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31화 (131/227)

#131. 격동 (1)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싹.

싹 주위의 땅은 다른 곳보다 더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라이카가 생명의 씨앗이 담긴 주머니를 던졌던 순간이 머릿속에 스쳤다.

“푸른 샘의 마나 덕에 급속히 성장했나.”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생명수는 주위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을 뿐 성장 속도 자체는 다른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네 의지는 내가 이어 주지.”

카인은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주위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을 깎아 화분을 만들었고, 그곳에 흙과 함께 싹을 옮겨 담았다.

이후 카인은 부유를 사용해 지하 공간 위로 향했다.

탁.

라이카와 사투를 벌였던 발판에 다시 올라섰다.

「내가 이틀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부하들을 데리고 유적을 빠져나가라. 그럴 여력이 있다면.」

라이카가 있는 마지막 방에 진입하기 전, 실버팽에게 일렀던 말이었다.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하니 시간은 자신이 기절했던 때로부터 이미 이틀이 넘게 흘러 있었다.

기계인형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았다면 지시에 따라 유적 밖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푸른 샘이 고갈되어 유적 전체의 가동이 멈췄으니,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카인은 라이카와 전투를 벌였던 방을 지나 이전 방의 문을 열었다.

드드드─

텅 비어 있을, 혹은 잿빛늑대의 시체만 남아 있을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

그리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실버팽과 잿빛늑대들이 방 곳곳 벽에 기대어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개가 들렸고, 실버팽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유적에 진입했던 잿빛늑대는 일곱이었다. 그중 둘은 낙오했다. 또 하나는 이 방 중앙에 시체가 되어 있었다.

“…라이카는 죽었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그렇군. 녀석이 죽음을….”

잠시 감정을 추스를만한 시간이 지났다.

방 안 모두는 라이카의 최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그리고 카인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그에 관해 실버팽이 질문하려는 타이밍, 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틀이 지났다. 왜 유적을 빠져나가지 않았지.”

실버팽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네가 돌아올 경우 호위가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는 죄책감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독단적인 행동으로 제이나의 함정에 빠지고, 라이카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카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복귀가 아닌 대기를 선택했다.

“…….”

카인 역시, 실버팽의 그런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적 안에는 온갖 광석을 모아 놓은 창고가 존재한다.’

창고에는 자신이 마나회로를 구축할 때 사용했던 지르토늄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채굴지가 극히 한정된, 황실 소유의 광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광석.

실버팽의 전투 능력은 일반적인 수인 중에선 최상위라 할 수 있었다.

‘잠재력은 라이카에 밀리지 않는다.’

회로만 갖추고 수련을 쌓는다면 그 이상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의 계약은 라이카를 죽이고 생명수를 되찾을 때까지였지. 아직 끝내야 할 일이 남았다. 한 번만 더 내 지시에 불응한다면 계약을 파기하겠다. 지휘권을 내게 넘기는 데 분명 동의했었으니까.”

사실 계약을 완료한 후에도 적절한 조건을 걸어 잿빛늑대와 실버팽을 계속 전투원으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만약 슈프림 시큐리티와 함께 이번 계획을 수행했다면 결코 유적을 돌파하지 못했을 테니까.

회로를 구축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생각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면 이렇게 조금씩 지시를 어기는 일도 사라질 테니까.

“…미안하군. 알겠다.”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실버팽이 말했다.

카인은 실버팽과 잿빛늑대들에게 방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지시했다.

유적의 다른 방에 들러 확인하고 챙겨야 할 것들이 적지 않았다.

방을 이동하기 전 카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

“……!”

그 말에 실버팽의 얼굴에 담겨 있던 복잡함이 얼마간 풀어졌다.

카인은 근력을 강화해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향했다.

수인 특유의 직선적이고 숨김없는 감정.

썩 싫어하진 않았다.

분명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 그러한 행동을 택했을 테니까.

‘고쳐야 할 부분도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교정만 제대로 거친다면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전투원들로 거듭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방을 이동했다. 그 끝에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크고 고급스러운 문이 나타났다.

