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왕의 유적 (2)
이전 방과 마찬가지로 들어온 곳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에 문이 각기 하나씩 존재했다.
“카인, 왼쪽 문이다!”
실버팽의 외침과 함께 카인은 왼쪽 문을 향해 뛰었다.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마나를 주입해 잠금 패턴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패턴이 복잡해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 카인을 엄호해라!”
잿빛늑대가 반원 형태로 카인을 둘러쌌다. 그 상태로 기계인형과 전투를 벌였다.
기계인형의 공격은 날카롭고 매서워 여느 수인을 방불케 했다.
끼긱- 끼긱-
기이한 각도로 관절이 꺾여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천장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거나 바닥에 웅크렸다가 도약하기도 했다.
숫자는 대략 30기.
콰직!
그중 하나의 허리가 실버팽의 손톱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고, 해당 부위에 있던 마정석이 부서져 비산했다.
반으로 나뉜 상체와 하체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우웅─
동력을 잃은 기계 덩어리는 빛에 둘러싸여 바닥에 스미듯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흔적도 없이.
“몸체 내부에 동력원인 마정석이 존재한다! 핵을 노려라!”
실버팽의 호령에 잿빛늑대 하나가 기계인형의 허리를 공격했다.
콰직!
하지만 반으로 갈라진 허리엔 마정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상체만 남은 기계인형이 잿빛늑대에게 팔을 휘둘렀다.
쐐액!
‘피하기에는 늦었다.’
잿빛늑대는 정신이 아찔했다.
기계인형이 전투 불능에 빠질 거라 생각하고 들어간 공격이었다.
피하기에는 여의치 않았으며, 도움을 줄 다른 동료들은 각기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끝인가.’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몸에 생소한 기운이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발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콰직!
잿빛늑대는 재빨리 몸을 틀어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했다. 연이어 기계인형을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
자신의 몸 전체에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자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황하지 마라! 카인의 마법이다!”
뒤를 돌아 카인을 보았다.
카인은 문에 대지 않은 손을 잿빛늑대를 향해 뻗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여덟 줄기의 검은 빛 마나가 실버팽과 잿빛늑대에게 이어져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잿빛늑대들의 움직임이 더욱 거침없이 변해갔다.
카인은 다시 한번 마석을 꺼내 삼켰다.
강화마법을 여러 개체에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마나 소모가 배로 늘어남을 뜻했다.
마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장! 이 녀석은 허리 부분에 핵이 없었습니다!”
잿빛늑대의 의문에 대한 답은 카인의 입에서 나왔다.
유적에 입장하기 전 장착한 통신기기를 통해, 카인의 입에서 잿빛늑대들의 귀로 전해졌다.
“핵의 위치는 개체마다 다르다. 움직임을 눈여겨보면 파악할 수 있다. 래커드, 허리를 숙여 공격을 피한 뒤 적의 오른쪽 발등을 노려라!”
래커드라 불린 잿빛늑대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카인의 지시에 따랐다.
콰직!
기계인형의 발등이 부서지고 그 안에 있던 마정석이 비산했다. 쓰러진 기계인형은 아까와 같이 빛에 둘러싸여 사라졌다.
위잉─
문의 잠금 패턴은 절반 정도 해제가 되었다. 버텨야 할 시간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상태였다.
“베오탄, 뒤로 두 걸음. 공격을 피하고 바로 어깨를 찔러라.”
카인은 통신기기의 채널을 바꿔가며 잿빛늑대 하나하나에 지시를 내렸다.
슈프림 시큐리티를 지휘할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잿빛늑대는 지연 없이 지시에 따라 즉시 움직였다.
육체가 카인의 명령에 동기화되어 있다 해도 좋을 정도의 수준으로.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수인만의 반응 속도였다.
카인은 동시에 강화마법의 출력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무언가 올라왔다.
피.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각혈하는 모습을 보이면 잿빛늑대가 동요하고 말 테니.
카인은 마석을 꺼내 삼켰다.
울컥 올라오던 피는 마석과 함께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 삼켜졌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카인의 얼굴은 평온했고,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콰직!
