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신, 종교, 그리고 계략 (2)
“악마들이 침공했을 당시 세워졌던 벽이라고 해요. 전쟁이 길어진 탓에 계속 증축을 거치며 현재 높이에 이르렀다고 하고요.”
황야에 세워진 장벽 앞.
에스텔은 여행 가이드처럼 말했다.
‘종교에 관해서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단 말이야.’
카인에게 뭔가 아는 척을 할 수 있어 신이 난 기색이었다.
“전쟁이라.”
“신의 사도가 하늘에서 내려와 악마를 막아 내는 걸 도와줬다고 해요.”
카인은 벽을 쓰다듬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신의 사도.
날개를 펼치고 무기를 든 악마.
두 세력이 벌이는 장대한 전쟁의 풍경이 벽 전체에 걸쳐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카인은 재잘거리는 에스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과연 그녀가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에스텔.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고 내 말에 따르겠다고 했었지. 단순히 맹약에 의한 제약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은 지금도 유효한가?”
“…당연하죠.”
카인은 이번 일의 끝에 자신이 에스텔에게 내리게 될 명령을 생각했다.
‘따르기 힘겨운 명령이 되겠지.’
몹시 불편한 상황이 닥칠 것이다.
또한,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맹약으로 행동을 강제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선택은 결국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일 모두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될 테니까.
연습이 필요했다.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는 연습이.
카인이 입술을 떼었다.
“유타스 장로의 목걸이를 훔쳐라.”
“뭐라고요?”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어떤 명령을 내릴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의외의 명령이 얼이 빠졌다.
“목걸이라니 그건 대체 왜….”
이내 당황했다.
유타스 장로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목걸이는 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
낡고 닳은 목걸이는 오랜 신앙생활의 증표이자 그가 헤쳐온 무수한 전장에 대한 기록이었다.
카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에스텔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다른 물건은 몰래 가져올 수 있어요. 하지만 목걸이는 힘들어요. 장로님의 분신과 같은 물건이에요.”
“라이카의 아지트를 찾는 데 필요한 물건이다. 네 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카인은 단호했다.
「라이카의 아지트를 찾는 일과 마병을 치료하는 일은 연관되어 있다.」
그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혐오.
때문에 라이카는 홀로 기거한다.
어딘가에 숨겨진 아지트에서.
부하들의 거처는 모두 구역 내 일반적인 장소에 존재했기에, 실버팽이 그 처리를 맡은 상태였다.
“구역 북쪽에 인공숲이 있잖아요. 거기에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무들이 모두 조형이기는 하지만….”
“긴말하지 않겠다. 오늘 자정까지 목걸이를 내게 가져올 수 있도록.”
카인은 등을 돌려 먼저 차에 탑승했다. 에스텔은 그런 카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두 사람은 라이카의 잔당이 있는 건물 위치를 파악하며 구역을 돌았다.
“식사를 하고 남은 구역을 마저 돌지.”
딸랑.
식당에 들어간 에스텔은 흠칫했다.
안쪽 테이블에 가면을 벗은 사교도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요. 내가 교단의 사제인 걸 알면 시비가 걸릴 수도 있었다.”
“아니, 이곳으로 하지.”
카인은 성큼성큼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사교도들 바로 맞은편 테이블이었다.
“…….”
에스텔은 별수 없이 카인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기 앞자리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라이카의 아지트를 찾는 것과 목걸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지금은 또 왜 이렇게 까칠하게 나오는 걸까.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힐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
“들지.”
에스텔은 소매로 손등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늦어도 3년이라고 하셨지! 악마가 이 땅에 내려와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지금 열심히 일해 봤자 아무 소용 없어!”
그때 사교도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에서 취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테이블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여신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버러지 같은 년. 차라리 우리 교주님을 믿어! 악마들이 내려올 때 방주에 올라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같은 테이블의 사교도들은 동의를 표하듯 킬킬거렸으며, 다른 사람들은 행여 불똥이 튀길까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카인은 생각했다.
‘평범한 사이비 종교는 아닌 것 같군.’
사교도가 말한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있어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은 몇 년 내로 종말을 맞는다.
악마 따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피난처 역할을 하는 방주 역시 준비되고 있다.
‘권력층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카인은 교주라는 자에게 한층 더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문관들이 도착하는 것이 이틀 뒤라 했나.’
빠르면 내일.
교주를 만난다면 서둘러야 했다.
심문관들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평생을 믿었는데 내 삶은 변한 게 없었어. 창녀 같은 년!”
에스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신앙심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저런 말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카인을 쳐다보았다.
소란을 잠재워도 되겠느냐는 눈빛.
하지만 카인은 평소와 달리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죽일 년! 이제껏 낸 헌금이 아깝지.”
그녀가 쥔 포크가 부르르 떨렸다.
참았다. 그리고 또 참았다.
“그거 아나? 여신은 사실….”
“난 이미 성경도 다 불태웠다고.”
쿵!
그녀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손등의 표식이 드러났다.
“듣자듣자 하니까 뭐라고요?”
사교도들은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표식을 보고는 표정을 바꾸며 비아냥거렸다.
“누구신가 했더니 사제님이셨구만. 우리가 틀린 말 했소?”
강하게 나오는 태도로 보아 마나유저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듯했다.
수적 우위도 자신감의 이유가 될 터였다.
“다른 종교를 믿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남이 믿는 신을 모욕하는 건 경우에 어긋나죠!”
“우리 사제님은 아직도 여신 따위를 믿나 보오?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응답조차 없는 신을?”
무리 중 원래 여신을 믿었던 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교단의 교리를 꽤 상세히 알고 있었고, 곧 그와 관련해 에스텔과 논전을 벌였다.
