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노예 시장 (4)
쾅!
카인은 신속하게 뒤로 몸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아래쪽 창고가 드러나 있었다.
“반응 속도가 제법이군.”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구멍에서 무언가 뛰어올라 관객석에 착지했다.
쿵.
풍성한 갈기와 거대한 몸집.
지상의 모든 것을 깔보는 듯한 거만한 눈빛.
“조금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생명의 씨앗은 잘 찾았나, 라이카?”
칙.
라이카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해가 되었다는 얼굴을 했다.
“소문을 네가 퍼트렸나?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일인데 말이야.”
짝. 짝. 짝.
라이카가 양 손아귀가 맞물리게 크게 박수를 쳐 보였다.
“라이카!”
그때 멀리서 실버팽의 목소리가 외침이 들려왔다.
잔뜩 흥분해 우리를 흔들고 있는 모습.
라이카에 대한 복수심 외에도, 공기 중에 퍼진 각성제 성분에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어디서 개가 짖는군.”
라이카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관객석 아래로 시선을 내려 바마를 바라보았다.
“여기 되다만 잡종 새끼도 있고 말이야. 지난 기회에 목을 뜯어 버려야 했는데. 그래도 회복속도가 빠른 걸 보니 수인 피가 섞이긴 섞였다는 건가?”
꿈틀.
잡종이란 말에 반응해 바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후우-
라이카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카인. 아무래도 보스는 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순간 제이나가 흠칫했다.
라이카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 보스와 모종의 연락을 취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를 다시 회유해 보라고 하더군. 지금이라도 조직으로 돌아오면 이제까지의 일은 눈감아 주겠다고 하더군.”
잠시 말이 없던 카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제이나의 회로를 파괴했다.”
“겨우 그딴 일로? 보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모든 조직원을 도구로 보기 때문이겠지.”
라이카가 씩 웃었다.
“잘 아는군.”
“그러니 협상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일 테고. 배신의 주축이었던 이를 포섭인으로 보내다니.”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카인. 또 배신당할 일은 없지 않나? 이렇게 훌륭한 마법사가 되셨으니.”
카인은 반응이 없었다.
“카인. 보스는 분명 우리를 도구로 여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스가 제공하는 여러 편의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지. 너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겠지. 마찬가지로 보스를 도구로 이용하면 될 뿐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
카인의 손바닥 위에 있던 마나가 사그라졌다.
“조건이 있다.”
“말해 봐라.”
바마와 제이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카인과 라이카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설마 하고 있지만.
스륵.
카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품에서 번개같이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탄환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라이카의 손아귀에 잡혀 부서졌다.
“얕은 수작이군. 47번 구역에서 제이나와의 만남 때도 같은 수를 부리지 않았었나?”
카인은 생각했다.
역시 이 괴물은 일반적인 방법으론 죽일 수 없다고.
다음 순간 천장의 구멍에서 라이카의 부하들이 쏟아졌다.
숫자는 스물.
높이가 상당함에도 사뿐히 착지한 것으로 보아 수준급의 정예들임을 알 수 있었다.
카인은 염동을 사용해 제이나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리모컨을 들어 올렸다.
“……!”
제이나가 채 반응하기도 전 버튼이 눌렸다.
우웅─!
기계음과 함께 우리가 올라가고, 속박에서 벗어난 잿빛늑대들이 라이카의 부하들을 향해 쇄도해 왔다.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카인.”
손가락 사이에서 튕겨 나간 담배가 바닥에 닿는 순간 한 차례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라이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라이카가 손톱으로 카인을 내리치려는 순간.
쾅!
카인의 강화 마법을 받은 바마가 라이카를 들이받으며 벽에 충돌했다.
크어엉─!
라이카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바마 역시 밀리지 않았다.
강화 마법으로 상승하는 능력치는 본신의 힘에 비례한다.
때문에 바마 같은 강자의 경우 효과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배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쾅! 쾅! 쾅!
라이카와 바마의 모습이 곳곳에 번뜩였다 사라지며 경매장 내부가 부서져 갔다.
