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45화 (145/227)

#145. 마탑 (1)

엘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완드 끝에 모인 마나가 촘촘하게 뭉쳐 쏘아질 준비를 마쳤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고 미려한 외모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탁.

남자는 문을 닫고 엘렌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가 시선을 완드 끝으로 내렸다.

“그걸 나에게 쏠 생각인가?”

“…….”

클랙필드에서 보았을 때와 얼굴이 달랐지만, 그 고압적인 말투와 특유의 아우라로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마법이 아닌 다른 도구로 얼굴을 바꾼 건가? 마나가 전혀 안 느껴져.’

엘렌은 입술을 잘근 씹고는 완드의 마나를 흩트려 날렸다.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일 뿐 실제로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공격했어도 절대 못 이겨. 맹약에도 위반되는 일이고.’

풀썩.

엘렌의 몸이 다시 한번 소파로 허물어지고, 남자는 그 앞에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방의 주인인 것처럼 다리를 꼬았다.

“좋은 곳에서 근무하는군.”

“…….”

마탑의 교수 자리는 엘렌이 밑바닥부터 순전히 실력만으로 올라와 쟁취할 수 있던 자리였다.

“커피를 좀 내오지.”

학생이나 다른 교수였다면 불같이 쏘아붙여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포식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했기에.

달각.

그녀는 포트를 작동해 테이블 위에 커피 두 잔을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견학에서 돌아온 이후 계속 마탑에 박혀 있었어요. 당신 지시대로요. 제 오빠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카인은 커피를 홀짝이며 벽 안쪽에서 밀수 사업을 재개해 활동하고 있을 바마를 떠올렸다.

「벽 안쪽이라고. 이게 내 여동생에 대한 다음 단서인가?」

「그래. 운이 좋다면 활동 중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바마와 엘렌이 우연히라도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바마의 활동지는 마탑과는 거리가 먼 20번대 구역이니까.

‘바마와 엘렌 교수를 만나게 하는 건 조금 더 나중의 일.’

바마는 아직 이용 가치가 있었다.

블루서펜트를 향한 제르비아의 적개심을 고양할 ‘미끼’.

그리고 밀수를 통해 벌어들이는 적지 않은 ‘수입원’.

바마를 죽이면 ‘현실 세계로의 귀환’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나, 카인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진정한 복수 대상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지금은.

엘렌은 불만 가득한 투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이후 카인은 예언자에 관한 정보를 물어보았다.

사소한 말투와 버릇.

키와 걸음걸이 같은 것들.

전에 이미 들었던 내용이나, 정보를 재확인하기 위해 묻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까지와 같이 마탑에 머물도록.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렌은 당황하며 같이 일어났다.

“또 기다리라고요? 대체 언제까지….”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얼굴을 자주 보게 될 테니까. 더 많은 지시를 내리고 그에 따른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카인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끼익- 탁!

엘렌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얼굴을… 자주 보게 될 거라고?”

카인이 남기고 간 말의 의미를 가늠하면서.

* * *

라이티노가 준 패 덕분에 마탑 곳곳을 출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인이 패를 제시할 때마다 직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길을 비켜섰다.

마탑의 실세.

라티움이라는 거대 기업의 총수.

그리고 한 번 걸리면 끝장나기로 유명한 괴팍한 성질.

조교 중 하나가 커피에 타는 각설탕 개수를 잘못 넣었다가 그대로 잘린 일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드,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런 이의 귀빈을 함부로 대했다간 후에 크게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이걸 이해를 못 한다고!

그리고 라이티노의 그런 성격은 지금 강의실 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이 쉬운 걸 대체 왜 못하느냐는 말이지!

카인은 뒷문에 난 창으로 강의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사형으로 높아지는 경사에 책상이 배치된 구조.

허공에 띄워진 마법 수식을 보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라이티노가 있었다.

─거기 너! 알아들어? 알아듣냐고!

카인은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흠잡을 데가 없군. 쌓아 온 연륜이 있다는 거겠지.’