“그래서 여신이 세상에 현현한 걸 본 적이 있소? 물리적 증거 하나 있느냐는 말이오!”
“그건…!”
에스텔은 점점 밀렸다.
사교도들이 공격해 오는 부분은 자신도 평소 의문을 가졌으나 정답을 찾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여신을 믿으면 내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 아무리 착하게 살아 봤자 지금 이 순간이 괴로운데 선행과 믿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받아치지 못하는 상황. 에스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가자고! 술맛만 버렸네!”
사교도 무리가 빠져나가고, 그녀는 멍한 표정을 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허락도 없이 나서서.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 없었어요.”
“괜찮다.”
“저 사람들, 곧 심문관들이 올 텐데 목숨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더라고요. 교주라는 자에 대한 믿음이 너무 확고해요.”
에스텔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계속 그랬다.
“나이프는 고기를 썰 때 쓰는 도구다. 스프가 아니라.”
“아.”
“고기를 입자 단위로 분해할 셈인가. 그만하고 입에 넣지.”
“아?”
이제껏 홀로 의심해 오던 것들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을 믿고 싶은 걸까. 신을 부정하고 싶은 걸까.’
그중 무엇하나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감할 수 있었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 외에도 적지 않다는 것을.
그날 저녁, 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라이카의 잔당들에게 노획한 물품의 처리를 하러 다녀오지. 쉬고 있어라.”
호위를 자처하며 따라가는 게 옳으나 머리가 복잡해 그러지 못했다.
“밤늦게 돌아올 거다. 보스의 다음 수를 예측하기 위해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탁.
“그 사이 목걸이를 가져오라는 뜻이겠지.”
머리가 복잡하다.
일단 움직여 생각을 멈춰야 한다.
그녀는 호텔을 나서 유타스가 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에스텔!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저녁 시간 마지막 예배가 곧 끝나니 앉아서 잠시 기다리겠니?”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보이는 것만을 믿지 말라는 여신님의 말씀이란….”
참석한 신도가 몇 없음에도 유타스는 열성적으로 예배와 설교를 진행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침없이.
예배가 끝나고 에스텔은 보조사제들과 함께 성당의 뒷정리를 했다.
그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야 유타스와 독대할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고 싶구나. 오전에는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 못해 아쉬웠었거든. 차도 조금 가져오마. 홍차를 가장 좋아했었지?”
“맞아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사제복을 갈아입는 사람.
그리고 아델 사제와 함께 자신을 가장 오래 지켜봐 준 사람.
“빨리 다녀오마.”
에스텔이 고개를 끄덕이고 1분 정도가 지났다.
그녀는 기척을 죽이고 유타스가 사라진 성당 안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변한 게 없구나.’
어릴 적 기억 그대로였다.
복도를 따라 걷자 안쪽 다용도실에서 유타스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입술을 질끈 물고 유타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사제복과 책상 위에 놓인 소지품들이 보였다.
그 중엔 카인이 가져오라고 지시했던 목걸이도 있었다.
혹시나 싶어 들어왔지만 생각보다 쉽게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목걸이를 가져가려는 걸 장로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
불안감이 가슴이 뛰었다.
‘흥얼거림이 끊겼어. 지금 뒤에서 지켜보고 계신지도 몰라.’
가능성 낮은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잠깐 빌려 가는 것뿐이에요. 죄송해요.’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에스텔은 눈을 질끈 감고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키히히히─!
그 순간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쨍! 쨍! 쨍!
당황을 추스를 틈도 없이 바깥 복도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접이식 메이스를 풀어 들고 긴장을 곤두세웠다.
아직 깨지지 않은 집무실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키히히─!
창밖에 일렁이는 불빛과 그림자.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의식을 치르듯 성당 주위를 빠른 속도로 빙빙 돌고 있었다.
쨍!
깨진 창문에 얼굴이 나타났다.
‘악마…?’
아니, 악마는 아니었다.
악마 가면을 쓴 사교도들이었다.
에스텔은 창틀을 뛰어넘어 온 적을 향해 반사적으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와직!
“크악!”
적이 어깨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이어서 창틀을 넘으려던 적들이 에스텔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움찔했다.
“뭐, 뭐야? 사제들은 다 퇴근했다고 하지 않았어?”
“부, 분명 그랬는데. 늙은이 한 명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유타스 장로님이 목적?
성당에 침입하는 게 목적인가?
“여자 한 명이야! 겁먹을 거 없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적을 하나하나 쳐냈지만 그 수가 만만치 않았다.
“그 늙은이를 찾아! 항상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고 했으니까!”
쾅!
외침과 함께 열린 문 쪽에서도 적이 쏟아져 들어왔다.
‘목걸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낚아채는 동시에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부웅─!
달라붙어 있던 적들이 메이스에 쓸려 허공을 날았다. 범위 밖에 서 있던 이들과 부딪쳐 나뒹굴었다.
“단장님! 저기 저 여자 손에!”
에스텔은 마나로 몸을 감싼 뒤 적을 돌파했다.
‘적이 왜 유타스 장로님의 목걸이를? 카인도 그랬어. 이 목걸이에 뭔가 있는 거야?’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적에게 목걸이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복도로 나가자 유타스가 있는 다용도실에서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유타스 장로님은 괜찮으실 거야. 나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고 실력도 뛰어나신 분이니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그녀는 성당 중앙으로 향했다.
“……!”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난장판이었다.
사교도 수십이 성당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집기가 나뒹굴고 사교도들이 던진 횃불로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깡! 깡!
“흉물을 부수어라! 곧 다가올 세상에 거짓된 신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가 섬겨야 할 것은 신이 아닌 악마다!”
거대한 무쇠 망치로 여신상을 내리치고 있는 이들을 본 순간 그녀는 머리 뒤가 빳빳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