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노예 시장 (2)
“거기 잠깐, 우리가 지금 먼저….”
무어라 소리를 치려던 남자는 카인이 직원에게 제시한 카드를 보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딸꾹.
그리고 적지 않게 놀랐는지 이내 딸꾹질을 시작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는 데 불만 있나.”
“아, 아니요. 딸꾹!”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가 이그니스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돈을 복잡한 증빙 절차 없이 예치할 수 있는 은행은 이그니스 외에는 존재치 않았다.
이그니스에서 유일하게 내거는 조건이 있다면 예금의 크기였다.
일정 금액 이하는 아예 회원으로 받지 않았으며, 예치 후에도 금액을 단계별로 나눠 다양한 색의 카드를 발급했다.
그중 가장 등급이 높은 것이 10억 실링 이상의 예금주에게만 발급되는 블랙 카드였다.
“드, 들어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직원 역시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입구 안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카인은 이그니스의 블랙카드를 품에 넣고 바마와 함께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줄을 서 있던 이들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을 뿐 감히 카인과 바마를 제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통로를 따라 걸으며 바마가 카인에게 속삭였다.
“조용히 들어와도 되었을 텐데.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나.”
“상관없다.”
카인은 개의치 않았다. 낚시를 하려면 미끼를 던져야 하는 법이니까.
위치는 언젠가 발각될 수밖에 없다. 또한, 상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계단을 올라 좌석에 도착하자 원형 경기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 크기에 비하면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버려진 경기장을 개조했다더니 그 말대로군.”
바마가 실소를 터트렸다.
경기장 주위를 관객석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공간이 탁 트여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카인은 자리에 앉아 앞쪽에 놓인 마이크와 번호표를 쥐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정받은 자리는 최상층.
경매 시작 거의 막바지에 들어온 듯 자리는 층을 가리지 않고 꽉꽉 차 있었다.
천장엔 쇠사슬에 연결된 철제 우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그 아래 단 위엔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사이, 고압적인 태도로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정장 차림의 민머리 남자가 보였다.
베릭트였다.
“베릭트를 본 적이 있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높은 번호 대의 구역에 와 본 적이 없으니까.”
그때 경매장의 입구가 닫히며 중앙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저희 경매장을 찾아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께 큰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직원들은 단에서 내려가 뒷짐을 진 채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베릭트가 허리를 꾸벅 숙여 멋스럽게 인사를 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늘도 대륙 각지에서 공수한 특별한 상품들을 여러분께 선보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는 물건을 건져 가셨으면 좋겠군요!”
리모컨을 들고 단 위로 올라오려는 직원을 향해 베릭트가 손을 뻗었다.
리모컨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바마가 말했다.
“마법사인가? 마나가 검은빛을 띠고 있는 걸 봐선 흑마법사군.”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릭트 뿐 아니라 휘하의 직원들 역시 모두 흑마법사였다.
노예를 공수하는 방식이란 대부분의 경우 납치이니 어느 정도 무력을 갖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현재 카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베릭트의 마법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베릭트가 유명한 것은 마법보다는 그의 사업가적 수완에 있었다.
보스가 그를 포섭하려는 이유 역시 그 부분에 있을 터였다.
‘적은 내가 베릭트에게 접근하는 순간을 노리겠지. 혹은 호위와 떨어져 있는 순간이나.’
적과 자신은 서로 간의 목적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로를 죽이는 것 외에도 베릭트의 포섭과 그에 대한 방해라는 목표가 있었다.
방해는 간단했다. 죽이면 된다.
죽은 이를 간부로 써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합리적으로 추측하면 적은 경매장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지 지켜보지.’
“자, 그럼! 오늘의 첫 번째 상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드르르르-
정사각형 모양의 무언가를 실은 끌차가 줄지어 단 위로 올라왔다. 물건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자 철제 우리가 나타났다.
우와아아-!
관객석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안에 있는 건 모두 어린아이들로, 멀리서 보아도 그 외모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륙 곳곳의 슬럼가에서 어렵게 찾아낸 상품들입니다! 말하자면 진흙 속의 진주죠! 취향이나 용도에 맞게 마음껏 사용하시면 됩니다. 미모는 보장되어 있으니 몇 년 더 키워 밤 시중을 들게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아, 물론 당장 들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하!”
아이들의 목에는 번호표가 걸려 있었고, 그 순서대로 경매가 진행되었다.
“90만!”
“110만!”
“170만!”
베릭트의 능숙한 진행에 분위기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금액이 치솟고 아이들은 하나둘 낙찰되어 갔다.
낙찰된 아이들을 실은 끌차는 단 뒤쪽의 대기실로 사라졌다.
“낙찰받은 상품을 즉시 수령하고 싶으신 분은 1층 로비로 향해 주시면 됩니다. 시간은 금이니 목적을 이루셨다면 더 남아 계실 필요는 없죠. 카드, 현금, 귀금속, 어느 방식으로든 결제가 가능합니다!”
은행에 대한 불신 탓에 현금이나 금품만을 화폐로 쓰는 이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경매장은 금품 감정사를 따로 고용하고 내부에 금고를 두기 마련이었다.
바마가 카인을 슬쩍 보며 말했다.
“군침이 돌겠군. 같은 범죄자를 털어먹는 것도 네 주특기 아니었나?”
카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헥사메디컬의 주식을 매입하며 최근 운용 가능한 자금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길가에 돈이 떨어져 있는데 줍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특히 연구 단지와 병원을 운영해야 하니 앞으로 유지비가 쭉 나갈 예정.
때문에 47번 구역에서 나오는 수익 외의 곳에서도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인간과 수인, 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이들이 단 위에 상품으로 올랐다.
