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왕의 유적 (1)
멀리서 차량 한 대가 도착했다.
카인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프로이드와 레니였다.
“석화증 치료제의 샘플이네. 완성되는 대로 부랴부랴 가져왔네. 나일스가 약효가 어떤지 꼭 보고 돌아와 달라고 하더군.”
나일스는 약을 완성하자마자 피로에 쓰러졌다고 했다.
프로이드는 주사기를 꺼내 능숙한 동작으로 약을 주입했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보는 실버팽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늘이 줄 고통이 두렵다기보다는, 미지의 약물이 자신의 몸이 주입되는 것이 달갑지 않은 탓이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참으세요, 늑대 아저씨.”
레니가 주사기를 들고 실버팽에게 다가갔다.
조그마한 손이 팔을 잡자, 실버팽은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알코올 솜의 화한 느낌이 퍼지고 곧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실버팽은 주사를 맞은 팔을 움직여 보았다. 몇 분이 지나자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떠올랐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전처럼 뻣뻣하지 않아.”
이 효과가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실버팽이 느끼는 감격은 진짜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잿빛늑대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대장의 병이 나았다고?”
“불치병 아니었어?”
놀란 것은 프로이드와 레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사로서 석화증에 대한 악명은 누구보다 익히 들어왔었으니까.
“허, 설마설마했지만 약재의 배합법이 진짜였을 줄은….”
그 소란 속에서 카인은 아무 동요도 없었다. 그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럼 우린 47번 구역으로 돌아가 자네가 시킨 일을 하고 있겠네.”
프로이드는 부탁받았던 도구를 카인에게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정비를 끝낸 카인은 잿빛늑대를 지나 유적 입구를 향했다.
“출발하지. 모두 단단히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 * *
카인과 실버팽.
그리고 일곱의 잿빛늑대.
일행은 긴장을 곤두세운 채 유적으로 진입했다.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센서가 작동해 불이 켜졌지만,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카인이 마법으로 불을 일으켰지만, 어둠이 워낙 짙어 큰 효과는 없었다.
실버팽이 숨을 죽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도왕국이 존재했던 것은 수백 년 전이라고 들었다. 이런 유적지가 만들어진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겠지.”
“역사를 따로 공부한 적이 있나?”
“물론이다. 용병 생활을 한 이유는 생명의 씨앗을 찾기 위해서였다. 많은 장소를 돌아다녔고 많은 책을 읽었지. 일반인보다는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실버팽 역시 숲에 대한 염원은 라이카에 뒤지지 않았다.
라이카와 함께했던 용병 생활이 끝난 뒤로는 조직과 고향으로 행선지가 갈리기는 했지만.
실버팽은 미처 정신이 없어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라이카에게 던졌던 생명의 씨앗은 진짜인가?”
먼 거리에서 보았기에 실버팽은 확신이 없었다.
생명의 씨앗이 그리 쉽게 발견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라이카를 잡으면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녀석을 쫓는 데 집중하라는 이야기군. 알겠다.”
카인은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희미한 불빛 아래 비친 기이한 문자를 보며 물었다
“이 글자들을 읽을 수 있나?”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글귀가 일행을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고대 문자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 거다.”
카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실버팽이나 잿빛늑대가 이 문자가 이루고 있는 글귀를 해독했다면 큰 동요를 보였을 것이다.
「돌아가라. 이 안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돌아가라. 이 안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돌아가라. 이 안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여느 유적이 그러하듯, 결코 우호적이라 말할 수는 없는 문구가 쓰여있으니까.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팟.
복도가 끝나는 순간 시야가 번쩍였다. 눈을 뜨자 쨍한 조명이 정육면체 형태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철컥!
순간 들어왔던 문이 닫혔다.
당황한 잿빛늑대들이 문을 다시 열려고 시도했다.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은 아무리 밀고 두드려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당황하지 마라.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실버팽의 불호령 같은 목소리에 잿빛늑대가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겪어 본 적 없는 미지의 상황이 여전히 두려운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이 유적은 미궁 형식인 것 같군.”
바닥에 깔린 정사각형 타일들을 보며 카인이 말했다.
성인 남성 두셋이 넉넉히 올라갈 수 있을 크기의 타일들.
실버팽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유적에 들어와 본 경험이 있나?”
“몇 번쯤은.”
“안 해 본 경험이 없는 건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가늠도 안 되는군.”
어쨌든 실버팽은 자신들이 들어온 유적이 미궁 형식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미궁이라니. 이곳이 미로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잿빛늑대의 물음에 카인이 손가락을 들었다.
앞쪽, 오른쪽, 왼쪽.
각기 다른 세 방향의 벽에 문이 있었다.
“앞쪽 문으로 라이카의 냄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늦기 전에 서둘러 쫓아가야….”
카인은 말없이 앞쪽 타일에 한쪽 발을 디뎠다.
다시 발을 뺀 순간 타일의 색이 붉게 변하며 화염 기둥이 솟구쳤다.
화르륵!
화염 기둥은 천장에 그을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역시 발판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한 번이라도 잘못된 발판을 밟으면 타일 전체가 초기화된다.
함정과 안전 구역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
라이카가 자신은 안전하게 구역을 지난 뒤 일부러 잘못된 타일을 밟아 초기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순간 벌어진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잿빛늑대를 향해 카인이 말했다.
“그리 급할 필요는 없다. 내 예상이 맞다면 라이카는 분명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어떤 방’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거다.”
