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왕의 유적 (3)
전(電)계 원소를 비롯한 12종의 원소가 카인의 손아귀 안에 광포하게 소용돌이쳤다.
검은빛의 전류가 그물망처럼 퍼져 섬뜩한 궤적을 남기며 라이카에게 날아갔다.
파직!
라이카가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전류에 스친 그의 오른쪽 귀가 까맣게 타버려 검은 재로 날렸다.
허리는 직격타였다. 전류는 뼈와 장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입에선 피가 한 움큼 토해져 나왔다. 하지만 야수는 버텼다.
남아 있는 외팔을 번쩍 쳐들었다.
남은 미량의 마나를 모아 손톱에 둘러, 카인을 향해 내리찍었다.
찌지직!
마나와 공기가 마찰음을 일으켰다.
카인이 몸을 굴렸고, 다섯 개의 손톱은 바닥을 내리찍어 반쯤 박혀 들었다.
카인이 자세를 추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날아들었다. 나이프를 꺼내, 마나를 둘러 넓게 펼쳤다.
끼기기긱─!
손톱과 나이프.
마나와 마나와 맞부딪쳤다.
치열한 힘 싸움이 오가며 손톱과 나이프는 위아래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카인! 내 꿈을… 방해하지… 마라!”
“모두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거다…! 너희가 욕심을 부려 나를 배신하지만 않았더라면…!”
카인은 마나를 끌어올려 근력을 한 단계 더 강화했다.
끼긱!
양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던 나이프를 서서히 밀어냈다. 순간 팔을 크게 휘둘러 라이카를 떨쳐냈다.
라이카의 육중한 몸체가 휘청이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눈과 귀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텅!
라이카가 자리를 박차고 열린 문을 향해 뛰었다. 카인이 따라 뛰었다.
카인의 손에서 다시 한번 전류가 뿜어져 나왔고, 라이카는 몸을 굴러 피했다.
카인이 라이카를 향해 몸을 날리며 두 인물은 하나의 털 뭉치처럼 엉켜 들었다.
발판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으며, 손톱과 나이프가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휘둘러졌다.
땀과 피.
한순간의 틈도 놓치지 않고 카인의 마법이 라이카의 머리를 노렸다.
파직!
그때마다 라이카는 초인적인 반사 신경으로 직격타를 피해 냈다.
떨어지는 살점, 그리고 거친 호흡.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음으로 어떤 움직임을 취할지.
푸른 샘으로 뛰어들려는 상대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한편, 붉은 샘으로 밀어버리기 위해 분투했다.
탁!
그러던 중 카인의 몸이 크게 밀려 발판 밖으로 떨어졌다.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발판 끝을 붙잡았다.
부유 마법을 완성하기도 전, 라이카의 두꺼운 발이 카인의 손을 향해 떨어졌다.
카인은 발판을 놓고 재빨리 옆쪽을 잡았다.
쿵!
빈자리로 라이카의 발이 매섭게 떨어져 내렸다.
라이카의 발이 번개같이 들어 올려졌다.
그보다 먼저, 카인이 다른 손에 있던 나이프에 마나를 실어 라이카를 향해 던졌다.
크어엉─!!!
나이프는 정확히 라이카의 오른 눈을 관통했다. 고통에 찬 울음이 지하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카인은 발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힘껏 위로 밀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난간 윗부분을 붙잡는 동시,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쉬익─
난간을 회전축으로 삼아.
바람을 추진력으로 하여.
카인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돌았다.
회전이 끝나는 타이밍, 마나가 실린 발꿈치가 라이카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라이카의 거대한 몸이 흔들렸다.
격렬한 전투로 이미 휘청이던 난간은 라이카의 고통에 찬 몸부림에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붉은 샘에 떨어진 파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푸시이─
“카이이이인─!!!”
나이프에 관통당한 것은 분명 오른 눈. 하지만 흘러든 피와 땀 때문에 왼 눈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세상이 흐릿했다.
녹아 버릴 것 같은 머릿속.
분노와 의문이 메아리쳤다.
죽는다고? 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숲의 재건이란 꿈을 이루기 전에 나는 죽을 수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삶을 앗아가는가.