정보를 전달하고 풀어 가는 방식이 명쾌했다.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고 중요도가 낮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다만 내용 자체가 학부생 수준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강의실 안 학생 대다수가 상급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이 납득이 되는군.’

카인은 뒷문을 열고 강의실 맨 뒤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지금 여기서 전(電)계 원소가 각각의 보조 원소와 결합해 나가는 방식은….”

라이티노의 시선이 카인에게 향했다.

학생들도 누군가 들어왔음을 눈치챘지만,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뒤를 돌아보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또 웬 불청객이란 말인가.

라이티노의 눈이 찌푸려지려던 순간, 카인은 패를 꺼내 들어 보였다.

“……!”

라이티노가 순간 움찔했다.

이내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더니 고대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하신 질문의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를 수 있어! 모를 수 있지! 멍청해서 모르는 걸 어찌 탓하겠나!”

급격하게 좋아진 라이티노의 기분에 학생들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꾸지람을 듣지 않고 넘어갔기에 영문 모를 행운에 감사했다.

“오늘은 이상! 여기까지다!”

학생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우르르 빠져나갔다. 곧 강의실에는 카인과 라이티노만 남았다.

“지금 그 패를 가지고 있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지.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오랜만입니다. 강의가 아주 인상 깊더군요.”

라이티노가 혀를 쯧 차며 말했다.

“강의가 좋으면 뭐하나.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알아먹지 못하는 바보천치 투성이인 것을.”

그의 시선이 카인의 얼굴로 흘긋 향했다.

“그보다 얼굴이 바뀌었는데,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인공 가죽인가? 나도 소싯적 모험을 다닐 때 자주 사용했는데, 요즘 건 훨씬 더 정교하게 잘 나오는구만.”

“맞습니다. 아무래도 원래의 신분이 그리 떳떳하지는 못한지라 말입니다.”

라이티노가 미소 지으며 카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분이 무슨 상관인가. 난 그런 것 전혀 신경 안 쓰네. 중요한 건 자네가 내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

라이티노는 뒷말은 삼켰다.

‘어차피 머지않아 현재의 신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그리고 다시 얼굴을 떼어 거리를 벌린 후 말했나.

“바깥에서 목표로 하고 있다던 일은 잘 마무리되었나?”

“예.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할 수 있겠군요. 당분간은 사업차 벽 안쪽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좋군, 좋아. 환영하네. 환영하고말고.”

라이티노는 호쾌하게 웃으며 카인의 등을 두드렸다.

“이럴 게 아니라 위로 올라가지. 계속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순 없으니 말이야.”

“좋습니다.”

강의실을 나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중, 라이티노가 물었다.

“아까 내가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 어떻게 생각하나?”

“그 상황에선 전(電)계 원소를 증폭과 확장의 양 보조 원소 사이에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풍(風)계 원소를 일정 비율 섞어 역순 배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라이티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범 답안은 물론, 내가 생각지 못했던 보완법까지. 확실한 천재야. 아주 만족스러워.’

마법적 재능이 라크센에 뒤지지 않음은 이미 투기장에서 확인했다. 거기에 이론적인 부분까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절대 놓치지 않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겠어.’

라이티노가 깊은 희열에 미소 지을 때, 다시 한번 ‘쾅’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유리 벽 너머 얼음 덩어리들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타르, 이 노망 난 늙은이가 탑을 다 때려 부술 작정인가 보구만.”

“아이타르라면 마탑의 주인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별일은 아닐세. 아끼던 제자가 견학 중에 실종되었지. 제자가 그 아이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닌데, 참 유난이 따로 없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라이티노의 얼굴엔 은근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라이티노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겠지. 그 역시 라크센을 제자로 들이려고 했었으니.’

아이타르와 라이티노의 질긴 인연은 마탑 학부생 시절부터 이어졌다.

1, 2등을 번갈아 차지하며 서로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을 길렀다.

‘졸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

논문 발표를 비롯한 학계에서의 활동.

벽 바깥에서의 모험과 한 여인에게 동시에 품게 된 사랑.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경쟁은 이제 ‘후계자 경쟁’으로 이어져 있었다.

