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황궁 (2)
율리아는 멍했다.
카인의 얼굴이 멀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겠다고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장본인은 태연했다.
“예. 제가 황녀님을 자유롭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더없이 진지한 어투에 율리아는 카인이 농을 하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남자는 대체 뭘까.
무슨 자신감으로 뱉은 말일까.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가 이런 감옥 같은 곳에 평생 갇혀 있었을 리가 없잖아.’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불가능해요.”
“가능합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카인의 단호함에 율리아는 답답함을 느꼈다.
“난 마법을 쓸 줄 몰라요. 하지만 분명 알고 있죠. 마법이 만능은 아니란 사실을. 들어올 때는 어찌어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나갈 때는 달라요.”
율리아가 갑자기 어깨를 내렸다.
새하얀 살결엔 태양을 형상화한 황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폐하는 내 위치를 다 알아요. 황궁 안이라면 그 어디에 있든. 일정 반경을 벗어나면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고요.”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표식이군요.”
“맞아요. 아주 어릴 때 폐하가 새겨 놓았죠. 나 말고 오빠들도 표식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카인은 황제의 일그러진 소유욕을 상기했다.
‘분명 자식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없다. 황위를 이을 만큼 두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관심조차 주지 않으니.’
하지만 자식들 역시 ‘소유물.’
늘 자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정문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해요. 거길 지나가는 순간 경보가 울릴 테니까요. 그렇다고 외벽을 부수고 저를 데리고 나가기라도 할 건가요? 주변의 모든 마나를 차단하는 요새와 같은 벽을? 차라리 나처럼 폭약을 만든다는 쪽이 설득력이 높을 거예요.”
카인의 손이 율리아의 옷을 올려 다시 어깨를 가렸다.
황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중죄이지만, 두 사람 누구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탈출 방향은 벽이나 정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황녀님을 데리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황녀님은 홀로 황궁을 벗어나실 겁니다.”
“뭐라고요?”
황녀를 데리고 정문을 돌파하는 방법도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크다.’
때문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조력’ 수준에 불과했다.
황녀와 계약을 맺어 이득을 볼 수 있다 한들, 손해가 크면 맺지 않느니만 못하니까.
“제가 황녀님께 그럴 수 있는 힘을 드리겠습니다.”
허공에 뻗은 카인의 손끝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영롱히 피어났다.
순간 넋을 잃었던 율리아가 정신을 바로 잡고 말했다.
“내게 마법을 가르치겠단 건가요?”
“맞습니다. 황궁 지하에는 외벽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습니다. 황족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입장할 수 있으며 통과하기 위해선 적절한 ‘실력’이 필요합니다.”
통로?
이 남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통로라고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황궁 지하에 내려가 본 적이 있는 건가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당신 같으면 갑자기 불쑥 나타난 상대의 말을 믿겠어요?”
“믿음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선택은 황녀님의 몫입니다.”
율리아는 혼란 속에 고민했다.
‘상황만 놓고 보았을 땐 믿지 않는 것이 옳아. 객관적으로.’
하지만 직감은 반대였다.
눈앞의 남자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수많은 암투 속에 생존하며 벼려진 ‘촉’이었으며, 그건 대체로 자신을 옳은 상황으로 이끌었다.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 사람의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적어도 정문이나 벽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 있는 방법이 될 터였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고 쳐요. 하지만 난 마법에 재능이 없어요. 황궁의 모든 마법사가 포기했는걸요.”
마법을 익힐 수 있다면 진작 그러했을 것이다.
황궁을 나가는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바깥에서 펼칠 여행자로서의 삶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저를 다른 평범한 마법사들과 같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분명 실력은 뛰어나시겠죠. 하지만 마법 수준이 높은 것과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예요.”
그녀는 뒷말은 삼켰다.
회로는 구축했지만, 이제껏 한 번도 마법 사용에 성공한 적이 없노라고.
그때 카인이 손을 움직여 율리아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무슨….”
놀란 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내 회로를 타고 들어오는 마나에 동작을 멈췄다.
“역시 기본적인 회로는 가지고 계시는군요. 화(火)계 원소의 비중이 높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종의 원소를 균등하게 품고 있는 회로입니다. 발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
“제 마나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원소를 끌어 올려 보십시오. 실패해도 상관없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원소를 운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인은 뒤이어 그녀가 운용해야 할 원소의 종류와 비율, 끌어 올려야 하는 세기와 타이밍을 일러 주었다.
아기에게 첫걸음마를 가르치듯.
아주 상세하고도 나긋하게.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저를 믿고 해 보십시오.”
카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실패가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주변의 기대로 인한 부담감 때문이란 것을.
‘오히려 마법적 재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황제의 눈에 들고, 다른 형제들만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을 테지.’
이제껏 그녀의 세심한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한 선생이 없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가르침만 받는다면 그녀의 재능은 얼마든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해 보십시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중간에 원소의 통제를 잃어도 괜찮습니다.”
“…….”
율리아는 카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더없이 차분한 눈빛.
바라보는 이까지 덩달아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율리아는 이내 결심을 마치고 원소를 움직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우웅─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원소를 운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인은 중간마다 율리아의 실수를 교정하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곧 율리아의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요…?”
카인은 손목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나 그녀가 온전히 성취감을 누릴 시간을 주었다.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
집중이 순간 흐트러진 탓에 불꽃이 픽 꺼져 버렸다.
“어?”
