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입국 (1)
“천국과 지옥 사이에 위치한 곳이겠죠. 입국 심사처는.”
에스텔은 선글라스를 벗고 벽 끝 멀리 일고 있는 뿌연 흙먼지 쪽을 보았다.
「부랑자들에게 경고한다! 지금 당장 벽에서 물러나라!」
「비겁한 벽 안쪽 새끼들! 다 죽여 버려!」
벽 위에 위치한 제국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무장 세력 하나가 보였다.
하지만 공성 무기나 장비 따위가 조악하기 그지없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레지스탕스군.”
“요즘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고 해요. 벽을 무너트리고 평등을 되찾는다는 구호가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죠.”
에스텔의 눈동자와 긴 머리카락은 어두운 금빛을 띠고 있었다.
탁한 빛깔이나 고급스럽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겨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었다.
카인 역시 머리는 흑발 그대로이나 얼굴은 바꾼 상태였다.
“지금 우리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가지.”
“그래요.”
두 사람은 입국 심사처 건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는 긴 데스크 앞에 마련된 대기석에 앉았다.
“은행 창구랑 비슷한 분위기네요.”
거의 같다고 봐도 좋았다.
초고가의 대리석 바닥과 벽면 가득 걸린 명화. 그리고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을 제외한다면.
그런 분위기와 별개로 입국 심사를 넣는 방문객들의 행색은 다양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안 되는 거냐고!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국 시민 스무 명 이상의 추천장이나 그에 준하는 인증서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뿐 아니라 비교적 남루한 행색을 한 이들도 눈에 띄었다.
입국에 대한 희망을 품고 무작정 심사처를 방문하는 이가 적지 않은 탓이었다.
“잠깐 저희와 함께 가시죠.”
“어, 어?”
곧 건장한 체격의 경비들에게 어깨가 붙잡혀 어딘가로 사라지긴 했지만.
“다음 고객님, 접수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상을 대하는 상황이 익숙한 듯, 직원은 태연한 미소로 다음 번호를 불렀다.
“요한.”
창구 앞에 앉은 카인이 말했다.
“예? 고객님. 죄송하지만 서류를 먼저 작성해 와 주셔야 하는데요. 신분증도 같이요.”
카인은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보았다. 그리고 뒤에 바삐 돌아다니는 다른 직원들 쪽을 보며 말했다.
“지금 시간에 방문한다고 전달이 되어 있을 텐데. 상급자를 불러 줄 수 있겠나?”
“갑자기 무슨….”
그때 뒤에서 상급자로 보이는 이가 다급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고, 고객님. 성함이 요한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직원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카인과 에스텔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쪽의 응접실로 향했다.
「누구 목 잘리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저분이 누구 손님인 줄 알고!」
뒤편에서 고함과 함께 따귀를 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장의 입김에 강력하긴 할 터였다. 벽 안쪽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니.
이후 응접실에서 형식적인 확인 절차를 거치고 두 사람은 벽 안쪽에 진입할 수 있었다.
“벽 안쪽에서 지내시는 동안 사용하실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필요할 때 불러 주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상급자는 허리를 굽신거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지금 이곳은 23번 구역이에요. 벽 안쪽에 직접 출입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죠. 첫인상이 어때요?”
잘 닦인 도로와 화려한 건물은 30번대 구역의 중심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
하지만 여느 상점 할 것 없이 외부 매대에 진열된 물건들이, 이곳의 치안은 벽 바깥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벽 바깥에 투입되었어야 할 경찰 인력이 모두 안쪽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곳은 냄새가 나지 않는군.”
“에? 냄새요?”
“불안과 가난의 냄새 말이다.”
“아, 그 하수구 비슷한 냄새라고 했죠.”
궁핍과 가난을 겪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품게 되는 가슴 깊숙한 악취.
하지만 이곳은 마치 거리 전체가 표백된 것처럼 아무 향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리….”
끼익─!
에스텔이 다음 행선지를 물으려는 찰나 스포츠카 한 대가 다가와 멈췄다.
선글라스를 낀 붉은 머리의 여성이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또각또각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입국도 환영하고요! 여기서 쓸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셨죠?”
붉은 머리 여성은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는 카인을 향해 인사의 표시로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주위에 들리지 않을 크기로 속삭였다.
“얼굴을 바꾸신 거죠? 미남자네요. 분위기로 금방 눈치챘어요. 이때 도착한다고 하시기도 했고.”
