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황궁 (1)
고개를 돌리자 뒷짐을 지고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벤, 잘 지냈어요?”
누가 보아도 숨이 막힐 눈부신 외모였다.
소녀와 여인의 중간 어디 즈음.
장난기 가득한 얼굴엔 천진함과 여유로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인사를 건네는 거로 보아 벤과 안면이 있던 사이인가.’
눈부신 백발은 황족의 상징.
두 명의 황녀 중 1황녀는 평균 키 이상의 장신이라는 설정이기에 눈앞의 소녀는 2황녀라는 결론이 났다.
일개 정비사가 어떻게 황녀와 친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히 머뭇거렸다간 의심을 살 터.
“2황녀 율리아 프나함 님을 뵙습니다.”
카인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예를 표했다.
자료를 통해 넘겨받은 ‘벤’의 성격은 차분하고 조용한 편.
하급 공무원 집안의 자제로 책을 많이 읽어 학식이 또래보다 뛰어났다.
“…….”
카인은 황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 상황에 가장 가능성 높은 벤의 행동을 취했지만, 대응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한참 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녀는 돌연 ‘푸하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그게. 갑자기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더니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녀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다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는 덥석 카인의 품에 안겨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수는 또 낮잠을 자고 있나요? 몰래 눈치 보며 오느라 힘들었죠?”
황녀의 행동은 갑작스러웠지만, 카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눈처럼 소담한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경우의 수를 분석할 뿐이었다.
이내 내려진 결론에 헛웃음을 머금었다.
‘황녀와의 밀회라. 들키면 목숨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벤. 생각보다 모험가 기질이 있는 남자였다.
카인은 황녀의 어깨를 붙잡아 품에서 떼어 놓았다.
“남들이 볼 수 있습니다. 행동에 주의해 주십시오, 황녀님.”
“걱정 말아요. 이런 외진 곳에 오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가요! 내가 매주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아요?”
황녀는 카인의 손을 잡아끌고 근처의 미로 정원으로 향했다.
수풀이 키 위로 훌쩍 자라 있어 남의 시선을 피하기엔 제격이었다.
“하루하루가 따분해요. 매일 공부뿐이고. 황궁 밖은 위험하다고 나가지도 못하고.”
황녀는 그 나이대의 소녀가 할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게 느껴졌다.
어차피 황실에 진입하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었을 인물로, 미리 상대를 파악하고 정보를 캘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드시겠군요. 매일 같이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익히셔야 하니까요.”
“숨도 못 쉬겠다니까요. 교사들이 잘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카인은 적당히 대화를 받아 주며 중간중간 질문을 던져 원하는 대답을 이끌었다.
‘1황녀와 2황녀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해 두었지만.’
예언자의 남성형 체격과 어투.
또한, 황자들과 달리 황녀들은 황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확인 절차를 거쳐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대업이란 아무리 조심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부족한 법이니까.
“밖에 나가지 못하니까 황궁을 최대한 돌아다녀요. 워낙 넓어서 아직 가 보지 못한 곳도 많고요. 폐하의 실험실이나 황궁 지하 같은 곳이 그래요.”
카인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황궁 지하라. 황녀님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뇨. 몰라요. 소문은 무성한데 직접 가 본 적은 없으니까요. 마도왕국의 보물이 쌓여 있다는 말도 있고, 마수들이 사육되고 있다는 말도 있어요.”
손을 치켜들고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 율리아를 보며 카인은 생각했다.
‘…2황녀는 확실히 예언자가 아니군.’
라이카를 쓰러트리고 얻게 된 두 개의 특성 포인트.
‘신체강화’에 투자하고 남은 하나는 ‘진실의 눈’을 습득하는 데 사용했다.
에스텔이 보유하고 있으나, 모든 상황에 그녀가 함께할 수는 없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특히 황실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많아, 예언자를 색출하는 용도 외에도 큰 도움을 줄 터였다.
‘예언자 역시 작품의 주요 설정을 알고 있다. 황녀가 예언자라면 조금 전 말이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드러났겠지.’
