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믿음과 현혹 (3)
작은 새들이 나무 위를 날고 싱그러운 풀 내음이 풍겨 왔다.
숲 곳곳에 세련된 디자인의 건물이 몇 채 솟아 있었다.
‘이건 정말….’
에스텔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모형 따위가 아닌 진짜 숲이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직접 눈으로 볼 일은 평생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숲.
하지만 그녀는 곧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지하인데 하늘이 어떻게…?’
푸른 하늘이 존재했다.
구름이 흐르고 태양은 빛났다.
온기가 전해지고 바람이 불어 실제 바깥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멍하니 서 있던 에스텔은 숲 안쪽으로 향하는 카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대체 어디에요?”
질문과 함께 에스텔은 옆을 스치는 나뭇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손은 가지와 잎사귀를 통과해 반대편으로 향했다.
“홀로그램?”
퍽.
카인의 넓은 등에 에스텔이 얼굴을 부딪쳤다. 고개를 들자 카인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둬라.”
카인의 앞에는 기둥 하나가 가슴 높이로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단순히 거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나무 한 그루가 고고히 서 있었다.
수십 미터 높이는 되지 않을까.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세계수가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압도적인 크기와 높이였다.
“이곳은 라이카의 거처다. 안식처라고 하는 게 더 나은 표현일 수 있겠군.”
카인은 기둥 위에 난 홈에 유타스의 목걸이를 끼워 넣었다.
빛과 함께 패드가 떠오르고, 거침없이 암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동시에.”
암호의 마지막 숫자를 입력하는 순간 숲 전체에 기이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공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짝 긴장한 에스텔이 메이스를 움켜쥐고 사방을 경계했다.
“……!”
그리고 점차 모습이 흐릿해지는 나무와 수풀을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동이 멎고 숲이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보았던 건물 몇 채.
그리고 세계수 자리에 남아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를 제외하고는.
에스텔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장과 바닥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관이 기계 장치에 연결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빨아들이듯 쉴 새 없이 꿀렁거리는 관들.
하늘과 땅을 향해 뻗었던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들이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에스텔의 머릿속을 스쳤다.
언젠가 들었던 교단에 대한 음모론 중 하나. 정말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치부했었다.
‘말도 안 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짙은 현기증.
알 수 없는 메슥거림.
“우욱!”
바닥에 쓰려져 속에 든 것을 토해 냈다. 계속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토해 냈다.
세상이 기울고 열병을 앓는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누군가 자신에게 질 나쁜 농담을 던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눈물 가득한 눈동자로 에스텔은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지연된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교단의 추악한 민낯이 숨겨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 *
“토양에는 정기라는 것이 있다. 세상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을 움트게 만드는 힘이지.”
카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지하 공간을 울렸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 토양에서 일정량의 정기를 부여받는다.”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쐐기처럼 에스텔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정기가 부족한 땅에서 태어나면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석화증이나 영면증 같은 것이 그 예이지.”
눈물 때문에 시야가 뭉개졌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기가 완전히 고갈된 땅에서 태어날 경우,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표식이 몸에 새겨진다.”
그럴 리가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세상은 그걸 마병이라 부른다.”
온갖 생각이 폭풍처럼 몰아쳐 에스텔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한참 뒤에야 그녀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지고, 넋 나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여신상은…?”
“땅에 있는 정기를 흡수해 이곳으로 전송하는 역할을 한다. 대륙에 있는 모든 여신상이 일종의 송신탑인 셈이다.”
카인은 기계 장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기는 이 장치에 의해 고농도의 마나로 변환된다. 마나는 다시 대륙 전체에 퍼진 각 여신상으로 재전송된다.”
에스텔은 몸을 벌벌 떨었다.
당장 거짓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실의 눈’ 특성은 카인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그녀에게 일러 주고 있었다.
“신성 마법을 사용하면서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나?”
의문을 품은 적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일 것이다.
신앙에 대한 고뇌 중심엔 늘 신성 마법이 자리해 있었으니까.
어떻게 의지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왜 신앙심이 흔들려도 마법의 위력에는 변함이 없는지.
회로의 마나가 소모되지 않는 것은 정말 신의 힘을 빌려 쓴다는 이유 때문인지.
교단에서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곳에서 생성되는 마나의 사용처 중 하나가 신성 마법이다.”
머릿속 퍼즐이 맞물린 순간 에스텔은 다시 한번 속을 게워 냈다.
투명한 액체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내가 이제까지 사용해 왔던 마법이….’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여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며 의지를 다잡았다.
신성 마법이 곧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그 힘을 빌려 신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여신상을 세웠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결국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마병의 발병률을 높이는 행위였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해자예요.”
“너는 피해자다.”
“아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가해자예요. 내가 이제까지 사용해 온 신성 마법은 모두 누군가의 생명을 대가로 이루어졌어요.”
카인은 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더 일찍 알려 주지 않았을까.
짧은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알았어야 할 진실이야.’
무슨 수로도 충격을 줄일 수는 없었을 것이며, 버텨내는 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오히려 카인이 배려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질문을 던지고 여러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신앙심에 망치질을 해 왔으니.
“마병을 치료하는 법은 간단하다.”
카인은 패드를 조작해 기계 장치 중심에 있는 단자함을 열었다.
기묘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 떠 있는 푸른 수정.
카인은 다닥다닥 붙은 얇은 관들을 거칠게 뜯어낸 뒤 수정을 꺼냈다.