중간중간 고장 난 기계처럼 라이카의 동작이 멈칫할 때가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런 잔재주 따위로─! 나를─! 멈출 수 있을 것 같은가─!”
바마가 가진 파충류의 눈은 바라보는 이의 신경회로 일부를 마비시킨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매 순간 마비를 억지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라이카!”
실버팽이 뛰어들며 싸움은 격화되어갔다. 카인의 강화 마법이 실버팽과 바마를 지원했다.
싸움은 이 대 일의 구도였지만 라이카는 전혀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일을 끝내지.”
카인이 다가오자 제이나는 검게 변한 팔을 붙잡고 벌벌 떨었다.
“제, 제발 살려 줘.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조직을 무너트리는 게 목적이지? 그렇잖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카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조직에 관한 중요 설정은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컥.
차가운 금속이 제이나의 이마에 겨누어졌다.
“수도에 있는 네 쌍둥이도 머지않아 뒤따라갈 테니 그리 외롭지는 않을 거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다.
탕!
총성은 컸지만 난전에 묻혀 이쪽을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
카인은 총에 묻은 피를 천으로 닦은 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실 끊긴 인형처럼 늘어진 제이나에게서 마나를 흡수했다.
[회로 레벨: 3]
[마나 1421 / 4376]
파르테르와의 전쟁 이후 자잘하게 쌓아온 마나는 3500대.
약 800에 가까운 마나가 단숨에 상승한 셈.
제이나가 마나의 양으로 싸움을 걸어준 것이 오히려 득이 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기력이 충분한 상태에서 도주를 시도했다면 그녀는 장기인 이동 마법을 활용해 충분히 경매장을 빠져나갔을 터였다.
‘목숨은 건졌겠지. 나를 제거한다는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카인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쥐새끼 같은 것들!”
라이카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 싸움에 직접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이며, 싸움의 승자란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패자는 네가 될 것이다. 라이카.’
여기서 녀석의 숨을 끊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최소 치명상을 입힐 자신은 있었다.
카인은 떨어진 주머니에서 마석을 주워 씹었다.
[회로 레벨: 3]
[마나 2865 / 4376]
다시 하나를 씹었다.
[회로 레벨: 3]
[마나 4376 / 4376]
라이카에게 어지간한 수준의 마법은 통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열차 위에서 일으켰던 거대한 폭발에도 녀석은 살아남았으니까.
“바마! 무엇을 받아먹겠다고 카인 쪽에 붙었지!”
“네 알 바냐! 이 괴물 같은 새끼!”
쾅!
순간 실버팽이 날아와 카인 옆의 벽에 처박혔다.
잔해 사이에서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키다 다시 넘어졌다.
“라이카보단 녀석의 부하들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군.”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는 실버팽의 다리를 보며 카인이 말했다.
라이카와 바마 사이에서 버틸 수 없던 것이리라.
그들과 달리 실버팽은 마나회로를 갖추지 못했으니.
하다못해 석화증만 없었더라도 훨씬 나았을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잠시 참아라.”
콰득!
카인이 실버팽의 다리를 붙잡고 힘을 주어 앞으로 돌렸다. 실버팽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웅.
치유 마법과 함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었다.
“신성력…?”
오랜 용병 생활 동안 사제 외의 이가 회복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실버팽은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카인 너는 대체….”
“지금 네가 라이카를 상대하겠다는 건 오기와 만용일 뿐이다.”
카인은 실버팽의 말을 끊었다.
“물러설 때를 알아라. 가서 네 부하들을 도와라. 후에 기회가 된다면 마나회로를 구축할 수 있게 해 주지.”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말.
하지만 실버팽은 그 말이 정말로 실현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밖에.
“…고맙다. 덕분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실버팽은 라이카의 부하들과 난전들 벌이고 있는 잿빛늑대들 쪽으로 사라졌다.
잿빛늑대는 라이카의 정예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라이카와 같은 마나회로는 없으나, 일반적인 수인 중에선 최상의 전투력을 지녔다 할 수 있었다.