누가 감히 나를 죽음으로 모는가.
누가 감히, 누가 감히 나에게─
“카이이인─!!”
라이카가 카인을 향해 도약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가득한 공격.
카인은 발판 끝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석은 이미 모두 떨어진 상태였고, 육체와 회로 역시 한계에 몰려 있었다.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역시 제왕을 죽이려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건가.’
죽음에 근접할수록 라이카가 지닌 투지와 생명의 불꽃은 거세게 타올랐다. 자신을 위협하는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수인의 육체에 ‘최후의 전사’라는 고유 특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카인은 남은 마나 모두를 짜내어 손바닥으로 끌어올렸다.
최대로 보유할 수 있는 마나의 채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양.
회로 내에서 정제를 거치고 있었기에 단계는 마지막에 달해 있었다.
양이 적기에 전투 중에도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본래 신체 강화에 사용하려 안배해 두었던 마나.
카인은 순간적으로 마나 속 원소를 재배열해 사용할 마법의 종류를 바꾸었다.
크어어엉─!!
라이카의 거대한 몸체가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할 생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녀석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라이카─!!”
카인이 나이프를 들고 라이카를 향해 뛰었다. 서로 방어 따위 신경 쓰지 않은 공격이었다.
푹!
나이프가 라이카의 어깨를 찌르고.
“…….”
손톱이 카인의 복부를 관통했다.
누가 치명상에 가까운지는 분명했다.
“카인, 이 싸움은 내가….”
라이카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카인이 말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화르륵!
카인과 라이카는 서로를 반쯤 끌어안은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라이카의 등 뒤로 돌아가 있던 카인의 반대편 손에서 섬뜩한 화염이 피어올랐다.
“무슨─.”
화염은 반응할 틈도 없이 라이카의 등에 옮겨붙었다.
“크아악─!”
등이 녹기 시작하며 라이카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화염을 제거하려 했지만, 카인은 라이카를 놓아주지 않았다.
복부에 박힌 라이카의 손톱이 이리저리 비틀리며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카인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참아 냈다.
정제 단계는 높지만 사용한 마나가 적어 위력이 떨어졌다.
‘절대로 화염을 꺼트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라이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카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져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화염은 곧 카인에게도 옮겨붙었다.
“놓아라─! 함께 죽겠다는 생각인가─!”
“아니, 죽는 건 너 혼자다. 라이카.”
지독한 열기에 두 인물의 폐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바싹 갈라져 나왔다.
‘라이카. 네 생의 불꽃을 꺼트리는 게 불가하다면, 더 큰 불꽃으로 덮어 주겠다.’
카인은 틈을 노려 라이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힘껏 발판을 박차고 뛰었다.
탓.
거대한 불덩이가 추락했다.
까마득한 아래, 붉은 샘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라이카는 분노했다.
이 빌어먹을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고통 따위 느끼지 못하는 생물체라는 듯이.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의 몸만 멀쩡했더라면 감히 털끝조차 스치지 못했을 인간이라 생각했기에 그 분노는 더욱 컸다.
“애써 얻은 생명의 씨앗이 결국 너를 죽게 만들었군.”
“……!”
카인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명의 씨앗. 자신이 목숨을 던지며 이곳까지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
라이카는 몸을 비틀어 품에서 씨앗이 담긴 주머니를 어떻게든 꺼냈다.
그리고 힘껏 던졌다.
어디든 좋았다. 자신과 같이 붉은 샘에 빠져 소멸하는 것만 아니라면.
“내 노력은 헛되지 않…!”
생겨난 잠깐의 틈을 카인은 놓치지 않았다.
라이카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놓음과 동시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녀석의 가슴을 크게 박찼다.
퍽!
두 인물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밀려났다.
“……!”
아주 약간의 차이로 카인의 낙하지점은 라이카와 달리 푸른 샘이 되었다.
“카인─!!!”
그것을 깨달은 라이카가 포효를 내질렀다. 허공에서 몸을 허우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첫 번째 불덩이가 빠지고.
이어서 두 번째 불덩이가 빠졌다.
