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입국 (2)
“내 이름은, 샌더슨 리카르도! 리카르도 가문의 차남! 그쪽도 이름을 밝혀라!”
“요한.”
“뭐? 성은….”
“그쪽에게 알려 줄 성은 없다.”
카인은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 한 자루를 내려 무심하게 상태를 살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나를 이기면 알려 주지.”
샌더슨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결투를 할 때는 서로의 가문과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례.
지금 상대의 행동은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어디서 검 한 번 안 잡아 본 샌님 따위가…!’
검을 오래 휘두른 자의 손에는 굳은살이나 흉터 따위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은 그 곱상한 외모만큼이나 하얗고 깨끗하기만 했다.
아마 태어나 궂은일 한번 해 보지 않고 자라왔으리라.
‘어디 있는 집 자식인가 본데, 그 자존심 때문에 오늘 크게 다칠걸.’
검을 쥐는 자세로 보아 어디서 본 것은 있는 모양.
하지만 그래 봤자.
이쪽은 기사학교 고학년 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실력이었다.
‘마나까지 쓸 필요는 없겠지. 일반인을 상대로 진심을 다했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대련이라면 같은 기사끼리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
생사를 건 결투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었다.
적당히 망신을 주어 쫓아내리라.
허공에 검을 휘둘러 보고 있는 카인을 보며 샌더슨은 생각했다.
카인이 말했다.
“장소를 옮기지. 곧 살게 될 공간이 망가지면 안 되니 말이야.”
“내가 살 집이지. 걱정해 줘서 고맙군.”
결투 장소는 저택 밖의 분수 앞으로 결정되었다.
걸음을 멈춘 행인들이 대문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저기 봐요. 결투를 벌이나 봐요.
─리카르도 쪽 둘째 아들이네요. 그런데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모가 정말 근사하네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이 저택으로 이사 오는 걸까요?
대다수는 귀부인들로 샌더슨이 알고 있는 얼굴도 몇 보였다.
소문 주고받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
샌더슨은 씩 웃었다.
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댁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는 소문이 이 동네에 쫙 퍼질 테니까.”
“혀가 길군. 선공을 양보하지.”
화가 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어차피 곧 땅바닥을 뒹굴고 목숨만 살려달라 빌게 될 터였다.
“건방진 자식!”
샌더슨은 자리를 박차며 카인에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곳곳이 빈틈 투성이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쿵!
“……?”
그리고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 바닥을 뒹굴어야 할 것은 녀석인데, 왜 자신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단 말인가?
“입이 요란한 것에 비해서는 형편없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세를 취했다.
“기사의 승부에 발을 걸어? 비겁한 수를 쓰는군.”
샌더슨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그의 붉어진 얼굴이 당황을 여실히 드러냈다.
‘젠장,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는데.’
얼굴 전체가 화끈했다.
통증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샌더슨이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공격을 피했던 카인의 움직임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조금 더 경계를 취했을 터.
하지만.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
그는 지금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노에 매몰되어 있었다.
챙!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순식간에 공방이 오갔다.
처음에는 카인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세가 역전되었다.
‘이, 이 녀석 대체 뭐지? 마나유저인가?’
회로는 구축하는 것만으로 육체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런 자신을 압도한다는 것은 상대도 마나유저라는 반증이었다.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검술.
분명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럼에도 정교하고 빈틈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치 이쪽의 모든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는 기계를 상대하는 느낌.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안 돼.’
벌써 몇 번이나 바닥을 뒹굴었는지 모른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몸은 흙먼지로 가득했다.
이미 망신은 망신대로 당한 상황.
여기에 정체도 모르는 놈에게 패했다는 사실까지 퍼진다면 사교계는 물론 기사학교에서도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먼저 마나를 사용해 놈의 검을 벤다.’
놈은 이쪽을 얕보고 있기에 마나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방심한 틈을 노려 선수를 치면 되는 일.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한순간만 사용한다면 관중에게 들킬 일도 없었다.
