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노예 시장 (3)
“뭔가 재밌는 일이 있나 보군.”
온몸을 휘감는 섬뜩함에 제이나는 순간 감전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예의 무표정한 카인이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뚜벅뚜벅 옆으로 다가왔다. 입만 벙긋거리는 제이나를 향해 말했다.
“저번에 보니 전이 원소 위에 변환 원소를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점멸을 사용하더군. 덕분에 새로운 방법을 알았다.”
제이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걸 눈대중만으로 파악했다고?’
마나의 움직임을 보고 상대 마법의 구동 원리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
둘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아니, 그보다 지금은 그런 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채 가시지 않은 충격에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인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이 특유의 여유로운 어투로 대답했다.
“위치 추적기를 달았던 차량 말인가. 운전수 없이 달리다 어딘가의 바위에 부딪혀 멈춰 버렸겠지.”
당황스러움이 가시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인과 조직원 쪽은 아직 이쪽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제이나는 마법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성제가 담긴 병을 철제 우리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그녀와 손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의 마나가 가늘고 긴 얼음송곳으로 화해 병을 뒤쫓았다.
‘좋아. 반응은 내가 더 빨랐어.’
카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날아가는 병과 마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병이 깨지고 각성제가 수인들 위로 살포되는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음 동작도 신속했다.
‘주 원소는 아니지만 간단한 마법쯤은.’
풍(風)계 원소를 끌어모아 양 손바닥을 앞으로 펼쳤다.
펑!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제이나와 카인 사이에 거대한 충격이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튕겨 나간 것은 제이나뿐이었다.
“큭!”
고개를 들자 카인의 몸 주위에 어느새 둘러진 검은색 방호가 보였다.
분명 카인에게서는 아무런 마나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인은 제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란을 알아차린 수인과 조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인이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앞으로 뻗자 검푸른 마나가 그 위에 소용돌이쳤다.
쩌적.
곧 허공에 얼음 결정이 피어나며 긴 송곳의 형태로 변해갔다.
제이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색이 짙었다.
펑!
섬찟한 파공음과 함께 카인의 얼음송곳이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제이나의 송곳을 따라잡아 그것을 깨부쉈다.
마치 화살 위에 꽂힌 화살처럼.
송곳은 멈추지 않고 날아가 각성제가 담긴 병을 이어서 깨트렸다.
쨍!
병은 수인이 아닌 블루서펜트 조직원들의 머리 위에서 부서졌다.
무색의 액체가 빗방울처럼 코와 눈, 그리고 입으로 떨어져 내렸다.
“평범한 물건을 준비하진 않았을 텐데. 어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조직원들은 당황했다.
액체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무언가 제이나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끓고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자, 잠깐!”
푹!
약에 저항하는 이보다 그렇지 못한 이가 더 많았다. 조직원들은 곧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은 무분별한 공격.
잿빛늑대는 우리 안에 갇혀 있어 오히려 난전으로부터 보호받는 형태가 되었다.
‘나쁘지 않군.’
카인은 104번 구역으로 돌아오기 직전 새로 찍은 특성의 성능에 내심 감탄했다.
내부 집중.
마나 정제가 회로 내에서 가능해지며 그 속도가 한 단계 상승하는 특성.
마법사의 약점은 마법 구현 시 마나를 체외로 방출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같은 마법사를 상대할 경우 ‘간섭’을 당해 마법 자체가 무효화 될 위험이 있다.
근접 계열의 마나유저의 경우 마법의 종류를 예측하고 대응한다.
마법을 즉발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기는 하나 그럴 경우 정제 단계가 낮아 위력이 떨어진다.
때문에 ‘내부 집중’이라는 특성은 적이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높은 정제 단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카인은 서로 살육전을 벌이는 조직원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마나유저를 저렇게 만들다니, 꽤 독한 약을 준비했었나 보군.”
제이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잘못됐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정제 없이 바로 사용한 마법이 이 정도라고?’
회로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떤 특수한 유물 따위를 사용했을 거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즉발에 가깝게 사용한 마법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위험 신호가 머릿속을 울리는 동시, 속에 메스꺼워졌다.
47번 구역에서 있던 파르테르와의 전쟁을 지켜보며 카인의 마법 실력에 대해선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원소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적어도 마탑의 장로급.
하지만 지금 카인이 보인 수준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그것이었다.
그 사이에 또 무언가 성장을 이루었단 말인가.
아득.
제이나는 카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선연한 은빛 마나가 줄기를 이뤄 카인을 향해 쇄도했다.
카인 역시 손을 들어 같은 방식으로 응수했다.
파지직!
흑과 은.
서로 색이 다른 두 개의 마나줄기가 허공의 한 지점에서 충돌해 전류가 맞붙은 것 같은 광경을 자아냈다.
“과연 이 상황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군.”
제이나는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마나줄기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법이 아닌 마나와 마나의 격돌.
기교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는 순수한 힘 싸움으로, 보유한 마나의 양을 바탕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방법이었다.
‘카인 네가 아무리 원소를 잘 다룬다고 해 봤자 마나의 양은 내가 위야.’
마나를 빠르게 쌓기 위해 흑마법사의 길을 선택했다고는 하나 그 기간은 반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 줌의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착실하게 마나를 쌓아 온 자신보다 마나의 양이 많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카인이 마법에 있어 독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마나와 원소를 운용하는 능력에 있었다.
순수하게 마나의 양만 놓고 본다면 세계관 내의 다른 강자들보다는 낮은 축에 속했다.
“…….”
양측의 회로에 담긴 마나는 빠르게 소진되어 갔다.