샘 깊은 곳을 향해 가라앉았다.
* * *
풍덩!
샘은 깊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진 카인이 바닥에 충돌하지 않고 다시 위로 떠오를 정도로.
카인의 육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샘 위 허공으로 점점 떠올랐다.
미묘한 흐름을 그리던 푸른 액체가 카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로 치솟아 용오름처럼 카인을 감쌌다.
콰아아─!
카인을 적으로 감지한 기계인형들이 샘 밖에서 도약했다.
콰직!
용오름에 휘말려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은 모두 샘 밖으로 강하게 튕겨 나갔다. 개중 일부는 붉은 샘에 빠져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용오름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더 이상 달려드는 기계인형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용오름을 이루는 푸른 액체는 점차 속도를 늦추며 카인의 몸에 흡수되었다.
쉬지 않고 계속하여.
공명음과 함께 푸른 빛을 발하며.
손상된 육체를 복구하고 회로의 품질을 높여 나갔다. 인공 힘줄과 같은 불순물은 제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힘줄이 자라났다.
길고 지난한 광경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샘에 있던 방대한 양의 푸른 액체는 모두 카인의 몸에 흡수되어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전투로 인한 깊은 상처나 화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새로운 육신을 얻은 것처럼.
텅 빈 샘의 밑바닥.
푸른 빛이 깊이 잠든 카인의 몸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오직 카인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 *
카인은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구덩이 한가운데.
바닥에 남은 습기가 이곳이 샘의 밑바닥이었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
카인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부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온몸은 활력으로 충만했다. 정신은 더없이 맑고 시야는 또렷했다.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발판에서 떨어진 이후의 일이 계획대로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회로 레벨: 3]
[마나 7,277 / 7,277]
마나의 최대치 역시 3,000 가까이 늘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구덩이의 벽 아랫부분에 뚫린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붉은 샘과 연결된 통로인가.’
부유마법으로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붉은 샘 역시 바짝 말라 있었다.
세상 만물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마나를 품고 있다.
그것을 추출해 이용 가능한 형태의 마나로 만드는 것이 붉은 샘의 기능.
마나는 두 샘 사이의 통로를 거치며 다시 한번 가공된다.
푸른 샘의 액체는 추출된 마나가 짙게 농축된 최종 형태라 할 수 있었다.
‘일종의 마나탱크. 분명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시설이 황실의 지하에도 자리하고 있지.’
푸른 샘은 유적의 시설을 가동하고 유지하는 동력원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멀리 광석 채굴지 쪽에 보이는 기계인형들은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 있었다.
카인은 다시 붉은 샘이 있던 텅 빈 구덩이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죽었다.’
[과업-증오의 불길]
목표: 배신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십시오. (2/3)명.
[잔여 특성 포인트: 2]
그건 확실했다. 과업의 목표 수치는 물론 그 보상으로 새로운 특성 포인트까지 생겼으니까.
‘복수는 사실상 끝이 났는가. 바마의 목숨은 이미 손아귀에 있으니.’
짙은 희열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큰 목표를 이뤄냈으니 한동안은 잠시 쉬어도 되지 않는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수도에 있을 한 인물을 떠올리며 다시금 복수심을 불태웠다.
쉴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카인은 허리를 숙였다. 푸른 샘 구덩이 벽 쪽에 붙어 있는 옷조각 하나를 떼어냈다.
불에 타고 남은 외투 조각으로 아공간 마법이 설정된 부분이었다.
카인의 손이 외투 조각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기능을 하는군.’
샘에 빠진 뒤 몸은 완전히 나신이었다.
카인은 아공간에서 옷과 코트를 꺼내 걸쳤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울을 만들어 매무새를 살핀 뒤 붉은 샘 쪽으로 향했다.
“…….”
구덩이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인은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아래로 튕겼다.
팅―!
열차에서 종업원으로 변장해 라이카의 객실로 들어갔을 때, 그에게 팁으로 받은 동전이었다.
노잣돈이었다. 이 세계에 그러한 개념은 존재하진 않지만.
유적을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카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푸른 샘 구덩이 쪽에 자라 있는 작은 싹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