잿빛늑대가 분전하며 적의 숫자는 줄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빛무리가 생성되며 적이 추가되었다.
“대장, 뭔가 이상합니다. 이 녀석 움직임은 분명 아까….”
분명 상대해 쓰러트린 적이었다.
파괴된 몸체가 완전히 원상복구 되어 전장에 다시 투입되었다는 인상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카인은 유적의 마지막 방에 있을 보상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몸이 망가지는 것은 상관없다. 부활 특성을 사용할 타이밍을 한 번 늦출 수 있을지도.’
라이카가 이 유적으로 도망친 건 예상치 못했지만, 오히려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최대한 버티는 데 집중해라!”
전투는 계속되었고, 모두가 문을 열고 있는 카인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위잉─ 철컥!
문에 주입된 마나가 마지막 패턴을 따라 움직인 순간 문이 열렸다.
카인은 다음 방으로 진입해 잿빛늑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화마법의 유지를 중단하고, 확보된 마나로 거대한 방호를 펼쳤다.
“이쪽이다! 모두 들어와라!”
문은 열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닫히고 있었다.
실버팽과 잿빛늑대가 카인의 외침을 듣고 다급히 방을 이동했다.
그 사이 기계인형들은 벌레처럼 방호에 달라붙었다.
간발의 차이로 인원 모두가 방을 건넜고, 문이 닫히는 순간 방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숨을 돌리는 잿빛늑대들에게 카인과 실버팽이 동시에 말했다.
“준비하도록.”
“준비해라.”
드드드─!
거대한 벽이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벽과 이쪽 사이, 빛무리에 감싸여 나타나는 인형들이 보였다.
잿빛늑대들은 거친 숨을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망, 공포, 두려움. 그런 것은 그들에게 거리가 먼 단어였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전투 감각이 깨어나며 그저 피가 뜨겁게 끓어오를 뿐이었다.
* * *
야수는 어지러웠다.
한쪽 팔을 잃은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인 탓일까.
아니면 평소 외면해 왔던 생각들이 한 번에 터져 버린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요인 모두 때문인지도.
“…….”
야수는 비어 있는 자신의 한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끊어진 팔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결핍.
비어 있음.
부족함.
그랬다.
자신은 처음부터 결핍을 타고난 존재였다.
제대로 된 자아가 갖춰질 무렵부터 줄곧 공허함을 느껴왔다.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싸우고, 번 돈을 모두 쓰며 술을 마시고, 본능에 충실해 사랑 없이 성욕을 풀고.
무슨 일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이 마음 한구석에 존재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한 번 읽어 보시는 게 어때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거든요.」
초췌한 몰골로 들어간 곳이 외딴 구역의 이름 모를 서점이었다.
무심코 집어 든 책에서 숲에 관한 내용을 보았다.
숲.
생소한 개념이었다.
부유층이 사는 거리에서도 어쩌다가 한 번 볼 수 있는 나무와 수풀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라고.
홀린 듯이 다음 장을 넘겼다.
낡은 페이지 위에 그려진 숲에 대한 상상화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대로 책을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밤을 새워 읽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기분이었고, 숲에 관련된 온갖 책을 읽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랜 기간 품어온 결핍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장소는 어디인지.
먼 옛날 고대에는 대륙 전체가 녹음으로 덮여 있었다고 했다.
시야 전체를 메운 푸르름과 동식물이 결코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현대에 숲은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직접 그 장소를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야수는 품에 손을 넣었다. 씨앗의 매끄러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목표의 막바지에 달했다 생각했다.
이제까지 몇 개의 생명의 씨앗을 모아 왔고, 슬슬 계획을 실행하기에 충분한 타이밍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일어났던 예상치 못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지간한 마법은 웃으며 피하거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카인이 사용했던 마법은 통상의 수준을 벗어났으니까.
스륵.
야수는 벽에서 등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의 눈앞, 방의 한 가운데에는 기계 부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야수가 쓰러져 있었다.
곳곳에 흩어진 파편과 잔해가 이 방에서 벌어졌을 격전을 예상케 했다.