“정기의 결정체다. 응당 지니고 태어났어야 할 정기의 양은 한참 넘어섰지. 이걸 삼키면 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상황은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에스텔이 떨리는 손으로 수정을 받아든 순간, 계단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텔! 그자의 말은 거짓이다! 그걸 삼키면 안 된다!”
유타스 장로가 어둠 속에서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모습.
일촉즉발의 상황에 두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고 더 다가서지는 못했다.
그는 카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흑마법사의 입에서 에스텔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보고가 사실이었어. 교단의 사제를 현혹하다니,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거지?”
카인이 조롱을 던졌다.
“입구가 꽤 빠른 속도로 닫혔을 텐데 용케도 들어왔군. 늙은 몸뚱이로 아주 대단해.”
유타스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고는 에스텔을 향해 외쳤다.
“에스텔! 이쪽으로 오거라! 저 사악한 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에스텔은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카인과 유타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스텔. 수정을 삼켜라.”
카인의 시선이 에스텔에게 향했을 때 생겨난 잠깐의 틈.
휘리릭─!
유타스가 칼날이 달린 구속구를 카인에게 던지는 동시에 자리를 박찼다.
탕!
구속구는 탄환에 명중 당해 바닥에 내리꽂혔다.
곧이어 발사된 카인의 ‘돌풍’이 유타스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
“크윽!”
유타스는 돌진을 멈추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왼쪽 어깨와 팔 윗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극심한 고통으로 유타스의 온몸이 경련했다.
자신의 갑옷은 교단 본부에서 직접 하사받은 것으로 다른 이단심문관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마탑 교수들이 사용한 최대 출력의 마법을 다섯 번은 버티는 것을 확인했다.
다섯 번이면 철퇴로 머리를 날리기 충분한 시간. 현역 당시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방해하지 마라. 너 따위가 끼어들 순간이 아니다.”
카인의 시선이 다시 에스텔에게 향했다.
“수정을 삼켜라. 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안 돼! 저, 절대 삼키면 안 된다!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거다!”
에스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인의 말이 진실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알고 지낸 기간으로 따지면 유타스 장로 쪽이 훨씬 길었다.
교단과 여신상의 실체도 한꺼번에 소화하기는 힘든 진실이었다.
끝없는 혼란 속에 그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결국 모든 선택은 직접 내려야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카인은 에스텔의 손에 총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끌어 총구를 자신의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대게 했다.
“유타스의 말이 거짓이란 건 알 거다. 네겐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하지만 그래도 유타스를 믿고 싶다면 이 방아쇠를 당겨라.”
“……!”
“에스텔! 당겨라! 어서! 흑마법사에게 정신이 현혹당한 것이냐!”
혼란이 가중되는 그때.
과거 유타스 장로가 했던 말이 에스텔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델 사제는 114번 구역에서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 사교도의 손에 목숨을 잃었단다. 안타까운 일이지. 나도 몹시 슬프단다.」
설마라는 생각.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유타스 장로님. 당신이 아델 사제님을 죽였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내가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대답을 들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 이제껏 이 질문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라도 듣게 될 진실이 두려웠던 걸까.
탕!
방아쇠를 당긴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유타스 장로의 머리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아래 피 웅덩이가 고였다.
에스텔은 곧이어 수정을 삼켰다.
빛무리가 그녀를 감쌌다 사라졌다.
“…….”
옷을 들쳐 마병의 표식이 배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순간,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흐느꼈다.
이미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은 끝을 모르고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목표를 이뤘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종교와 믿음이 뽑혀 나갔다.
참을 수 없는 공허함과 함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런 에스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카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맹약은 완료되었다.”
맹약의 완료 조건은 마병의 치료.
두 사람의 가슴에 새겨졌던 맹약의 표식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말해 줘요, 카인. 나는 이제 무얼 하면 되죠? 어떻게 살아가야 하죠?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무엇이든 다 알고 있으니까 제발─.”
“무얼 해도 좋다. 네가 평소에 꿈꾸던 삶을 살아가면 된다. 맹약이 끝났으니 더 이상 내 명령을 따를 필요도 없겠지.”
카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다른 인물보다 에스텔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건 거짓일 거라고.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
이제까지 많은 고생을 했으니, 맹약의 완료 이후에는 선택을 그녀에게 온전히 맡길 생각이었다.
‘그녀가 남는다면 좋긴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앞으로의 계획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카인은 유타스의 시체를 보고, 다시 에스텔을 보았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교단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든. 도시를 벗어나 당분간 요양을 하든. 평생 걱정이 없을 액수의 돈도 챙겨 주지.”
그녀의 정신은 강인하다.
결코 이 정도로 주저앉을 인물이 아니니, 의지에 따라 충분히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은 나의 몫이라고요.”
에스텔의 어깨가 들썩이고, 흐느낌이 섞인 웃음이 이어졌다.
한참 뒤.
그녀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로 카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맹약이 끝났어도, 앞으로도 계속.”
“그게 네 선택인가.”
“당신은 이미 내 세계를 망가트렸어요. 이대로 두고 도망가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더 고된 일들이 많을 거다.”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금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거리를 좁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적막 속, 카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너의 새로운 신이 되어 주겠다. 결코 교도를 배신하지 않을 신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의지의 대상.
그리고 삶을 이어 나갈 새로운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