쾅!
라이카와 바마의 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쳐 내고, 달라붙고, 뒹굴고.
마치 두 야생동물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카인은 마나를 손바닥 위로 끌어올려 정제를 거쳤다.
“감히!”
채 몇 초 되지 않아 라이카가 반응했다.
손톱으로 허공을 내리긋자, 세 줄기 마나가 카인을 향해 쇄도했다.
카인은 몸을 날려 피한 뒤 상태를 살폈다. 팔 부위의 옷자락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조금만 늦었어도 사라진 것은 자신의 팔이 되었을 터였다.
집중이 깨진 탓에 정제 중이던 마나도 대기 중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겠지.’
라이카는 다시 바마와의 전투에 열중해 있었다.
바마는 움직임이 점차 굼떠져 가는 데 반해 라이카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쿠구구─
두 야수가 벌이는 전투의 여파로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나의 낭비 없이 일시에 끝낸다.’
카인은 방호를 해제하고 회로 내부에서의 마나 정제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라이카는 이쪽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확인 작업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계획대로 5단계 정제를 거치는 일이었다.
쿵!
머리만 한 콘크리트 조각이 옷깃을 스쳐 바닥에 박혔다.
정신을 집중한 덕에 가까스로 정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5단계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60여 초.’
카인은 계속 떨어지는 천장 잔해를 순수 육체 능력만으로 피해 나갔다.
모두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목표는 카인이다! 바마는 라이카 님이 상대하고 있으니 녀석을 노려!”
적 하나가 카인을 향해 검을 내리쳐왔다. 그 사이, 은빛 신형이 끼어들어 검을 튕겨 냈다.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주변을 맡겠다.”
이어진 실버팽의 일격에 적이 나가떨어졌다.
“잠시 부탁하지.”
정제는 4단계를 지나 5단계로 향해 갔다.
점차 회로에 과부하가 가해지며 온몸이 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5단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초.
회로 레벨이 3으로 오른 이후 정제 4단계까지는 무리 없이 운용 가능했지만, 역시 5단계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2초.
‘반드시 명중시켜야 한다.’
모든 마나를 쏟을 생각이었다.
현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9초.
하지만 라이카는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혹 감지가 늦었다 하더라도, 육안으로 확인 후 피하는 것도 녀석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6초.
‘녀석이 피하는 것이 문제라면 녀석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
3초.
카인은 품에서 투명한 비닐에 둘러싸인 씨앗을 꺼냈다. 크기가 제법 되어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2초.
카인은 그것을 라이카의 머리 위 허공으로 힘껏 던지며 외쳤다.
“라이카! 네가 찾던 생명의 씨앗이 여기에 있다!”
생명의 씨앗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 백 개도 채 남아 있지 않다. 그중 일부는 부하를 시켜 수거를 마친 상태였다.
“……!”
라이카의 고개를 번쩍 들렸다.
그건 그에게 있어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씨앗이 가짜가 아닌 진짜임을.
1초.
극도의 흥분상태.
순간 라이카의 온몸 근육이 빳빳하게 부풀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로 그의 팔이 크게 휘둘러지고, 바마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라이카가 씨앗을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0초.
그와 동시에 카인의 손바닥 위에 거대한 화염 구슬이 피어올랐다. 크기는 점점 부풀어 올라 성인 남성의 몸집을 뛰어넘었다.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 카인은 약간의 마나를 이용해 몸 주위에 방호를 둘렀다.
[회로 레벨: 3]
[마나 0 / 4376]
정제 5단계.
거기에 모든 마나를 쏟았다.
검붉은 불꽃은 사방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일정 반경 내의 경매장 바닥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방호를 둘렀음에도 카인의 옷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슨…!”
숨 막히는 열기에 실버팽은 본능적으로 카인과 거리를 벌렸다.
단지 근처에 있던 것만으로 그의 은빛 털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화염구를 던졌다.
수 미터 위 허공, 생명의 씨앗을 붙잡기 위해 뛰어오르고 있는 라이카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