제이나의 경우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카인의 경우 회로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은빛 마나가 점점 흑빛 마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졌네요? 마력 싸움을 받아 주다니, 나라면 피했을 텐데요. 라이카도 그렇고 당신도 참 오만하기 짝이 없어요.”
“…….”
마력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카인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카인은 마나를 방출하고 있지 않은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넣었다.
콰득!
“마석…! 하지만 마나를 조금 보충한다고 해서─.”
“누가 조금이라고 했지.”
카인은 두 번째 마석을 꺼내 씹어 삼켰다.
알싸한 향과 함께 회로에 마나가 충전되는 것이 느껴졌다.
파직!
죽었던 불씨가 되살아나듯, 흑빛 마나가 거세지며 다시 은빛 마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나눠 주지.”
휙.
카인이 던진 마석 주머니를 받은 제이나는 한껏 당황했다.
보통 마법사들이 비상시를 대비해 마석을 소지하고 다니긴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잘그락거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이라니.
‘적에게 마석을 준다고?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득.
분노와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었지만 그건 잠시 접어 둬야 할 감정이었다.
주머니 안을 살펴보자 틀림없는 마석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어울려 주마.
결국 웃는 건 나일 테니까.
품에서 자신의 마석을 꺼내기엔 자세가 흐트러져 마력 싸움에 빈틈이 생길 것 같았다.
제이나는 카인이 던진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 씹어 삼켰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닥쳐요!”
카인이 새로운 주머니를 꺼내 마석을 씹었다. 그럴 때마다 제이나 역시 마석을 꺼내 삼켰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절대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얼굴은 혈색을 잃었다.
“버, 벌써 일곱 개째야! 대체 마석을 몇 개나 사용할 생각이야! 다 죽어! 이러다 당신이나 나나 다 죽는다고!”
마석은 만능이 아니다.
당장은 큰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지언정 미래의 수명을 대가로 한다.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양도 정해져 있으며, 적정 수준을 넘어 복용 시 수명의 감축은 가속화된다.
오기를 부려 카인의 템포를 따라왔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자신이 신세계로 향하는 티켓을 원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삶을 오래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던가.
“죽음이 두려운가?”
눈빛이 마주친 순간 제이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 죽음 따위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패배였다.
삶에 대한 욕심이 가득한 자신은 이길 수 없었다.
‘카인의 수준을 한참 잘못 봤어. 보스도, 나도.’
골치 아프긴 하나 차근차근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작은 화재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작은 화재 따위가 아니었다. 범위에 닿는 모든 걸 삼켜 버리는 산불 그 자체였다.
카인이 다음 마석을 삼켰지만 제이나는 그러지 못했다.
전의를 상실한 그녀의 손에서 마석 주머니가 떨어졌다.
파직!
흑빛 마나가 순식간에 은빛 마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카인이 제이나를 향해 다가갈수록 격돌 중인 마나의 줄기는 점점 짧아져 갔다.
“오, 오지 마!”
제이나는 뒷걸음질 쳤다. 몇 걸음 안 되어 난간에 부딪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었다.
바로 앞에 다다른 카인이 제이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회로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했다.
회로에 담기는 마나의 성분은 개인의 특질에 따라 달라진다.
성격이 다른 마나를 억지로 주입할 경우 벌어지는 일은 분명했다.
“꺄아아아악!”
카인의 마나가 제이나의 회로 내부를 내달렸다. 들끓는 용암처럼 지나는 경로를 난폭하게 헤집었다.
“놔! 제발 놔 줘!”
제이나가 카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인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을 어떻게든 빼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회로의 영구적인 손상.
그것을 직감한 순간 제이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베릭트는 지금 이 소란 중에 대체 뭘….’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지금 이 공간을 빌려주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베릭트였다.
“도움을 기다리고 있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관객석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피 칠갑을 한 바마가 나타나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베릭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잡았다. 부하는 모두 정리했고. 부하 중 네 말대로 꿈에도 잊지 못할 한 녀석이 있더군. 나이가 들었지만 내게 시약을 먹일 때 탐욕스럽게 웃던 그 낯짝은 절대 잊지 못하지.”
바마의 얼굴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있었다.
몸에 튄 피 중 상당량이 누구의 것인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풀썩.
카인이 손목을 놓자 제이나가 주저앉았다. 그녀의 팔은 죽은 가지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베릭트는 어떻게 처리할 거지?”
“죽인다. 금고의 비밀번호를 물어본 후에.”
베릭트는 돌이라도 된 듯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바마의 사안에 당한 탓이었다.
제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만….’
망가진 회로에서 마나가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완전히 고갈되기 전, 남은 마나를 안간힘을 다해 끌어모았다.
우웅-
「공간이동」
공간의 좌표를 바꿔 대상자나 사물을 비교적 먼 거리로 전송하는 마법.
이동 계열의 마법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정확하게 사용할 자신이 있다.
‘처음 목적이라도 달성해야 보스를 뵐 면목이 있어.’
카인과 바마가 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제이나는 베릭트를 향해 마나를 쏘았다.
은빛 마나는 베릭트와 함께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외견상 분명 성공이었다.
곧바로 본인 역시 마법을 사용해 자리를 빠져나가야 하나, 그녀는 왜인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원소가 흔들렸어. 분명 좌표를 설정하는 부분이….’
자신의 마법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외부의 간섭이란 뜻이었다.
제이나가 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디로 보낸 거야?”
“좌표를 조금 바꿨다. 건물 밖이 아니라 콘크리트 벽 내부로.”
동일한 좌표상에 두 대상이 공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베릭트가 어떤 꼴이 되었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한 번 더 공간이동을 사용하기 위해 끌어 올렸던 마나가 힘없이 흩어졌다.
제이나는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천장이 무너지며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쿵!
아주 맹렬하고도 난폭한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