후우.

숨을 고르고 힘껏 문을 열었다.

끼기긱─

발을 내디뎠다.

유적의 주인.

마도왕국 왕족의 침실을 향해서.

* * *

입방형의 밀실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캡슐이 넷 존재했다.

카인은 다가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가루가 흡사 사람 형태로 눌어붙어 있었다.

첫 번째 캡슐에 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 캡슐도 마찬가지였다.

‘마도왕국 왕족의 최후가 이런 식이라. 이곳뿐 아니라 다른 유적 역시 마찬가지겠지.’

고대인들은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유적과 벙커를 만들었다.

왕족과 귀족의 경우 대륙에서 ‘무언가’가 사라질 때를 기다리며 캡슐 안에서 가사 상태에 들었다.

그들은 긴 동면에서 깨어나 푸른 샘에서 몸을 회복했을 것이다.

해당 시대에 살았던 누군가의 의도로 캡슐이 모두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저벅. 저벅.

카인은 마지막 네 번째 캡슐로 다가섰다. 다른 캡슐과 달리 뚜껑이 열려 있었고, 안에는 가루 또한 보이지 않았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신장에 맞춘 캡슐 크기.

누군가 캡슐을 빠져나갔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내부에 쌓인 두꺼운 먼지로 보아 그 시기가 상당히 오래전이라는 사실과.

캡슐을 나간 이의 정체 역시도.

‘현재 대륙에 살아 있는 마도왕국의 생존자는 오직 한 명뿐이니까.’

카인은 몸을 돌려 주위 선반에 존재하는 귀금속과 장신구를 챙겼다.

짝!

실크로 만들어진 검은 장갑이 카인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우웅─

손바닥으로 마나를 끌어 올려 불꽃 하나를 만들었다.

평소와 같은 양의 마나를 사용했지만 불꽃의 열기는 확연히 강했다.

카인이 챙긴 유물 전반은 그런 식이었다.

마나의 운용을 도와주거나.

출력 자체를 증폭해 주거나.

전원 고위급 마법사인 왕족이 사용하던 물건이니 성능은 보장되어 있었다.

쿠구구─

그때 유적 전체가 흔들리고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시설 전체에 남아 있던 잔여 마나가 모두 소진된 탓이었다.

카인은 픽 웃었다.

“불청객은 자리를 비워 주지.”

뚜껑이 닫힌 캡슐들을 바라보다 무심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 * *

쿠구궁!

유적이 무너지며 사방으로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수년 이상에 걸쳐 건축되었을 유적은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모래에 파묻혔다.

“허망할 정도의 최후군. 이 유적도, 라이카도.”

실버팽의 표정은 다소 공허했다.

“녀석의 최후가 궁금한가.”

“말해 줄 수 있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듣겠습니다.”

잿빛늑대들이 다가와 바위에 등을 기대거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들어갔던 잿빛늑대는 일곱.

나온 것은 넷.

동료를 잃어가며 싸웠으니 그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카인은 차량에 몸을 기대고 지평선 너머 저무는 노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하고 그들이 궁금해할 부분은 상세하게.

“마나로 이루어진 샘이라니. 인형들이 계속 복원되어 나타났던 이유가 이해되는군요.”

잿빛늑대 하나가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유적을 돌며 동력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푸른 샘을 모두 흡수하면 카인 님이 빠르게 힘을 늘리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특수한 경우일 뿐 대부분의 유적은 규모가 작다. 동력원인 샘의 크기 역시 그러하지. 공략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크지 않다.”

명쾌한 설명에 질문을 던졌던 잿빛늑대가 곧바로 납득했다.

카인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한 쪽 팔을 잃은 채로도 그렇게 싸우다니. 그리고 붉은 샘에 빠져 소멸했다고.”

실버팽은 라이카가 마지막까지 날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마나회로 덕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분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고 말았고, 카인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33번 구역에 있는 라이카의 거처다. 찾아가 회수해야 할 것들이 있겠지.”

