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위대한 카인 (1)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뭘 거시겠습니까?”
딜런 메디컬의 연구부장 나이론.
그는 당황했다.
‘치료제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이 자리에서?’
헥사메디컬이 발표한 신약에 대한 소문은 그 역시 들었다.
어디를 가든 헥사메디컬의 대표와 신약에 관한 이야기뿐으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소문을 처음 듣고 코웃음을 쳤다.
「석화증 치료제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업계에서 연구는커녕 치료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질병인데.」
제약 업계에 몸을 담가 신약 개발에 매진해온 세월이 적지 않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석화증 치료는 불가능하다.
동종 업계의 관계자들, 특히 약학 지식이 있는 연구자들은 모두 같은 의견을 표했다.
「치료 사례가 있다고 해봐야 근육이 잠시 이완되어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 있던 경우를 말하는 거겠지.」
소문이란 원래 과장되고 부풀려지는 법. 때문에 나이론은 요한이 사기꾼이라 생각했다.
상대가 당장 치료제를 증명하는 건 어렵다고 말하며 상황을 회피할 거라 예상했다.
어느 정도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 계산하고 나선 행동이었다.
“뭐, 뭘 걸겠냐고? 나보고 한 말이오?”
“다른 사람이 더 있겠습니까. 딜런 메디컬의 나이론 팬토 연구부장님.”
하지만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 건 이쪽이 될 상황이었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말은 더듬거리며 나왔다.
‘벌써 직위와 이름까지 파악하고 있는 건가?’
나이론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주눅 들 필요 없다.
녀석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뿐.
‘내가 겁을 먹어 꼬리를 말고 물러나기를 바라는 거겠지. 얄팍하긴. 새파랗게 어린놈이. 내가 당해줄 것 같나.’
어차피 석화증 치료는 불가능한 이야기. 여기서 실체를 모두 까발려 주겠다.
나이론은 당황했던 표정을 고치고 씩 웃으며 말했다.
“치료제를 증명하겠다니. 그 말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소? 나야 뭐든 걸 수 있소. 문제라면 내가 거는 만큼 그쪽도 판돈을 올려야 한다는 점이겠지만 말이오.”
나이론의 예상과 달리 카인은 주춤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내기를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무르익어 가는 파티 분위기를 더욱 돋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판돈은 토지가 어떻습니까? 건실한 제약회사라면 모두 약재를 위한 농업용 토지를 보유하고 있지요. 이 자리에서 치료제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47번 구역에 제가 보유한 모든 농토의 소유권을 넘기겠습니다.”
“뭐, 뭣?”
“나이론님이 걸 판돈으로는 딜런 메디컬이 18번 구역에 보유한 농토가 적절할 것 같군요.”
나이론은 몸에 조금 돌고 있던 취기가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토지를 걸겠다고? 제정신인가?’
허세다. 겁을 주려는 것이다.
속아 넘어 가줄 성싶은가.
업계의 치열한 암투 속에서 살아남아 온 이의 연륜을 무시하지 마라.
“아, 죄송합니다. 저와 달리 나이론 님은 기업의 대표가 아니셨지요. 상부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할 테니 토지를 거는 건 어렵겠군요.”
게다가 상대는 자존심을 긁으며 점점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토지를 걸 수 있는 자격은 있다.’
내부 회의를 거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당장 내기에 응하지 못할 건 없다.
연구부장이란 직위는 토지 사용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질 수가 없는 내기야.’
47번 구역의 농토라니. 단지 몇 마디 말다툼의 보상으로 얻기엔 너무도 큰 보상이었다.
“내기를 수락하겠소!”
“좋습니다. 배포가 크신 분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 내기를 진짜 걸었어요!”
“18번 구역의 농토라면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노른자 땅인데….”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커져만 갔다. 폭죽은 터지고 음악은 흘렀다.
카인은 미소 지었다.
‘18번 구역의 농토라. 뜻밖의 수익이군.’
벽 안쪽의 농토는 바깥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다.
작물이 품질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며 훨씬 더 좁은 면적에서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다.
카인이 다음 신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맹안증과 영면증의 치료제.
이미 샘플을 받아 시험해봤지만 석화증 치료제와 달리 효과가 없었다.
‘47번 구역에서 재배한 약재가 품질이 낮기 때문이었지.’
석화증 치료제보다 훨씬 제조 난도가 높았다. 배합 비율뿐 아니라 약재의 품질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만약 18번 구역의 최상급 농토를 확보하고 그곳에서 약재를 수확할 수 있다면.
‘단순히 자금만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 최상급 농토지. 잘 되었어.’
빠른 시일 내에 맹안증과 영면증 치료제의 생산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 카인을 보는 나이론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다. 어차피 이기는 쪽은 나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운 얼굴을 할 수 있을지 보자.
“지켜보는 모든 분이 이미 증인이지만, 각 기업의 재산이 걸린 만큼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요.”
카인의 지시를 받은 사용인이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카인은 그곳에 내기 내용을 빠르게 휘갈긴 뒤 지장을 찍어 나이론에게 건넸다.
“찍으시지요.”
나이론은 내용을 빠짐없이 검토한 후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종이를 높이 들어 보였다.
“자! 다들 보시오! 방금 주고받은 내기의 내용을 명문화한 서류요! 이 사기꾼이 도망갈 곳이 없다는 얘기요!”
나이론은 사람들을 한 차례 돌아본 후 다시 카인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증명해보시오! 치료제가 진짜라는 사실을! 말해두지만 연구 자료 같은 걸 들이밀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런 건 얼마든 조작이 가능하니까.”
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 있겠습니까.”
그리고 품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약병을 꺼냈다. 위에는 TX-001이라 쓰인 라벨이 붙어 있었다.