“…….”
야수는 등을 돌려 반대편을 보았다. 마나가 부족해 열 수 없는 문 주위로는 유리 벽이 이어져 있었다.
문 너머로는 길고 거대한 발판이 이어져 있었고 끝에는 난간이 달려 있었다.
라이카는 시선을 내렸다.
까마득한 높이 아래에는 적갈색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유적 밑에 존재하는 지하이리라.
발판 바로 아래 위치에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가 용광로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각기 붉은 액체와 푸른 액체가 끓고, 그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수는 그 모습이 커다란 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주위로는 기계인형들이 존재했다.
푸시─!
기계인형들은 주위에서 캔 광석을 붉은 샘에 집어넣고 있었다.
광석은 고유의 색을 가진 연기를 피우며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반면 푸른 샘 쪽으로 들어가는 것은 몸체가 파손된 기계인형이었다. 인형이 인형을 나르고 있었다.
푸른 샘에 들어간 인형은 몸체가 완전히 복구되어 다시 건져 올려졌다.
일전에 이 유적을 방문했을 때도 본 풍경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지만.
‘분명 다리가 잘린 도마뱀이 푸른 샘에 빠졌다가 나왔을 때 다시 다리가 자라있었다.’
원리는 알지 못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붉은 샘은 대상을 녹여 에너지로 변환하며, 푸른 샘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상태를 복원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야수는 다시 한번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주입된 마나는 패턴을 그리다 말고 다시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나가 부족한 탓이었다.
“여기서 끝인가.”
힘을 다해 유리 벽을 내리쳐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조적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지금쯤 추격자들이 뒤를 쫓아오고 있을 터였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더 이상 기력이 남지 않았기에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저 인형들은 아무리 쓰러트려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마니까.
딸칵.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이며 길게 연기를 피워 올렸다.
백수의 왕이라 불렸던 자신이 이런 곳에서 최후를 맞다니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라이카, 죽기 전의 마지막 사치인가?”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야수의 몸이 번개같이 돌아갔다.
카인이 서 있었다.
카인의 등 뒤, 반쯤 닫혀가는 문 너머 기계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실버팽과 늑대들이 보였다.
“카인! 여긴 우리가─ 너라도─!”
철컥! 쿵!
문이 완전히 닫혔다.
침입자의 전진을 더 이상 허용치 않겠다는 듯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실제로 문이 닫히는 속도는 유적 내부로 진입할수록 빨라졌다. 때문에 다른 방에 갇혀 낙오한 인원들이 있었다.
카인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 다시 라이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
어쨌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마지막 방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는데. 못 본 사이에 완전히 괴물이 다 되었군, 카인.”
라이카는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카인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회로 내에서 마나 정제를 거칠 뿐이었다.
적막 속에 울리는 건 두 인물의 거친 호흡뿐이었다.
서로가 지칠 대로 지쳤으며, 이곳이 긴 싸움의 끝을 맺을 곳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하에 있는 샘에 몸을 담그기라도 하려 했나 보군. 팔이 재생될 거라 생각하나?”
라이카가 큭큭 웃었다.
“확실치는 않아.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인생이란 게 원래 도박인 법이니까.”
카인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과 라이카 둘 다 도박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측정 불가능한 변수를 기피하며, 철저한 계획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둘의 공통된 성향이었다.
카인이 라이카에게 마석을 던졌다.
“문을 열어라.”
자신 역시 지쳐 있기에 당장 라이카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라이카의 현재 마나에 마석으로 회복되는 마나를 합치면 딱 문이 열릴 양이 맞춰질 것이란 계산이었다.
“네 목적도 저 아래의 샘이겠군.”
라이카는 흐린 눈으로 마석을 바라보다 씹어 삼켰다.
자신의 마나를 완전히 소진하게 만들려는 속셈인 건 알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웅─
마나가 패턴을 그리며 문 위아래로 퍼져 나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카인과 라이카 모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철컥!
마침내 문이 열린 순간, 두 인물은 자리를 박차고 동시에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