샌더슨은 체내의 회로를 가동시키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
회로에 집중한 탓에 다음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고, 그대로 무언가에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풍덩!
빗물이 고여 있던 분수였다. 낙엽 가득한 흙탕물에서 재빨리 일으키려는 찰나 목에 검이 드리워졌다.
“승부가 결정 난 것 같군.”
햇빛 아래, 놈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졌다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문 밖에서 수군거리는 관중들이 보였고,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샌더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챙겨 대문 쪽으로 달렸다.
관중들이 길을 비킬 틈도 없이 어깨로 밀고 나가 차에 타 시동을 걸고 사라졌다.
─괜찮아요?
─어휴, 왜 저런담. 자기가 져 놓고서.
─분노조절 장애인가 그거 아닐까요? 요즘 애들이 많이 걸린다던데.
그가 지나간 자리엔 뚝뚝 떨어진 물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결제를 마저 진행하지.”
“아, 예!”
당황해 굳어 있던 중개인이 서류철을 들고 카인에게 다가갔다.
행인들은 카인이 저택 안으로 사라진 한참 뒤에도 대문을 떠나지 않고 수군거렸다.
저택의 새 주인에 대한 흥분과 기대, 온갖 추측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 * *
“그건 그쪽이 아니야! 이쪽으로 날라야 한다고!”
“곧 3번 차량이 도착합니다. 짐을 다 내린 차량은 공간 확보를 위해 빠져 주십쇼!”
거대한 트럭에서 내린 인부들이 분주하게 짐을 날랐다.
청소부들이 깔끔하게 단장을 마친 저택 안에 집기들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아! 그 테이블은 이쪽에 놔 주세요. 식기는 엄청 비싼 물건이니까 조심히 다뤄 주시고요.”
에스텔은 저택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총총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지시를 내렸다.
현장을 둘러보던 카인이 말했다.
“볼일을 보고 올 테니 정리를 마저 끝내고 있지.”
“알았어요. 제가 호위로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 안쪽에 강자들이 바글거리는 것은 사실이나, 이유 없이 싸움이 일어나는 무법 지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은 돌발 상황에 처해도 쉽게 당하지 않을 무력에 도달해 있기도 했다.
‘여력이 되었다면 실버팽과 잿빛늑대들을 데리고 왔겠지만.’
시선을 끌 필요는 있지만,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실버팽과 잿빛늑대는 러스트우드로 돌아가지 않고 47번 구역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생명의 씨앗은 모두 네게 넘기지. 어떻게 사용하든 네 자유다.」
실버팽은 생명의 씨앗을 어디에 심을지 고민했고, 러스트우드는 그 장소로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네가 허락해준다면 47번 구역에 남고 싶다. 씨앗을 어디에 심을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카인과 실버팽의 계약은 그렇게 연장되었다.
이제까지와 같이 주거와 기타 편의를 제공하고, 전투 용역을 받는 식으로.
끼이이─
저택 문을 열고 나서자 잔뜩 몰려 안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마, 말 좀 걸어 봐요. 여기 이사 오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그쪽이 걸어 봐요. 전 낯가림이 심해서요.”
“갑자기?”
모두 이곳 고급 주거 단지에 사는 고위층 부인들이었다.
카인 쪽으로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서로 밀리고 밀치는 모습.
호기심이 동하나 어제 카인이 보였던 인상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우물쭈물했다.
“곧 초대장이 갈 겁니다.”
“예?”
카인은 그들을 향해 목례를 한 후 한마디를 던졌다. 멍하니 서 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다.
부우웅─
차를 타고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번 구역에 도착했다. 건물 사이로 높이 솟은 첨탑이 보였다.
마탑.
대륙 최고의 지성이 모인 연구 기관이자 미래의 대마법사들이 양성되는 최상위 교육 기관.
