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위대한 카인 (2)
뚝. 뚝.
불칸 회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투병 생활이 남긴 고난의 흔적을 씻어 내리며 땅에 떨어졌다.
서러움과 감격, 혼란과 놀라움.
다채로운 감정이 밀려들며 회장은 한동안 꺽꺽거리기만 했다.
감정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내가, 내가 지금 두 발로 서 있단 말이오?”
“맞습니다. 앞으로 걸음을 옮겨 보시지요.”
카인의 지시에 따라 회장은 발에 힘을 주었다. 적지 않은 노력 끝에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치료제가 정말 사실이었어….”
“우린 지금 기적을 보고 있어요.”
“당장 기사 작성하라고 해. 되는대로 급보를 발표하고 내일 해가 뜨자마자 신문을….”
술렁이는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신을 믿는 자 중 몇몇은 성경의 어느 거룩한 장면을 목도한 것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신약에 대해 떠돌던 억측과 불신.
그것들 모두가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털썩.
회장은 몇 걸음 더 내딛다 뒤로 휘청였다. 카인의 부축을 받아 다시 휠체어에 앉았다.
“근육이 갑작스레 정상화되어 아직 제 기능을 다 하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몇 주간 재활을 거쳐야 하죠.”
그때 나이론의 외침이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이건 다 사기입니다, 여러분!”
그는 여전히 비서들에게 어깨를 제압당해 있었다.
고개를 양옆으로 휙휙 돌려가며 열변을 토했지만,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칸 회장이 석화증을 앓아 온 것은 수년 전부터 퍼져 있던 사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사기라면 카인과 불칸 회장이 아주 오래전부터 거대한 연극을 준비해 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카인은 천천히 나이론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을 끌어내리려면 자신 또한 끌어내려 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곧 본사로 계약 이행에 대한 서류를 보내지요.”
농토를 걸고 작성했던 문서.
나이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에게 맡겨 놓았던 샴페인 잔을 받았다.
잔을 올리며 말했다.
“파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즐겨 주시기를.”
* * *
저택 내부에 마련된 응접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이번은 정말 신의 은총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네. 요한 대표, 자네는 신이 세상에 내린 기적이네.”
불칸 회장은 카인에 대해 몹시 궁금해했다.
헥사메디컬의 인수 과정.
신약의 개발 과정.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죄송합니다.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없는 것 같군요.”
다만 카인의 일축에 눈치를 보며 더 이상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어쨌든 정말 고맙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보상이 있다면 뭐든 해 주겠네.”
“보상 말씀입니까.”
“농토가 필요하다고 했나? 우리 기업도 벽 안쪽에 작지 않은 넓이의 농토를 보유하고 있네. 원하는 만큼 넘겨주겠네.”
불칸 회장은 말 그대로 카인이 ‘원하는 만큼’ 농토를 넘겨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를 어쩔 수 없이 첫째에게 넘겨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지.’
자식은 많지만 성에 차는 녀석은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면, 더 이상 회사와 후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억만금을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카인은 그의 제안을 듣고 생각했다.
‘농토라.’
이미 18번 구역에서 넘겨받을 땅이 있기에, 사실 더 이상의 농토는 전만큼 큰 의미는 없었다.
컴뱃오토는 대륙 최고의 차량 기업.
그중 전투용 차량의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로 유명했다.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차라리.’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을 떠올린 카인은 결정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보상을 주신다니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농토보다는 다른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무슨 부탁 말인가? 말만 하게.”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부탁은 아닙니다. 아마 조금 더 미래의 일이 될 것 같군요.”
불칸 회장은 잠시 멍했다.
“나중에 부탁을 하겠단 말인가?”
“예. 아마 1년이나 2년 뒤의 부탁이 될 것 같습니다. 절대 컴뱃오토나 회장님에게 무리나 해가 될 부탁은 아닐 겁니다.”
