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대국 (2)
“따님을 사랑하십니까?”
순간 청장의 콧잔등이 씰룩였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이지?”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제르비아 경위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죠.”
나이트를 잡은 청장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탁.
“하잘것없는 질문이군. 소중한 질문 기회를 그렇게 날릴 셈인가?”
청장 신분과 관련된 정보 따위는 일반 대중에게도 퍼져 있다.
가족 관계쯤 카인이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예, 괜찮습니다. 대답해 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탁.
카인의 폰이 앞으로 전진해 청장의 나이트를 잡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 내게 사랑 같은 감정은 없네. 그저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을 가를 뿐이지.”
청장이 비숍을 움직여 카인의 폰을 잡았다.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탁.
카인의 다음 수를 본 순간 청장은 눈을 부릅떴다.
체크메이트.
상대의 룩과 나이트 경로에 가로막혀 자신의 킹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런.’
잠시 감정이 흔들려 수에 신경 쓰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제가 이긴 것 같군요. 다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부인을 사랑하셨습니까? 돌아가신 두 부인 중 후처인 분을 말하는 겁니다.”
다음 순간 방 안에 바람이 일었다.
펄럭!
거칠게 요동치던 커튼이 제자리를 되찾고, 그 앞에 펼쳐진 광경.
날카로운 레이피어가 카인의 목 옆을 스쳐 있었다.
“내게 사랑 따위의 감정은 없다고 말했을 텐데. 자꾸 선을 넘는군. 무슨 꿍꿍이지?”
얇게 그어진 상처를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번만큼은 카인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빛만으로 상대를 죽인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청장이 처음 발산했던 살기가 순전히 상대의 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것은 실제 분노에 기반해 있었다.
식은땀으로 등이 흥건한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카인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청장의 역린은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앞으로 청장과의 관계에 있어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터였다.
카인은 진심 어린 얼굴을 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부족한 실력을 메꾸기 위해 저도 모르게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군요. 심기를 흩트려 수를 망치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청장은 카인을 한참 노려보다 검을 거두었다.
“마지막 경고네. 목에 바람 구멍이 나기 싫으면 조심하게.”
“주의하겠습니다.”
다음 대국은 청장의 승리였다.
“47번 구역에 나갔던 특무대가 레드스컬의 함정에 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돌아온 적이 있었네. 보고 상으론 그러했네만, 역시 자네 짓이겠지?”
심문관 같은 투였다.
이제껏 일어났던 일들의 인과 관계를 맞춰 보고 미지(未知)의 영역을 줄이고 싶은 것이리라.
“맞습니다. 제르비아 경위와도 대면했죠.”
카인은 특무대와 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특무대 사이에 내분을 일으킨 것.
그리고 제르비아를 사로잡은 것.
청장을 완벽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역시 나름대로 수집한 정보가 있을 테니.
그렇다면 사실을 말하되 꼭 필요한 부분만 거짓을 섞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하여 마지막 순간 제르비아 경위를 제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추측했던 바였다.
카인이 온전히 진실만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쪽 정보와 어긋나는 부분도 없다.
내분을 일으킨 것은 분명한 사실.
감탄과 동시에 후회감이 들었다.
‘역시 그때 더 파격적인 조건을 걸어 어떻게든 끌어들였어야 했는가.’
선택을 포기했던 원석이 훨씬 더 큰 값어치의 보석으로 밝혀진 기분.
속이 쓰렸지만 이미 대등한 위치가 되어 거래를 제안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의 공격이 거세질 거란 판단에 목을 베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청장님의 딸이니까요.”
반면 자신의 피가 이어진 자식은.
청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뱉었다.
“죽이지 그랬나.”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맹약을 맺었습니다. 묵은 감정은 블루서펜트라는 공동의 적을 쓰러트린 뒤로 미뤄 두기로요.”
“예상은 하고 있었네. 새로운 간부를 포섭하려 조직원을 보낼 때마다 제르비아 경위가 공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말이야.”