쐑!
그때 검집 하나가 그녀와 카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떨어지세요.”
“요한 님. 이 여자는 누구죠?”
붉은 머리 여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를 보며 에스텔이 말했다.
“일이 많이 바빴나 봐요, 피에타 님. 피부가 푸석해지고 다크서클이 더 내려앉은 걸 보면.”
“아, 에스텔 사제님이시구나. 요한 님과 같이 얼굴을 조금 바꾸셨네요. 입매를 조금 더 올리지 그러셨어요. 에스텔 님은 그게 흠이었는데.”
두 여자는 조곤조곤 대화를 주고받았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거 치워요. 인사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경호원 신분으로 온 거라서요. 임무 수행 중인데요.”
“두 사람 모두 그만하고 출발하지.”
카인의 제지에 피에타와 에스텔은 서로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 떨어졌다.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타 구역 안쪽으로 향했다.
“온통 요한 님 이야기뿐이에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치료제는 어떻게 개발했을까. 헥사메디컬의 전 대표와는 무슨 관계일까.”
“수익은 만족스럽나.”
“그럼요. 이미 주가가 수백 배 폭등했는걸요. 지금도 끝을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고요.”
마병의 치료제였던 큐어올과 달리 TX-001은 효과가 입증되었다. 주가의 상승 폭 역시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 경매장에서 요한 님에게 호위를 의뢰한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피에타는 운전을 하며 뒷좌석을 향해 이야기했다.
“덕분에 회사는 계속 확장하고 이번에도 한몫 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카인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귀인이자, 절대 놓치면 안 될 든든한 사업 파트너였다.
“내 도움이 없었어도 너는 성공했을 거다. 나와 만나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지.”
“전 요한 님의 그런 겸양도 좋아요. 그런데 있잖아요.”
피에타의 시선이 흘긋 옆자리로 향했다.
“왜 에스텔 사제님이 앞자리에 탄 거죠? 요한 님이 아니라?”
“원래 상전은 뒷자리에 타는 거예요. 그리고 안나라고 부르세요. 개명했으니까.”
“아, 녜녜.”
“지금 혀 꼬는 소리 낸 거예요? 뽑아 버려도 돼요?”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카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상업지를 벗어난 주택가.
줄지은 고급 저택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피에타가 미리 찾아 둔 매물이 이쪽이라고 했지.’
벽 안쪽의 활동 거점으로 저택 하나를 구매할 예정이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이들이 사는 곳 한가운데일 것.
‘이목을 끌 필요가 있다. 빠르게 인맥을 쌓아 화제의 중심에 서고 황실로 진입해야 하니.’
카인은 예언자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모든 인물을 떠올렸다.
카이사르 황제.
대륙 모든 권력의 중심이자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허락된 유일한 인물.
그리고 왕위 계승을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을 4명의 황태자.
그 밖의 고위 귀족들.
‘황실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황궁을 나서는 일이 극히 드물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황궁 안에 갖춰져 있으며, 하루 단위의 빡빡한 스케줄이 짜여 있다.
예언자가 엘렌 교수를 만나 라크센의 암살을 지시한 것도 분명 어렵게 시간을 내어 가능했을 것이다.
황실의 인물이 밖으로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단 직접 들어가 예언자를 색출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석화증 치료제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예언자를 떠보기 위한 수였다.
‘예언자, 백진우도 분명 원래 이야기의 흐름을 알고 있다.’
원래 주인공인 라크센이 죽었으니 작품의 흐름이 어그러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석화증 치료제는 이야기가 뒤틀릴 수 있는 정도를 크게 벗어났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 올 것이고, 그 순간이 놈의 최후가 될 것이었다.
그것이 카인의 방식이었다.
위험을 감수한 극단적인 효율성.
물론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13번 구역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탁.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앞에 나타난 저택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이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진짜 크네요. 다른 저택의 두세 배는 되겠는데요.”
“맞아요. 거대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오죠. 옛날에 몰락 귀족이 살았다는 소문이 있는 저택인데 꽤 오랜 시간 비어 있었어요.”
피에타의 말을 증명하듯 창문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담장은 마구 자란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비어 있는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비싸겠군. 그 크기만큼이나.”
끼익─
세 사람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이르는 길은 꽤나 길었다.
카인은 정원 곳곳에 자리한 조각상을 보며 물었다.