실버팽은 순간 카인이 그 사실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아온 카인은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 허투루 말을 뱉지 않는 인물이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니, 라이카가 일부러 이 유적을 찾았다는 의미인가? 단순히 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
“일부러 유적을 찾았다면…. 라이카의 목적은 유물인가.”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마도왕국은 원인 불명의 이유로 멸망했다. 남아 있는 기록은 충분치 않지만, 황무지 곳곳에 퍼진 유적이 마도왕국이 실존했음을 증명하고 있지.”
카인의 시선이 실버팽에게 똑바로 향했다.
“마도왕국이 멸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실버팽은 고심했다.
나름 역사에 관심이 많기에, 전에 고민한 적이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침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번대 구역과 30번대 구역 사이부터 존재하는 ‘벽’도 악마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지어졌다고 하니까.”
실버팽이 덧붙였다.
“유적도 악마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천사나 악마, 신 같은 존재를 믿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 고민해 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한 답은 신 외에는 쉽게 나오지 않더군.”
“네 생각은 그렇군.”
카인은 고개를 들어 앞쪽의 문을 보았다.
실버팽의 대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유적이 피난처 용도로 건설되었다는 추측은 맞았다.
하지만 악마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정확히 말해 이 세계에 악마와 천사, 혹은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유한 귀족층은 저마다 유적을 지어 그 안에 숨어들었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의 이들은 지하의 벙커로 숨어들었다.
전에 자신이 레드스컬의 비자금을 찾았던 그곳과 같은.
‘오랜 시간 유적 안에서 버텨야 했을 테니 내부에 온갖 설비를 갖춰 놓았겠지.’
그 안에는 지금과 같은 함정도 포함될 터였다.
라이카가 목표로 하여 나아가고 있을 ‘그곳’ 외에도.
“빠르게 달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방금 보니 불길이 솟아오르기까지 약간 지연 시간이 있던데요.”
“타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나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로 여러 의견을 제시하는 잿빛늑대를 두고 카인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유적 내부 각 방의 공략 방법은 알고 있었다.
점술가로 마주했던 ‘불멸자.’
본디 그녀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등장할 유적이었다.
다만 공략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기에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카인은 마석을 씹어 삼켰다.
자연적인 회복량으로는 마나가 완전히 차 있지 않은 상태였다.
“몸에 힘을 빼라. 바둥거리면 쓸데없이 마나가 더 들어가니까.”
카인의 손에서 뻗어 나온 마나가 실버팽을 포함한 잿빛늑대 전원을 휘감았다.
“……!”
허공에 몸이 떠오르자 잿빛늑대 모두는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카인의 지시대로 마나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우웅.
카인을 포함한 전원이 허공을 지나 문 바로 앞의 타일에 안착했다.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상황이 해결되자 카인을 제외한 이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염동에는 적지 않은 마나가 소모될 텐데. 몸 상태가 괜찮겠나?”
“괜찮다. 계산 하에 마법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방을 돌파하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적화된 방법은 염동을 이용해 타일을 밟지 않고 건너는 것이었다.
마도왕국의 귀족은 모두가 고위급 마법사였다.
일반 국민 모두 마법사이긴 하나 그것과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수준의.
유적의 설계 방식은 명확했다.
비상시 유적의 거주민이자 고위 마법사인 그들은 각 방을 쉽게 돌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장! 잠깐 저기!”
채 숨을 돌리기도 전 잿빛늑대 하나가 외쳤다.
입구 쪽 타일이 붉게 변하며 화염 기둥이 치솟았다.
화르륵!
다음 열 타일 전체의 색이 변하고 기둥 여럿이 일렬로 솟아올랐다.
화염 기둥으로 이루어진 ‘벽’은 카인 일행을 향해 빠른 속도로 행진해 왔다.
어마어마한 열기에 잿빛늑대의 털끝이 그을렸다.
“어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잿빛늑대들이 문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문에는 잡아당길 문고리도, 별다른 버튼 같은 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카인, 설마 이 문이 아닌 건….”
“라이카의 냄새가 이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했지.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라.”
카인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흑색 마나가 일정 패턴을 그리며 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화염 기둥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용병 생활을 하며 온갖 상황을 헤쳐 온 실버팽으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인, 내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해 주어 고마웠다. 비록….”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도 한참 남았으니까.”
위잉-
문이 열리고 다음 방이 나타났다.
뒤쫓아 오는 불기둥에 정신이 팔려 잿빛늑대는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카인은 바람을 일으켜 잿빛늑대를 다음 방으로 떠밀었다.
발밑의 타일에 열기가 올라오는 걸 느끼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다음 방에 들어갔다.
쿵!
화르륵!
문 건너편에서 불길이 날뛰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전해져 왔다.
“우리 산 겁니까?”
가쁜 숨을 고르는 잿빛늑대들을 향해 카인이 말했다.
“준비해라. 곧 적이 몰려올 테니까.”
카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곳곳에 하얀 빛무리가 일어났다.
우웅-
빛이 사라진 자리마다 온갖 금속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인형이 나타났다.
손과 발끝엔 날카로운 칼날이 부착되어 있었고, 눈동자에선 흉흉한 빛이 쏘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잿빛늑대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우우─
한 차례 울부짖음과 함께 잿빛늑대들은 자리를 박찼다.
마찬가지로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기계인형들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