특무대의 활동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의심을 살 일말의 여지조차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마를 죽이는 순간 맹약이 끝나겠군.”
“…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이론상 그렇습니다.”
맹약의 완료는 계약자 양측의 인식에 달려 있다.
블루서펜트 보스의 존재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 경찰 눈에 비친 것은 오롯이 간부들뿐.
카인은 조직을 버렸다.
남아 있는 간부는 바마 하나.
제르비아의 입장에서 바마가 죽는다면 블루서펜트는 완전히 붕괴하게 되는 셈이었다.
카인의 경우에는 청장이 쓸모가 없어진 보스 신분을 버릴 것을 알고 있다.
복수 대상에 포함된 바마가 죽음으로써 블루서펜트의 괴멸이 완성되게 된다.
“바마는 자네 쪽에 붙어먹었지. 아마 어떤 협박에 의한 것이겠지만. 쓸모가 없어졌으니 처리하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맹약이 완료되면 제르비아 경위는 다시 검 끝을 저에게 향할 겁니다. 벽 안쪽에서의 활동에도 지장이 생기겠지요.”
“…그건 곤란한 일이지.”
“더욱이 그가 밀수를 통해 내오던 수입도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청장님이 다시 힘을 써 주신다면 사업을 재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청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카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일리가 있군. 치료제로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무시할 금액도 아니야. 녀석은 살려 두는 것으로 하지.”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긴 이야기를 나눴다. 양도할 주식의 수와 밀수 사업으로 낼 수익의 분배와 같은 것들.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장이 말했다.
“그럼 제르비아 경위와 바마의 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예. 그리고 정말 맹약을 맺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청장은 픽 웃었다.
“모든 일은 신뢰가 우선이지. 그런 마법으로 서로의 발목에 족쇄를 다는 건 너무 삭막한 일 아니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청장을 향해 카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청장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지.’
바마를 죽여도 제르비아와 자신의 맹약은 완료되지 않는다.
블루서펜트 간부 위에 보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르비아에게 이미 알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빳빳한 목을 찌르는 것은 결국 당신 딸의 검이 될 것이다.’
끼익- 탁!
청장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카인은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족쇄라. 인간관계의 삭막함이 아니라 후에 배신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나?”
카인의 물음과 동시에 진열장 뒤쪽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자 진열장 옆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채 무릎을 감싸 쥐고 있는 에스텔이 보였다.
오랜 시간 숨어 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난 모양으로, 그녀는 코에 침을 찍어 바르며 말했다.
“배신할 기회를 보는 건 서로 마찬가지잖아요. 이해관계가 맞아 동맹인 척하는 거지.”
“…그런다고 저림이 빨리 가시지는 않는다. 과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지. 그보다 어떤가. 상대할 수 있겠나?”
카인의 말에 에스텔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미안해요. 솔직히 말해 무서웠어요. 어떤 각도에서 공격하든 뛰어드는 순간 목이 꿰뚫리는 내 모습밖에 그려지지 않던걸요.”
카인의 시선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그녀의 옷으로 향했다. 숨어 있던 내내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카인의 손짓에 에스텔 주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 옷에 남은 습기를 날려 보냈다.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신으로는 누구도 쉽게 쓰러트리지 못할 자니까.”
“…강해질게요.”
풀이 죽어 있는 그녀 앞으로 카인이 다가섰다.
“조급해할 것 없다. 황실을 상대하기 전 교단과 경찰청을 무력화시키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작업이니.”
카인은 예언자가 황실의 인물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황실에 출입해 의심이 가는 인물들을 만나 예언자를 색출하는 것.
그리고 암살하는 것.
하지만 상황이 계획대로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 황실은 그리 만만한 집단이 아니니까.
‘최악의 경우엔 전면전을 감수해야겠지.’
황실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교단과 경찰청을 미리 와해시켜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일 터였다.
“대화 중 들었겠지만, 교단에서 나와 너에게 수배를 내렸다. 앞으로 지금의 얼굴은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
카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흑색 마나가 에스텔의 얼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원하는 머리 색과 얼굴이 있나?”