불칸 회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네.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부탁만 아니면 내 열과 성을 다해 들어주겠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랄 것이 뭐가 있나. 나는 자네 덕분에 새 생명을 얻은 꼴인데.”
불칸 회장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그는 이후로 자신의 이야기를 더 풀었다.
처음 석화증이 찾아 왔던 순간.
지난한 투병 생활.
여러 제약 회사에 뿌렸던 투자금.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나중에 시간이 될 때 꼭 우리 본사를 찾아 주게나.”
불칸 회장은 카인에게 명함을 건넸다.
본래 명함을 주는 위치가 아니라 받는 위치에 있는 재계의 거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지.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네.”
불칸 회장은 응접실에서 저택의 대문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
회장은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택에서 떠나는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이 사라질까 걱정되기도 했다.
“TX-001은 한 번으로 충분한 효과가 있으니 더 이상 사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돌아가 재활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알겠네.”
떠나는 건 아쉽지만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몸의 운신이 자유로워졌으니 앞으로의 회사 운영에 있어 수정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부우웅─!
불칸 회장의 차가 떠나고 카인은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가 카인에게 몰려들었다.
한두 마디라도 말을 걸고,
그와의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
* * *
한창 파티가 진행 중인 저택.
검은 워커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
세련된 디자인의 갈색 코트.
허리에 맨 장검 한 자루.
허리춤까지 내린 푸른 머리카락.
제르비아의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런 곳을 접선 장소로 잡다니,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최근 그녀는 벽 안쪽에서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던 상황이었다.
「67번 구역. 12번 거리의 창고에서 터모일과 나르카본의 두 조직이 접선해 마약 거래를 할 예정이다.」
쉴새 없이 내려지는 카인의 지시에 따라 벽 바깥에서 범죄를 쫓았다.
그때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고, 특무대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당장 병력을 물리지 않으면 포로의 목숨은 없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사로잡힌 대원이나 민간인 포로의 목숨을 걱정해 선택을 망설였을 것이다.
「범죄와 타협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론 더 나았음으로 드러날 때가 많았다.
비록 작전 진행이 과격하고 비인간적이라는 평을 들을지언정.
‘상관없다. 이제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제르비아는 시계탑에서의 그날을 떠올렸다.
「사사로운 것들은 버려라.」
「네 인생의 과업만을 생각해라.」
묵직하게 와닿았던 카인의 목소리.
맹약의 징표가 가슴에 새겨지던 순간의 화끈거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은 그날 이후였다.
친오빠의 유골함을 스스로 깨트리며, 과거에 못 박혀 있던 묵은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대장님. 요즘 뭔가 달라지신 거 같습니다.」
「사람 자체가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범죄 박멸에 강박을 가지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불안과 초조.
쉴새 없이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의무적인 움직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범죄 박멸이란 목표는 변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강박감은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 모든 범죄는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의 그녀에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더 이상 초조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았다.
다만 최근 한 가지.
「당분간은 다른 신경 쓸 일이 많아 지시를 내리지 못할 것 같군.」
지령이 끊겼다.
카인의 지시에 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달려오고 있던 상황.
어둠 속에서 길을 인도하던 불빛이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13번 구역의 저택 단지. 주소를 알려 줄 테니 받아 적지. 그곳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군.」
때문에 어제 연락을 받았을 때.
수행 중이던 임무를 부관에게 인계하고 곧장 벽 안쪽으로 복귀했다.
그녀가 순간 느낀 감정은 분명 달가움이었다. 비록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녀의 입술이 움직여 두 글자로 된 이름을 되뇌었다
“…카인.”
카인에 대한 그녀의 적개심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재의 감정은 고마움에 가까웠다.
「너를 청장 자리에 올려주겠다. 경찰 조직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위치라면 블루서펜트를 괴멸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어쨌든 카인 덕에 빠른 시간 내에 혁혁한 공들을 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음 분기에 특진이 예정되어 있고, 앞으로도 쭉쭉 치고 올라갈 터였다.
