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27화 (127/227)

#127. 노예 시장 (5)

라이카의 확장된 동공 안에는 작은 씨앗이 담겨 있었다.

그의 코가 벌름거렸다.

싱그러운 녹음의 향이 코안의 점막에 달라붙었다.

두근.

생명의 씨앗이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라이카의 심장이 고동쳤다.

뜨거운 피가 혈관을 내달렸다.

뇌리 깊숙한 고향에 대한 향수.

숲의 재건이라는 과업.

알아보지 않은 방법이 없고,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서적에서 생명의 씨앗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대륙을 떠돌았다.

마침내 어딘가의 동굴 속에서 첫 번째 생명의 씨앗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이 휘몰아쳤던가.

그 후 두 번째와 세 번째 씨앗도 발견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네 번째 씨앗이 나타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적의 손안에서.

함정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고향에 대한 집념으로 한평생 녹음을 쫓아온 짐승이니까.

생명의 씨앗은 꿈이자 희망, 의지와 공상, 삶 그 자체였다.

팟!

라이카가 허공에서 씨앗을 움켜쥐었다. 화염구가 그를 덮쳤다. 그에게 불길을 남기고 반대편으로 멈추지 않고 날아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쿵!

라이카가 추락했다.

허공에서 몸을 돌렸기에 가까스로 두 발을 지상에 디디는 데는 성공했다.

크어엉─!

등골을 시리게 하는 포효가 경매장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짧은 순간 몸을 틀어 화염에 완전히 잡아 먹히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팔 부분으로 마나를 끌어 올려도 화염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범한 화염 마법이 아니다.

온몸의 장기와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

라이카는 씨앗이 담긴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었다. 최대한 화염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노가 치솟았다.

이쪽의 약점을 영악할 정도로 잘 이용한 카인과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해서.

“카인!”

현장에 있는 모든 이가 자리에 굳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모두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라이카는 카인을 향해 도약하려 했다. 하지만 화염의 열기에 못 이겨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죽여 버리겠다!”

“…얼마든지.”

카인이 거친 호흡을 고르며 힘겹게 대답했다.

정제 5단계.

거기에 모든 마나를 일시에 소진한 탓에 탈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회로 전체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고 속은 메슥거렸다.

구구구구─

천장에서 떨어지는 파편의 크기와 숫자가 늘어났다.

“…맙소사.”

고개를 든 실버팽은 경악했다.

경매장의 천장이 기울어 있었다.

그 아래, 천장을 떠받치던 기둥은 윗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너머, 벽에는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카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카인이 대답했다.

“부하들을 데리고 먼저 빠져나가라. 난 녀석의 끝을 확인하고 가겠다.”

“하지만─.”

“명령이다!”

실버팽은 몸을 움찔 떨었다.

저렇게 크게 소리를 치는 카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알겠다.”

아우우─

판단과 행동은 신속했다.

실버팽은 쓰러진 바마를 들쳐 업고 잿빛늑대와 함께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잔뜩 겁을 먹은 블루서펜트의 조직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카이이이인─!”

라이카가 다시 한번 포효했다.

그 외침에 건물의 붕괴가 가속화되는 것만 같았다.

라이카가 화염이 붙지 않은 왼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리쳤다.

쐐액─!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절단면은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 마나의 보호를 받지 못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카이이인─!”

잘린 부분에서 피가 솟구쳤다.

철퍽!

발밑에 생긴 피 웅덩이를 박차며 라이카가 도약했다.

시선은 똑바로 카인을 마주했다.

카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석을 씹고 상대를 맞을 준비를 했다.

사라진 고향에 대한 향수로 평생 헤매던 야수의.

음지에서 만났으나 서로의 숙원을 존중했던 동료의.

그리고 꿈에도 잊지 못할 배신자의.

그 모든 인물의 숨을 끊을 준비를.

카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라이카와 충돌했다.

그 순간 경매장이 완전히 무너지며 두 인물의 모습을 덮었다.

* * *

달빛 아래 풍경은 선연히 빛났다.

빠져나온 적은 몇 되지 않았고 모두 잿빛늑대에게 제압당해 목숨을 잃었다.

실버팽과 바마는 멍한 얼굴로 무너진 경매장을 바라보았다.

잔해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한참이나.

“…….”

바마는 자신이 카인에게 붙잡힌 것이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장소에서 일대일로 싸움을 벌인다면 순식간에 카인의 목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열기의 불덩이를 떠올리자면.

라이카 같은 괴물이었기에 버텨냈지, 자신이었다면 화염에 스치는 것만으로 재가 되었을 것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중 자신도 모르게 바마가 중얼거렸다.

“카인이 죽었다고?”

그렇게 계획적이고 치밀한 녀석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한마디였다.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목을 쥔 쇠사슬의 주인이 죽었다는 안도감과.

여동생의 행방을 아는 이가 사라졌다는 허무함.

실버팽 역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라이카는 죽었으니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인정했던 인간이 죽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몹시도 부끄러웠다.

실버팽은 카인이 자신의 복수를 대신 이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잔해를 치워라.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

잿빛늑대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실버팽은 가장 먼저 잔해 위로 발을 디뎠다.

잔해를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팔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한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카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카인. 정말로 죽어 버린 건가.”

그때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죽었다는 거지.”

잔해 사이에서 카인이 몸을 일으켰다. 실버팽이 뛰어가 휘청이는 카인을 부축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카인을 잔해 밖으로 부축한 뒤 실버팽이 물었다.