“저 조각들도 모두 저택에 포함되어 있나?”
“맞아요. 이름난 옛 거장들 작품인데, 저택이 비싼 이유에 한몫해요. 안에 중개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곧 저택의 정확한 매매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저택의 문을 여는 중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개인이 둘인가?”
“아뇨. 한 명으로 알고 있는데….”
끼익─!
“안 된다고 설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대금 지불을 다음 달로 미루고 싶다면 그때 이 저택을 구매하시는 게 맞지요.”
중개인으로 보이는 이가 청년 하나를 앞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누가 이 저택을 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당장 이곳에서 생활하고 싶단 말일세. 설마 내게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청년은 이후로 묻지도 않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덕분에 카인은 청년이 라티움에 자재를 납품하는 ‘볼트기어’의 차남이며, 그가 독립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청년은 중개인에게 설득이 먹히지 않자 얼굴이 뻘게져 소리쳤다.
“이이! 어음을 써 준다고! 몇 번을 말하나! 내 아버지 기업이 어떤 기업인 줄 알고! 우리가 납품을 중단하는 순간 라티움도 생산 라인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제 혈기를 못 이기는군.’
카인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볼트기어라면 꽤 규모가 있는 기업이기는 했지만, 감히 라티움에 비빌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재를 납품하는 하청에 불과했다.
“아! 피에타 님!”
중개인이 카인 일행을 돌아보고는 살았다는 미소로 소리쳤다.
“누구….”
청년이 채 질문을 던지기도 전, 카인은 그를 지나쳐 저택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거주한 지 오래되었지만, 관리는 나쁘지 않게 되어 있었다. 벽면 가득한 명화도 마음에 들었다.
“구매하지. 얼마인가?”
“예, 예?”
중개인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가 카인이 피에타가 말한 ‘손님’임을 깨닫고 부리나케 가격을 말했다.
“4억 3천만 실링입니다. 보시다시피 사용인들이 내부는 꾸준히 관리가 되어 있어 바로 입주하실 수 있습니다.”
4억 3천만 실링.
단순한 저택으로는 터무니없는 가격. 황실이 있는 수도와 근접해 있다는 특수성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 카인에게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군. 구매하도록 하지.”
“예? 조금 더 둘러 보셔도….”
“대금을 보낼 계좌를 부르지.”
카인의 쿨함에 중개인이 더듬거리는 찰나, 청년이 끼어들었다.
“잠깐,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청년에 허리춤에는 검이 매여 있었다.
앞으로 나서려는 에스텔을 향해 카인이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손짓을 보냈다.
“저택이 마음에 들어 구매를 하려고 하네만.”
“그걸 지금 몰라서 묻소? 내가 먼저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지 않소!”
카인이 중개인을 돌아보았다.
“대금을 나중에 치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나?”
“예, 예. 맞습니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중개인이 대답했다.
“물건은 먼저 값을 치르는 이가 주인인 법이지. 세상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군.”
청년의 얼굴은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상도라는 게 있는 법이오. 내가 몇 주 전부터 봐 오던 매물이니 양보하는 게 좋을 거요!”
“억지를 부리는군. 이런 저택에 살 정도로 격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데.”
이후 계속해 말다툼이 오갔다.
사실 말다툼보다는 일방적인 억지와 무시에 가까웠다.
카인은 평온했지만, 청년 혼자 목소리가 격앙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여, 여기 있습니다.”
카인은 청년을 무시하고 중개인이 건넨 명함과 계좌가 적힌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바닥을 찰싹 때리는 소리가 났다.
“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자가!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떨어진 흰 장갑이 보였다.
“결투를 신청한다! 그쪽도 남자라면 물러서지 않겠지!”
챙!
카인은 검을 빼 든 청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사 학교의 수습생인 것 같군.’
검으로 제르비아와 같은 강자는 이길 수 없다. 평생을 검과 함께 호흡해 온 이들이니.
하지만 이런 애송이라면.
‘굳이 마나를 쓸 필요도 없겠지.’
신체 강화 특성을 습득하며 카인의 육체 능력은 수인보다 조금 떨어지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강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돌덩이 정도는 우습게 주먹으로 으스러트릴 수 있는 수준.
카인은 허리를 굽혀 흰 장갑을 주웠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나쁘지 않을 터였다.
저택의 새 주인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포고로.
소문이란 자극적일수록 빨리 퍼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