허공에 팔을 휘휘 저어가며 원소를 끌어 올렸지만, 불꽃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인에게 다시 손목을 내밀었다.
“다시, 다시 도와줘요.”
카인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조금 전과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화륵.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원소가 지나가는 길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용한 원소의 종류와 비율 역시 중요합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분명 이제까지 마법을 사용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는데.”
율리아의 목소리는 거의 울 것 같이 변해 있었다.
“이 정도면 제 능력은 충분히 증명한 것 같군요.”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 지하에 대한 상대의 말 역시 신뢰도가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매주 이 시간 이곳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을 가르쳐 드리는 대가로 황녀님은 제가 황궁의 다른 곳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면 됩니다.”
“한 주에 한 번이라고요?”
“예. 마나 탱크의 정비 일자에 맞춰서 말입니다.”
“말도 안 돼요!”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부터 24시간 수업을 받아도 부족한데 주에 한 번이라고?
상대의 정확한 신분이나 목적.
그런 건 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평생 갈구해 오던 마법을 상대가 가르쳐 줄 수 있고, 나아가 정말 황궁 탈출이란 숙원을 이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폐하께 말씀드려 당신을 교사로 고용할게요.”
“황궁 인사에 관한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만, 모두 폐하가 직접 선별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몇 번은 눈도장을 찍고, 검증을 거친 자들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순간 흥분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 남자가 곧장 교사로 고용될 가능성은 자신이 보아도 제로에 가까웠다.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말했다.
“2주 뒤에 황실에서 무도회가 있어요. 폐하의 눈에 든 젊은 인재들이 모여 사교를 다지는 자리예요.”
무도회.
새로운 정보에 카인의 눈에 이채가 번졌다.
“초빙받은 이들은 파트너를 한 명씩 데려와야 해요. 일종의 추천제인 셈이에요.”
“참석 명단을 알고 계십니까?”
“전에 서기관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명단을 본 적이 있어요.”
율리아는 본래 머리가 좋은 편으로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명단에 있는 이름을 쭉 부른 뒤 카인이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제가 친분이 있는 인물의 이름은 명단에 없군요.”
내심 기대했던 제르비아의 이름 역시 없었다.
최근 혁혁한 공을 세우곤 있으나 그걸로는 부족하단 이야기였다.
‘하기야, 어디까지나 벽 바깥에서 일어난 범죄를 소탕한 것뿐이니.’
카인은 여러 상황과 경우의 수를 빠르게 계산했다.
‘명단의 인물과 친교를 트는 것보단 제르비아에게 확실한 공적을 주는 편이 효율적이다. 부수적인 효과도 노릴 수 있을 테고.’
황제의 성격은 인지하고 있었다.
벽 바깥은 철저하게 관심 밖.
하지만 통치권인 벽 내부의 ‘큰’ 범죄를 소탕한다면.
‘확실하게 황제의 눈에 띌 수 있다. 제르비아의 인지도는 이미 일정선 쌓여 있으니 무리 없이 초빙될 수 있겠지.’
카인은 붐케인이 담긴 비닐백을 보며 그것의 출처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에 잠긴 카인을 보고 율리아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그럼 내가 무리해서라도 폐하께 말씀을 드릴게요. 반복해서 요청하면 어떻게든―.”
“아뇨. 오히려 의심을 살 겁니다. 변수가 없다면 무리 없이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건가요?”
“예. 당장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카인이 슬쩍 시계를 살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만남을 마치고 무도회에서 뵙도록 하지요. 교사 이야기는 폐하께 눈도장을 찍고 차후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율리아가 깜짝 놀라 말했다.
“다음 주는요? 무도회는 2주 뒤라 다음 주도 이 시간에 볼 수 있잖아요.”
“떠오른 계획을 실행하려면 조금 바빠질 것 같아 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카인은 말없이 다시 율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율리아는 당황하긴 했지만, 회로에 밀려드는 마나를 느끼고 금세 학생으로 돌아와 원소를 끌어 올렸다.
화륵.
카인은 불꽃 위에 붐케인이 든 비닐백을 올렸다.
“말씀드렸듯이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이 궁을 벗어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으니까요.”
타닥.
비닐백과 약이 타들어 가며 공기 중에 환각 물질이 퍼져나갔다.
“궁에서의 삶이 몹시 지루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식물처럼 박제된 삶이었을 테지요.”
양이 적기에 인체에는 무해했다.
순간 정신을 어지럽히는 정도.
하나 마약을 처음 경험하는 율리아의 입장에선 자극이 너무 강하다 할 수 있었다.
“잠깐만요. 이거….”
약 기운에 저항하려 애썼지만 정신은 자꾸 몽롱해졌고, 결국 비틀거린 끝에 카인의 품에 쓰러졌다.
카인의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계속해 들려왔다.
“약속드리겠습니다. 황녀님의 삶에 이런 조잡한 약물 따위보다 더 큰 자극을 선물해 드릴 것을.”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리기 시작해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그러니 기다리시면 됩니다. 조급해 말고. 제가 때가 되었다 할 때까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피로하고, 초점이 풀린 시선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 * *
며칠 뒤 오후.
끼익.
검은 차량이 보도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선글라스를 낀 기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보도 위에 있던 행인에게 물었다.
“벤 님이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뒷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행인이 탑승하고 차량은 부드럽게 바퀴를 움직여 출발했다.
방향은 17번 구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