“라이카는 어떻게 되었지? 죽었나?”

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도망쳤다. 마지막 순간 달려든 건 그게 목적이었지. 나를 공격하려던 게 아니라.”

카인의 말대로 주변을 수색하자 구역 외곽으로 이어진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업 - 증오의 불길]

목표: 배신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십시오. (1/3)명.

분명 죽음에 이를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라이카는 죽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숨이 붙어 있었다.

카인이 초췌한 눈빛으로 바마와 실버팽, 잿빛늑대를 보며 말했다.

“놈을 쫓아라. 나는 몸을 추스른 후 출발하겠다.”

* * *

비교적 부상이 심한 이들은 현장에 남았다.

“이쪽에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있습니다.”

경매로 팔릴 예정이었던 노예들을 구출하고, 금고를 찾아내 현금과 귀금속을 노획했다.

카인은 건물 파편 위에 앉아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노예 중 희망하는 이는 모두 47번 구역으로 보낸다. 그렇지 않은 이는 수갑과 족쇄를 풀어 자유를 줘라.”

노예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바마가 맡았다.

바마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예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조건만으로 따지면 어딘가에 팔려가는 것보다 훨씬 나아. 노동을 하고, 그에 맞는 임금을 받을 거다.”

노예 중 바마와 같은 혼혈이 적지 않았다. 어차피 어디를 가든 차별과 멸시를 받는 것이 그들이었다.

“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요.”

농장에서의 노동 조건을 들은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같은 혼혈인 바마에 대한 미약한 신뢰도 있었다.

“바마. 프로이드가 곧 도착할 거다. 이곳에서 대기하다 치료를 받고 47번 구역으로 복귀해라. 노예들도 인솔해야 하니.”

라이카의 공격을 직접 받아냈던 바마는 모든 인원 중 부상이 가장 심했다.

치료 마법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알겠다.”

바마는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카인은 어떻게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자신처럼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나 있을 텐데.

부상자의 응급처치와 사망자에 대한 짧은 애도도 이루어졌다.

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밍에 맞춰 실버팽이 차를 끌고 나타났다.

“녀석의 핏자국은 거리로 이어져 있었다. 중간에 차량을 탈취해 달아난 것 같다. 핏자국 앞에 이어져 있던 바퀴 자국으로 봐서는.”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실버팽의 옆자리에 탑승했다.

실버팽과 카인의 차량 뒤로 잿빛늑대가 탄 두 대의 차량이 더 뒤따랐다.

거리를 지나고 외곽을 지나자 새벽하늘 아래의 황무지가 나타났다.

“카인. 라이카가 어디로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나.”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자기 아지트가 있는 33번 구역으로 간다고 보는 게 옳겠지. 하지만 바퀴 자국은 33번 구역과는 반대 방향이다.”

33번 구역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이 다해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라이카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만약 내가 녀석이라면.’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부상의 치료. 그러기 위해선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

근처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면.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드넓은 황무지에 그곳 외에는 달리 숨을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바퀴 자국 역시 해당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골치 아파질 수도 있겠군.”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달린 지 1시간 정도가 지났다.

차량이 덜컹거려 휴식을 취하기 힘들었고, 회로의 통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거기에 최근 며칠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신은 도리어 또렷했다.

과업의 달성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끼익!

카인은 차를 멈췄다.

“확실하게 잘 쫓아 오긴 한 것 같군.”

눈앞에 버려진 차량 한 대를 보며 실버팽이 말했다.

바퀴 자국은 거기서 끝이었고, 열린 문밖으로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출혈이 멎었는지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실버팽. 용병으로 오래 활동했다고 했지. 유적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온갖 기하학적 구조의 건축물들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 있었다.

고대마도왕국 시대의 잔재.

외부의 벽은 풍파에 닳아 있었지만 웅장하고 스산한 분위기는 현시대의 문명보다 더 뛰어난 기술로 지어졌다는 인상을 주었다.

“많지는 않다. 두 번 정도. 그마저도 낮은 레벨의 수호자들이 지키고 있던 유적이었지.”

수호자란 유물을 지키는 기계병을 뜻했다.

라이카의 발자국은 유적 건물 중 하나의 입구로 이어졌다.

104번 구역 외곽의 유적지.

분명 카인이 알고 있는 장소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가 들어간다. 어차피 라이카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지휘자는 카인이었기에 달리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카인을 믿고 따랐다.

혹시 모를 새로운 적의 기습에 대비해 잿빛늑대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유적 안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다. 아무리 라이카라도 팔 하나 없이 버티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들어가지 않고 입구를 계속 지키는 게 낫지 않겠나?”

차량에 기대어 유적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카인에게 실버팽이 다가왔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들어가서 확실하게 숨을 끊어야 한다.”

마도왕국의 마법과 과학 수준은 현시대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말도 안 되는 기능의 유물이 유적 안에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이 유적 안에는 분명 ‘회복’과 관련된 유물이 존재한다.

‘라이카는 이 유적을 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에 그 유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곳으로 들어갔을지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생명의 씨앗을 찾아 대륙 곳곳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테니.

그리고 만약 라이카가 그 유물을 손에 넣고 발동하는 데 성공한다면 104번 구역에서 녀석을 잡기 위해 쏟았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것을 넘어 이쪽이 위험해진다.

결코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슴푸레 날이 밝았을 때.

멀리서 차량 한 대가 카인 일행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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