정문으로 차를 몰자 바리케이드가 내려와 앞을 막았다. 경비가 다가와 물었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라이티노 교수님과 면담이 있어 방문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요한입니다.”
“오늘 전달받은 방문객 명단에는 없는데….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연구실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카인은 몸을 돌려 경비실 쪽으로 향하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로 패 하나를 제시했다.
라티움의 상징,
톱니바퀴가 그려진 패.
과거 지하 투기장에서 라이티노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경비는 눈에 이채가 번지더니 이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귀빈이셨군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철컥!
카인은 바리케이드가 사라진 자리를 지나 안으로 진입했다.
마탑 주위로 연구소나 학생 회관 따위의 부속 시설이 넓게 퍼져 거대한 교정을 형성하고 있었다.
“저거 메르카두 S시리즈 아니야?”
“안에 누가 타고 있는 거지? 학생 중엔 저런 차 타는 사람이 없는데.”
각 학년을 나타나는 색의 로브를 입은 이들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카인은 마탑 옆에 마련된 주차 공간에 차를 멈춰 세웠다.
차에서 내려 입구로 향하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쾅! 쩌정!
높디높은 마탑.
그곳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꽝꽝 언 파편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크기와 숫자가 위협적이었다.
몸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주위에 당황해 굳어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소문의 종류가 다양해서 나쁠 건 없겠지.’
회로 내부의 마나가 빠른 속도로 4단계 정제에 다다라 투명해졌다.
마법을 사용할 때 신경을 쓴다면 마나의 색으로 인해 소란을 일으킬 걱정은 없었다.
“꺄악!”
“위, 위험해! 피해!”
위로 뻗은 카인의 손바닥에서 마나가 퍼져 나와 넓은 장막을 형성했다.
쿵! 쿠궁!
그 위로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들.
놀라운 광경에 눈만 크게 뜬 채 굳어 있는 학생들을 향해 카인이 말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움직이지.”
“아? 네!”
학생들이 모두 자리를 피한 뒤 카인은 마법을 해제했다. 얼음 덩어리들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
먼 거리까지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얼음이었다. 순도 높은 수(水)계 원소의 결정체.
‘마탑에 이런 마법을 구사할 인물은 하나밖에 없지.’
아이타르.
이 거대한 탑의 주인.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제자를 잃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스승.
카인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학생들을 뒤로 한 채 마탑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 *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엘렌 교수는 소파 위로 허물어졌다.
“하아.”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했다.
클랙필드에서 ‘그 사건’이 있던지 벌써 두 달. 계절은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탑의 촉망받던 기대주이자,
아이타르의 수제자였던 라크센.
그의 실종은 적지 않은 이슈가 되어 구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오빠가 지내고 있는 곳이 43번 구역이라고 했지.’
그것 외에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고, 이후 예언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맹약이 해제되었으니 거짓으로 보낸 정보는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휴직계를 쓰고 43번 구역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자신에겐 맹약의 징표가 한 개 더 남아 있기 때문에.
‘대체 그 사람은 정체가 뭘까.’
자신과 오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압도적인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던 남자.
그의 명령에 따라 일단 마탑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 여자를 통해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오빠를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어.’
엘렌 교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정말 약속이 지켜질까.
쾅!
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꽝꽝 언 벽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타르 교수.
그는 제자를 잃고 매일 같이 연무장에서 분노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견디지 못한 시설은 매번 파괴되었다가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라크센의 실종으로 견학을 맡았던 다섯 교수는 모두 중징계를 받았다.
아이타르는 다섯 교수의 견학 중 알리바이를 빠짐없이 조사했고, 그 결과 엘렌 교수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서워.’
엘렌 교수는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절대 들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품게 되는 감정이었다.
그 외에도, 죄 없는 학생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옥죄어 괴롭게 만들었다.
타각.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각. 타각.
발소리는 일정 간격을 두고 천천히 가까워져 왔다.
‘오늘 연구실을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타각. 타각.
가능성 있는 한 인물이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