시계를 흘끗 보자 아직 여유가 있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황제와 황자들에 관한 정보. 그들이 예언자로 가장 의심되는 인물들이니.’
카인이 운을 떼려던 때.
뒷짐을 지고 앞서 걷던 율리아가 몸을 빙글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 누구예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로.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 벤 아니잖아요. 그렇죠?”
“장난을 좋아하시는군요.”
“벤이라면 아까 내가 안겼을 때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
“그것 말고도요. 진짜 벤은 분위기가 달라요. 예의 있고 정중한 말투를 쓰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죠. 억지로 귀족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율리아가 카인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턱을 까딱 들고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에 반해 당신은 자연스러운 기품이 흘러요. 표정과 몸짓, 말투 하나하나 모두. 감춘다고 감춘 것 같은데 나한테는 다 보여요. 이제껏 본 누구보다 고상하게 느껴지는 걸요.”
그녀가 숨을 고르고 마지막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니까, 누구예요? 당신?”
여전한 미소.
고난도의 문제를 풀었으니 칭찬을 해 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서는 강적이군.’
황제는 많은 후궁을 두었다.
본래 자식의 수는 20명이 넘었고, 파벌 간의 계략과 암투 속에 살아남은 것이 현재의 6명이라 할 수 있었다.
2황녀 율리아의 나이는 17살.
소녀의 얼굴 뒤엔 뱀이 있으리라.
카인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떠보았다.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평소 그대로일 뿐입니다.”
“웃기지 마요. 빨리 바른대로 불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저자가 나를 겁탈하려 했어요! 경비병이 몰려오고 볼만하겠죠?”
율리아는 손바닥을 입가에 모아 여기저기 소리치는 시늉을 했다.
카인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잘만 이용하면 나쁘지 않은 기회일 수 있다.’
다루기 어렵긴 하나, 눈앞의 이 작은 악마를 통제할 수 있다면 앞으로 황실에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아아, 벤은 어딘가로 끌려가 살해당한 걸까요? 불쌍한 사람. 어리숙하지만 순정은 있는 사람이었는데.”
율리아는 이제 양손 깍지를 끼고 연기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카인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숨기는 건 소용 없을 것 같군요.”
“와! 진짜요? 누구예요? 대체 어떻게 정문을 지나온 거예요?”
카인은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다 대어 변용 마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린 순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율리아의 입이 멈춰 버렸다.
“와.”
그 한마디였다.
곧 정신을 차린 율리아가 말했다.
“진짜 얼굴이에요? 아벨 오빠보다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요.”
요한의 얼굴은 실제 카인의 얼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인상을 결정짓는 이목구비의 각 요소를 조금씩 바꾸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을 줄 뿐.
카인은 율리아의 물음을 무시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헥사메디컬이라는 제약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요한 키리프라고 합니다.”
율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요한 키리프요? 그 요한? 석화증 치료제 개발자?”
“알고 계시는군요.”
“당연히 알죠. 황궁이라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은 아니니까요. 시종들 입을 통해 다 전해 들어요. 전 특히나 바깥소식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엄밀히 말해 카인은 황궁에 무단으로 침입한 범법자인 셈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평소 동경하던 유명 인사를 만난 것처럼 눈을 빛내며 질문을 쏟아 냈다.
불칸 회장이 휠체어에서 두 다리로 일어난 것이 진짜인지.
마탑 장로 라이티노의 숨겨 둔 제자라는 말이 사실인지.
치료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 수 있게 되었는지.
“당신이 악마라는 소문도 있던 걸요. 입에서 불을 뿜고 밤마다 두 날개를 펼치고 저택 위를 날아다닌다고요.”
“…소문을 조금 선별해서 들으실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율리아는 깔깔 웃었다.
“그래서 벤은 죽었나요? 거대한 기름통에 콘크리트와 함께 굳혀져 땅속 깊은 곳에 묻혀 버렸나요? 아니면 바닷속?”