“치료제가 진짜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면, 직접 사용해보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요.”
다시 한번 웅성거림이 번졌다.
“물량이 모두 소진되었다더니 역시 남아 있었어!”
“저게 그 억만금을 줘도 당장은 구할 수 없다는 소문의 신약이란 말이죠.”
카인은 이어서 빈 주사기를 꺼내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증명에 필요한 신약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석화증을 앓고 있는 환자만 있으면 되겠지요.”
투여를 원하는 이는 앞으로 나서란 뜻이었다.
인근에 거주하는 고위층 인사들의 신상정보는 정보길드를 통해 모두 파악해둔 상태였다.
물론 심층적인 부분까지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 같은 것은 얼마든지 수집이 가능했다.
‘방명록을 보고 석화증 환자가 몇 있음은 이미 확인했다.’
병의 진행도가 낮아 아직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이들.
실제로 그중 몇몇은 카인이 테이블을 돌아다닐 때 접근해 남는 치료제에 관해 물어왔다.
나이론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직 검증이 제대로 되지도 않은 약을 여기서 직접 투여하겠다는 말이오? 연구 자료는 나도 읽어봤소. 약이 안전하다 말하려면 투여 후 최소 몇 년은 지켜봐야 하오!”
손을 들고 나서려던 이들이 움찔하고 동작을 멈춰 섰다. 나이론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해졌다.
“TX-001의 경우 가장 길게 경과를 지켜본 경우가 3개월밖에 되지 않더군.”
“…….”
카인은 굳이 연구 결과를 조작하지 않았다.
약의 효과는 이미 검증되어 있기에, 나중에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솜씨가 제법이군.’
카인은 술렁이는 좌중을 돌아보며 석화증 환자의 명단을 상기했다.
‘분위기에 상관없이 나설만한 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 상관은 없는 일이지.’
지원자가 없어도 분위기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올 자신이 있었다.
논리적인 화술로 청중을 끌어당기는 것은 자신의 장기였으니까.
“연구 자료를 봤다면….”
카인이 반박을 시작하려던 때.
“내가 투여를 받아 보겠소.”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휠체어를 탄 장년이 나타났다.
눈빛에 총기가 돌고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컴뱃오토의 불칸 회장이잖아.”
“최근 몇 달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더니, 석화증이 온몸에 퍼져서 꼼짝 못 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컴뱃오토.
대륙 최대 규모의 차량 제조 기업으로, 불칸 회장은 재계에서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불칸 회장…!’
나이론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과거 컴뱃오토의 의뢰를 받아 석화증 치료제 개발에 착수했지만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투자금을 돌려줄 필요는 없소. 내가 괜한 기대를 했군.」
개발 비용은 뱉어낼 필요 없었지만, 그 말은 연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불칸 회장이 말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사람이 많아 기다리고 있었소. 내가 치료제를 투여받아도 되겠소?”
카인은 입꼬리를 슬며시 밀어 올렸다. 타이밍이 늦긴 했지만, 예상은 적중했다.
“물론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당당하게 나서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
“남들 눈치를 보거나 자존심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건 멍청한 일이지. 부작용이 있다 해도 상관없소.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폐까지 굳어 산송장이 될 테니까.”
불칸 회장은 양팔과 얼굴, 상반신 일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태였다.
“부작용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제를 투여하는 즉시 휠체어에서 일어나 전과 같이 두 다리로 걸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극적인 효과까진 바라지 않소. 상태가 호전되기만 해도 바랄 바가 없소.”
“약속드리겠습니다. 석화증에서 단번에 벗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나이론이 소리쳤다.
“회장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석화증은 온몸의 근육 세포가 마비되는 병으로 그걸 한 번에 정상으로 돌린다는 건….”
분명 약이 가짜라는 확신이 있는데도 왜 자꾸 불안감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나이론의 다급한 목소리에 불칸 회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끼어들지 마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은 굳어가고 있소.”
나이론이 움찔했다.
카인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나이론 연구부장님. 저희 측 자료를 읽어보셨으면 이미 아실 텐데요. TX-001은 기존에 시도되었던 다른 신약들과는 원리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요. 회장님, 오른팔을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카인은 주사기에 약물을 주입하고 불칸 회장의 오른편에 다가섰다.
회장 팔에 가까워지는 주삿바늘.
나이론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치료제는 분명 가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연구 자료에 나온 내용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면?
뇌리에 적신호가 울리고,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였다.
“당장 멈추시오!”
몸집을 키운 불안감이 얄팍한 영웅 심리를 집어삼키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나이론은 카인과 불칸 회장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비서들에게 양어깨를 짓눌려 바닥에 쓰러졌다.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 카인의 얼굴과 불칸 회장의 팔뚝 혈관에 주입되는 TX-001이 보였다.
실린더가 끝까지 밀리고 주삿바늘이 팔뚝을 빠져나왔다.
숨 막히는 정적 속.
불칸 회장은 자신의 팔뚝만 바라볼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론이 가능할 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나이론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불칸 회장의 발끝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이 발목과 허벅지를 타고 올라 골반까지 번졌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는 듯 회장의 얼굴엔 열이 올라 있었다.
“맙소사…!”
회장의 발끝이 까딱거린 순간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내 회장의 몸이 앞으로 숙여지고, 그의 엉덩이가 휠체어에서 떼어졌다.
놀란 비서들이 정신을 차리고 부축을 위해 다가섰으나, 회장은 크게 손을 저어 도움을 뿌리쳤다.
“비키게! 나 혼자 할 수 있네!”
쉴새없는 경련과 시도 끝에 그는 마침내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떤 도구에도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스스로의 힘만으로 말이다.
불칸 회장은 대지에 꼿꼿이 선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시선.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