결국 아이타르를 스승으로 선택한 라크센을 보고 라이티노의 눈이 뒤집힌 건 두말할 것 없는 일이었다.

지하 투기장에서 카인을 보고 구원자를 만난 기분을 느낀 것 역시도.

띵─

엘리베이터는 최상층 바로 아래인 43층에서 멈췄다.

44층은 아이타르가 사용하는 꼭대기 층이었다.

‘네가 마탑에서 나보다 층이 높아 봤자지. 회합 때 내 끝내주는 제자를 보고 콧수염을 부르르 떨 준비나 하라고.’

마탑의 고층은 아이타르와 라이티노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단독으로 쓰는 층이었다.

라이티노가 넓은 복도를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가? 나중에 이런 곳에서 일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은가?”

“확실히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두 사람은 응접실로 들어가 대화를 이어 갔다.

“일전에 한 제안은 생각해 봤나? 내 제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제안 말일세.”

“긍정적으로 생각은 해 보고 있습니다만, 아직 마음의 결정이 서지는 않는군요.”

이후 벽 안쪽의 생활이나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갑과 을은 명확했다.

라이티노는 어떻게든 카인의 환심을 사려 애를 썼고, 카인은 여지를 남기는 식의 화법으로 라이티노의 애를 달게 만들었다.

밝힐 수 있는 선의 정보를 적절히 드러내면서.

“요한이라. 이곳에서의 이름은 일단 그렇구만. 신약 개발의 주인공이 자네였다니 놀랍구만, 놀라워.”

라이티노는 ‘끙’ 신음을 흘렸다.

신약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소문의 주인공이 이 젊은 천재라면 치료제도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 봐야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많은 경험을 했기에 석화증의 치료제라 해서 남들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돈으로 매수하는 건 큰 효과가 없겠군.’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그보다 혹시 황실에 출입을 자주 하시는 편입니까?”

“응? 황실 말인가? 거긴 나조차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네. 황제 폐하가 지정한 이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말일세.”

“그렇군요.”

라이티노는 카인이 황실에 출입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젠장. 제자로 삼으려면 잘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말이야.’

안달이 난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벽 안쪽에 오래 머물 생각이면 라티움을 한 번 견학해 보지 않겠나? 여기서 멀지 않네. 자네도 마법에 몸을 담근 이이니 보아 두면 견문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걸세.”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라이티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카인은 신약의 개발자인 동시에 제약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앞으로 재계에서 많은 활동을 이어 나갈 터.

라티움의 총수이자 재계의 선배로서 연륜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점수를 쌓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서류만 처리하고 가세. 조교 놈 중 일 처리가 제대로 된 놈이 없어서 말이야. 20분 정도면 될 걸세.”

“그럼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마탑의 다른 곳도 둘러보고 싶군요.”

“알겠네. 내 빨리 처리하고 시간에 맞춰 정문으로 가겠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43층을 나섰다. 마탑 곳곳을 살피며 자신의 지식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 나갔다.

‘내가 아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라크센이 사라졌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큰 변수가 될 요소는 없어 보였다.

어느 정도 탐사를 마친 카인은 정문으로 다가가 벽에 기대섰다.

“잠깐 나 좀 보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젊은 남성 무리가 다가왔다.

‘뻔한 이야기군.’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카인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대충 들었지. 하지만 내게 어제 그런 망신을 줘 놓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볼트기어의 차남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방금 생각을 마친 참이었으니까.

만일을 대비해 볼트기어에 대한 조사도 마쳐둔 상태.

황실 외곽에 위치한 마나 탱크들의 부속 보충과 수리를 볼트 기어가 맡고 있다고 들었다.

깊게 들어가진 못하지만, 황실의 대략적인 분위기쯤은 파악할 수 있을 터.

‘덕분에 시간을 아꼈군.’

그것 외에도 샌더슨에게는 볼일이 많았다.

가령 기사학교를 다니고 있을 반 우즈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그쪽을 찾아가려던 참인데.”

카인은 벽에 기댔던 등을 바로 세우며 샌더슨 무리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 자들은 누구인가? 자네 친구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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