분명 카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때문에 그녀는 무의식중 도움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빚을 지고는 살 수 없는 성정.
카인이 심판받아 마땅한 범죄자란 사실과 별개로,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물론 맹약이 끝나는 즉시 내 검은 네 목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카인이 정도를 넘어선 강적이란 점도 있지만, 시계탑에서 느꼈던 감정의 동요 때문도 있었다.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군.」
공방을 주고받던 중 녀석이 툭 던졌던 한마디. 자신은 그때 분명 친오빠를 떠올렸다.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어. 칭찬해 줘야겠네.」
모든 게 불확실하던 어린 시절.
세상의 걱정을 한순간만이라도 잊게 해 주던 따뜻한 한마디.
오빠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 전투 중 검 끝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한순간 무장 해제되었던 기분.
시계탑에서의 일을 떠올리던 제르비아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내가 녀석의 칭찬에 기뻐했다고?’
쯧.
과거의 일을 부정하기 위해 과장되게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의 칭찬에, 그것도 숙적과 다름없는 녀석의 칭찬에 기쁜 감정이 들었다니.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완전한 성장을 위해서는 그때 느낀 감정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철컥.
제르비아는 검집을 고쳐 매고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의 감정을 재확인하고,
끄집어내어 철저히 부수어 버리리라 생각하며.
“…….”
그리고 정확히 1분 뒤.
그녀는 수많은 인파 속에 길을 잃었다.
* * *
파티에 맞는 옷차림을 한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 혼자 코트였다.
인파를 헤치며 걷는 동안 시선을 집중시켰고, 곳곳에서 그녀를 알아본 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특무대의 자비르 경위님이잖아요. 참 멋있으셔라. 걸음걸이에서 품격이 느껴져요.”
“뭔가를 수사하러 이곳에 오신 걸까요?”
물론 사람들의 말소리는 제르비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여긴 분명 아까 돌았던 곳….’
어디를 가든 사람이 북적여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고 빠른 걸음걸이도 사실 당황스러움을 감추려는 이유가 컸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카인이 있다.’
제르비아는 저택 주인에 대한 소문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벽 바깥에서 막 복귀한 데다, 업무와 관련 없는 가십거리에 구태여 귀를 기울이는 일은 그녀의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곳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카인, 언제 나타날 생각이지?’
직접 대면해 지령을 전달한다면 그 중요도가 상당히 높다는 말이었다.
‘먼저 나타날 것이 아니라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흥분과 기대에 찬 상태로 그녀는 카인을 찾아 바삐 걸음을 옮겼다.
“경위님!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요!”
“저는 지금 수사를….”
물론 그녀의 몸이 움직이는 건 그녀의 열의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기사에 실린 영웅담 잘 보았습니다! 제게 악수 한 번만 할 수 있는 영광을!”
“아니, 저는 지금….”
그녀는 인파에 휩쓸려 파티장 이리저리 떠밀렸다.
범죄자 이외엔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성정이었다.
23장의 사인을 써 주고 13번의 악수를 하고 4잔의 칵테일을 마신 끝에야 그녀는 저택 안으로 떠밀려 도착할 수 있었다.
‘…….’
그녀는 조금 취한 상태였다.
본래 마나유저는 체내의 알코올을 몰아낼 수 있으나, 문제는 그녀가 술에 몹시 약해 조금이라도 취하면 회로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게만 하는 액체를 다들 대체 왜 마시는 건지…. 우웁.’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벽을 짚으려는 찰나.
“취하신 것 같군요.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누군가 팔을 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녀는 속을 게워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그리고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 서명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저택 안의 미술품 관리는 지시하신 업체에 맡겨 처리하겠습니다.”
자신을 부축해 준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는 사용인과.
사용인이 든 파일 아래 드러난 서류 끝부분의 서명을.
익숙한 글씨체였다.
위조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악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카인?”
화려한 불빛 아래 잘 보이지 않는 얼굴.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