라이카가 탈취한 생명수.

그가 이제껏 모아 두었을 씨앗들.

자리에 있는 모두 단번에 카인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너희에게 줄 것이 있다.”

카인이 꺼낸 화분을 본 순간 모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 그건!”

카인은 염동으로 화분을 띄워 실버팽에게 보냈다.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찾아 헤매고 갈구해 왔던 물건이기에.

실버팽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짙은 감정에 젖어있던 실버팽과 잿빛늑대들이 고개를 돌렸다.

카인의 손에는 생소한 생김새의 광석이 들려 있었다. 순간 늑대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이건… 카인 님의 마법이 몸에 걸려 있는 기분입니다.”

잿빛늑대들은 자신들의 몸에 감도는 회색빛의 마나를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놀란 건 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버팽은 예상했다. 하지만 나머지 넷 모두 회로 구축에 성공할 줄은….’

지르토늄을 이용해 회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 어제의 일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광석이다. 굳은 혈관을 뚫어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니….」

실버팽은 이제까지 자신이 알던 상식을 부정당한 얼굴을 했다.

카인의 입장에서 원리는 간단했다.

인간의 경우 성인이 되는 나이를 기점으로 혈관이 성장이 멈춘다.

노폐물이 쌓이며 굳기 시작하고 마나가 흐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수인의 경우 육체의 성장이 인간보다 훨씬 급격하게 이루어지지. 혈관이 일찍 굳어 회로를 구축할 시기를 잡기가 극히 어렵다.」

애초에 혈관의 성질이 달라 마나를 수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지르토늄을 이용해 혈관에 쌓인 노폐물을 밀고 갓 태어난 상태와 같이 만든다면.

「대기 중의 마나가 혈관으로 쏟아지며 ‘폭주’와 비슷한 상태가 될 거다. 몹시 고통스럽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옆에서 내가 도움을 주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지.」

실버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결정을 내리는 건 어디까지나 너희의 몫이다.」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카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석화증 치료제도 처음에는 불신했지만 결국 사실임이 입증되었지 않았나.

이미 은인과 같은 인물.

실버팽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하겠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다면 러스트우드에서 평생 헛된 몽상만 품다 죽었을 목숨이다.」

선택을 내린 결정적인 이유는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인 님.」

그건 잿빛늑대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내일 날이 밝았을 때 진행하도록 하지.」

그렇게 실버팽과 잿빛늑대는 다음날 지르토늄을 삼켰다.

「……!」

혈관의 노폐물이 녹아 사라지며 화끈한 감각이 온몸에 번졌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곧 대기 중의 마나가 혈관 중으로 밀려 닥쳤으니.

「쿨럭!」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작은 칼날이 혈관을 찢어발기는 것 같은 고통에 당장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이고 시야가 흐려졌다.

「참아라. 마나의 흐름을 놓치는 순간 온몸의 혈관이 터져 죽을 거다.」

실버팽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뱉어냈다.

「알고…있다….」

그렇게 지옥과 같은 몇 시간이 지났다.

태양이 하늘로 떠올랐을 때 실버팽과 잿빛늑대는 완전한 탈진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고생했다.」

머리가 핑핑 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카인의 그 말과 함께 모두 정신을 잃었다.

다시 시간이 지나 기운을 차리고 회복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적어도 하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카인은 인정해야 했다.

이들이 가진 힘에 대한 갈망과 의지를 얕보았음을.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시험을 해 봐야겠지.”

“시험이라고?”

“예?”

카인은 대답 대신 염동으로 근처의 바위를 들어 올렸다. 그 광경에 잿빛늑대들이 입을 쩍 벌렸다.

마법을 해제한 순간 바위는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쿵!

경험이 많은 실버팽은 카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지금 무슨…!”

반면 잿빛늑대 넷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카인 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발밑에서 들려왔다. 멀리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구구구구─

카인은 생각했다.

남들은 쉽게 얻지 못할 보상을 주었으니, 이제 한없이 굴러야 할 때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