“없어요. 당신의 색으로 물들여 주세요.”
에스텔이 눈을 감고 흑색 마나가 공명음과 함께 그녀 얼굴에 스몄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슬쩍 눈을 떴다. 반대편 벽 거울에 바뀌어 가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 입술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눈동자는 조금만 더 크게…. 아, 콧대도요.”
* * *
2주 뒤.
석화증 치료제의 초도 생산이 완료되었다.
수북하게 쌓인 박스를 보며 나일스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유한 재료로 만들 수 있었던 물량 전부요! 생산 라인도 오작동 없이 잘 돌아가고. 테스트는 끝난 셈이니 이제 재료만 충분하다면 물량을 원하는 만큼 뽑아낼 수 있소.”
나일스의 다크서클은 더 길고 짙어져 있었다.
딱히 추가 업무를 지시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열정을 불태우며 밤을 새워 일하고 있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뽑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카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나무랄 곳이 없군.”
카인의 어깨 토닥임에 나일스가 감정이 복받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이후 공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추가 재료를 확보할 필요는 있겠지. 그렇지 않아도 다른 구역에 농토를 더 확보할 생각이다. 하지만.”
카인이 걸음을 멈추고 나일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향후 1년간 생산량은 조절한다. 재료가 남게 되더라도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치료제의 가치가 어떻게 결정된다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얼마나 희귀한 병을 고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 아니오?”
카인은 포장된 상자 하나를 열어 거기서 약병을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깔의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물론 그것도 맞는 얘기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는 따라가지.”
그제야 카인의 의도를 깨달은 나일스의 입이 벌어졌다.
“나는 치료제를 저가에 공급할 생각이 없다. 우린 자선 사업 단체가 아니라 기업이니까.”
이후 카인은 신분과 계급을 막론한 각계각층에 물량을 배포했다.
TX-001.
정보 길드의 공작에 따라 소문은 빠르게 퍼지고, 언론과 호사가들은 수군거렸다.
「헥사메디컬, 신약 발표. 과거의 오명 씻나?」
「마병에 이은 석화증 치료. 또 한 번 허가 내린 식약청에 로비 의혹 제기.」
하지만 실제로 기적을 목도한 이들의 수가 늘어나고, 여론이 반전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헥사메디컬, 연일 상한가, 이전의 사기극은 작전이었다는 분석도.」
「헥사메디컬의 현 대표, 그는 누구인가?」
대륙이 들썩였다.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기자들이 47번 구역의 연구 단지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이는 없었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접근 시 발포하겠습니다.”
삼엄한 경비 탓에 정문 안으론 발을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아니! 돈이 있는데 왜 약을 사지 못한단 말이오!”
억만금을 주고 치료제를 주고 사겠다는 이들의 연락이 쇄도했다.
하지만 물량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답변만 돌아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모두 고위층.
석화증 환자는 ‘벽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확률의 문제일 뿐, 정기가 비교적 풍부한 땅에서도 불운한 운명을 타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인터뷰를 따내! 목숨 걸고 잠입해서라도 정보를 캐 오란 말이야! 이 버러지들아!”
“하, 하지만 그런 짓을 하다가 정말 총을 맞은 기자가….”
“들었어요? 헥사메디컬의 현재 대표가 젊은 남자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전문가들 말마따나 전 대표의 구속이 극적 효과를 위한 연극일 수도 있겠네요.”
“폭풍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란 건 분명하죠. 요즘은 어딜 가든 신약 이야기뿐이니까요.”
전 대륙의 이목이 몰린 초유의 관심 속, 헥사메디컬의 새로운 대표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어 갔다.
그렇게 신약이 발표되고 한 달 즈음이 지난 어느 날.
탁.
33번과 23번 구역을 가르는 벽.
거대한 입국 심사처 건물.
쨍할 정도로 눈부신 태양 아래.
선글라스를 걸치고 여행 가방을 끈 두 명의 젊은 남녀가 그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