“죽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긴 휴가를 떠났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저라면 완벽한 입막음을 위해 영원한 휴가를 보냈을 거예요. 그래서, 신분을 위장하면서 황궁에 들어온 이유는 뭔가요?”
카인은 수풀 벽으로 다가가 가지를 옆으로 밀어냈다.
드러난 작은 틈.
거대한 황궁의 모습이 보여 왔다.
“저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쪼르르 옆으로 다가온 율리아는 카인이 들여다보고 있는 틈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했다.
“그게 뭔데요?”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황녀의 명이에요. 알려 줘요.”
“안 됩니다.”
율리아는 까치발을 멈추고 카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알려 주지 않으면 제가 소리를 지를 텐데도요?”
그녀의 눈동자엔 수가 틀릴 경우 정말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카인은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 보호 차원에서 감시가 심해질 텐데요.”
카인이 나직이 덧붙였다.
“황궁을 탈출하겠다는 황녀님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고 말입니다.”
율리아의 눈이 놀라움과 당황감으로 더 없이 커진 순간, 카인의 손이 번개 같이 움직였다.
손에 들려 나온 립스틱 상자.
덮개를 열자 하얀 가루가 담긴 비닐 팩이 나타났다.
“미심쩍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역시 붐케인이었군요. 환각 물질이긴 하나, 폭발성이 매우 강해 더러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하는 약물이죠.”
카인의 시선이 수풀 위로 드러난 외벽으로 향했다.
“안타깝지만 붐케인 정도에 무너질 정도로 황궁의 외벽은 약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반입했을 텐데, 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군요.”
율리아는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어떤 말과 행동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도 한순간 모든 상황과 계획을 알아차렸기에.
‘말도 안 돼. 냄새로 붐케인을 알아차렸다고? 거의 무취에 가까운데?’
거기에 벤이 약을 전해 준 사실과 야심 찬 탈궁(宮) 계획까지.
벤이 무언가 이야기를 흘린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벤에게 황궁을 벗어난단 얘기는 한 적이 없어. 나한테 푹 빠졌으니 약 이야기를 불었을 리도 없고.’
이미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붐케인을 반입했다. 이쪽에 해가 될 이야기는 곧 죽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 파악한 정보만으로 저런 말을 꺼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단순한 찔러 보기?
‘아니야. 찔러 보기라면 저런 빈틈 없는 표정을 할 수 없어. 완벽한 확신이 있어 던진 말이야.’
자신감과 허세.
진짜와 가짜.
온갖 계략과 암투 속에 살아왔기에 그것들을 가려내는 일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선택지가 없었다.
최대한 침착한 척 묻는 것밖에는.
“단서는 개개로선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하나하나 모이면 완성된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단서가 부족했어요. 당신이 한 건 추측이 아니라 비약─.”
냉랭히 쏘아보는 카인의 시선.
율리아는 순간 흠칫 한 걸음 물러섰다.
“황녀님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이해는 합니다. 한 번도 황궁 밖을 나가 보신 적이 없을 테니까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에 어찌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얕보고 있었다.
황궁 내에서 무수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이’가 꼭 그 사람에게 지혜나 연륜 따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녀가 겪은 어른 대다수는 살아낸 시간의 풍파만큼 감정에 취약해져 이리저리 휘두르기 쉬운 인간들이었다.
요한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알려졌다 한들 소문은 입과 입을 거치며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폐하나 마법부 장관을 대할 때랑 비슷한 느낌이야.’
율리아는 경계 어린 눈초리로 카인을 쏘아보았다. 카인은 시계를 흘긋 내려본 뒤 말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황녀님은 황궁 밖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기를 원하고, 저는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황궁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율리아의 가슴이 고동쳤다.
“목표는 조금 다르지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면이 있는 것 같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카인은 한 발짝 거리를 벌린 율리아에게 다시 한 발짝 다가섰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황녀님을 자유롭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황궁에서의 제 활동을 도와주시는 대가로.”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스쳤다.
묘한 시원함이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