드드─

회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을 품은 채.

* * *

13번 구역.

카인의 대저택.

굳게 닫힌 정문 근처엔 각 신문사의 로고를 부착한 차량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인터뷰 따내기가 황제보다 더 힘든 거 아닙니까?”

“말조심해. 황제가 아니라 황제 폐하. 괜히 누가 들었다가 책 잡힐 일 만들지 마. 일단 인터뷰 따기가 힘들다는 말에 공감하긴 하지만.”

퀭한 눈을 한 기자들이 근처 카페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불평을 뱉었다.

“낮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저택을 드나들던데, 이 사람 잠을 자기는 하는 겁니까?”

“사람이 아니라 흡혈귀란 얘기도 있던데.”

“진짜일지도 몰라요. 그 새하얀 피부랑 이지적인 외모를 생각하면.”

저택 주인 요한의 행보는 파악하기 어렵기로 유명했다.

그가 13번 구역에 대저택을 구매하며 이름을 알린 첫 순간부터.

각종 화제로 사람들의 입에 쉼 없이 오르내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연일 저택에 파티를 열고, 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으며, 저택을 비운 시간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고요. 이렇게 궁금하게만 해 놓고 입을 꾹 다무는 게 어디 있어.”

인터뷰 요청을 받으면 말없이 사람을 홀리는 미소만 짓고는 차를 타고 빠르게 사라지는 만행을 선보였다.

저택의 파티에도 참여해 봤지만, 궁금한 소문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불만이면 나타났을 때 뭐라고 좀 쏘아붙여 보던가.”

“아, 아뇨 그건 좀.”

“선배 그 사람이랑 똑바로 눈 마주쳐본 적 없죠?”

“입은 웃는데 눈은 안 웃어요. 사람 속을 다 들여보는 것 같아서 오금이 저린다니까요.”

가만히 서 있어도 풍기는 아우라.

요한이란 인물이 자신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상대임은 일찍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저 어쩌다 그가 기분이 좋아 정보를 흘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특종을 바라며 요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끼익─

정문 앞에 경찰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제복 경찰이 내리더니 정문 옆에 부착된 마법 렌즈에 경찰 신분증을 내보였다.

철컥.

그리고 다시 차에 탑승해, 넋을 잃은 기자들을 뒤로하고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요한 그 사람 뭐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일순 찾아온 당혹감.

하지만 툭 던져진 한마디 덕에 오래가진 않았다.

“자비르 경위가 말했었잖아요. 작전 수행에 요한 키리프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순간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었다.

경찰이 왜 요한의 저택에 찾아왔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