수인과 인간의 혼혈종이 나왔을 때 바마는 몹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아득.
바마는 분명 단 위의 아이와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이런 경매장에서 여동생과 함께 정체 모를 마법사에게 팔려 갔었으니.
경매는 수 시간 동안 이어졌고 카인은 관조하듯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 뒤 사흘을 더 104번 구역에 머물며 경매에 참여했지만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중한 건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은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적이 함정을 파 두고 이쪽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그 의견에는 바마와 실버팽도 동의했지만, 처음보다는 그 가능성이 옅어졌다고 생각했다.
“라이카의 말이 이쪽으로 하여금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려는 거짓 정보였을 수도 있겠지. 혹은 사실이지만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포섭 후보가 베릭트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생각을 단순화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
바마와 실버팽의 목소리엔 약간의 불만과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는 카인은 아무 표정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카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일을 보고 온 다음 시작하지. 이틀 뒤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도록.”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마와 실버팽을 뒤로 하고 카인은 방을 나섰다.
탁.
미래를 위해 안배해 둬야 할 일이 있었다.
[부활]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을 때 1회에 한하여 되살아납니다. 부활에는 3일의 시간이 소요되며, 부활 시 기존의 모든 기억을 상실합니다.
[남은 특성 포인트: 1]
‘부활’ 특성은 이미 습득한 채였다.
작품 후반부, 세계관 내 흑막이 보유하고 있는 특성.
기억의 상실은 분명 다른 것과는 비견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페널티다.
하지만 카인은 자신의 경우 오직 일부의 기억만 소실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기억력]
분류: 고유 - 패시브
효과: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습니다.
바로 ‘기억력’이라는 특성 때문에.
‘부활’은 기억을 상실시킨다.
‘기억력’은 기억을 보존한다.
이 세계에서 비어 있는 설정은 자신이라면 그렇게 짰으리라 하는 방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설정의 상충 시 발생할 일 역시 자신의 예상 범위 안에 있을 터였다.
‘거기에 몇 가지 안배만 더 해 둔다면.’
페널티를 완벽에 가깝게 상쇄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이점들 역시 명확하다.
동기화율의 초기화.
마석과 촉매 사용으로 손상된 신체의 초기화.
여유분으로 남아 있는 특성 포인트.
드드드-
부활 특성 발동 시 새롭게 태어날 곳은 대륙의 남쪽 최극단 여신상 앞이었다.
104번 구역에서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카인은 차에 시동을 걸고 104번 구역의 외곽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외곽의 어느 건물 옥상 급수탑 뒤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녀는 차가 사라진 황무지를 바라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후드 아래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돋보였다.
“104번 구역으로 올 줄은 알았지.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위치를 드러내다니 무슨 생각일까.”
제이나는 카인 일행보다 먼저 104번 구역에 도착한 상태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상대가 카인임을 알아보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변용마법에선 마나의 흔적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카인임이 드러나는 사소한 행동 습관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바마가 옆에 있는 점도 식별에 한몫했다.
「블루서펜트에서 저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활동 범위가 대폭 늘어날 테니까요.」
베릭트의 포섭은 진작 끝났다.
카인 일행을 기습할 기회도 있었지만 나서지 않은 것은 라이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97번 구역의 유적지에서 생명의 씨앗이 발견되었다는군. 확인하고 가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숲에 미친 그 야수는 최근 보스의 지시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조직이 흔들려 더 이상 득을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건방지게. 사업 기반을 마련해 준 게 누구인데.’
막대한 상납금을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라이카의 구역 내에 있는 상업 건물은 본래 보스의 소유라 할 수 있었다.
바마와 파르테르의 구역에 있는 시설들 역시 그랬다.
47번 구역이 카인에게 넘어가고, 최근 바마가 사업 활동에 미진했던 탓에 상납금은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몇 년 내로 지금의 세계는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어디를 둘러보든 지금의 척박한 대지가 아니라 녹음이 풍성한 땅을 마주할 수 있는 낙원에 가까운 세계가.
‘보스는 신세계로 가는 티켓을 내 것도 구해 주겠다고 했어.’
보스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뒷골목에서 거둬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약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입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입이 줄어들수록 확보할 수 있는 티켓도 줄어들 테니까.
“…….”
제이나는 옥상에 한참을 더 머물렀다.
카인의 차에 부착한 위치 추적기가 점점 더 멀어져 탐지 범위를 벗어났다.
이제 움직여도 될 것이다.
제일 까다롭고 두려운 상대가 자리를 비웠으니.
제일 안전한 것은 라이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카인에게 패해 도망쳤던 일. 분명 보스가 실망했을 거야.’
공을 먼저 세울 생각이었다.
바마와 수인 무리.
제일 좋은 것은 카인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의 전력을 줄이는 것도 충분히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카인은 라이카가 도착하고 힘을 합쳐 제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결심을 내린 제이나는 옥상을 내려왔다.
시간이 지나 한밤중이 되어 뒷골목으로 향했다.
“표시된 곳으로만 가면 돈을 준다고?”
두둑한 돈주머니를 내밀자 부랑자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경매장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이에요. 운영이 끝났을 시간인데,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에요.”
제이나는 부랑자의 손에 돈주머니에 더해 무색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올렸다.
라이카의 체취를 포집해 만든 액체였다. 인간은 맡을 수 없는 희미한 향이 뚜껑 사이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 혹시 위험한 일 아니오?”
부랑자의 의심은 제이나가 꺼낸 두 번째 돈주머니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부랑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받아 제이나가 지정해 준 경로를 따라 거리를 지났다.
그 경로에는 잿빛늑대가 머무는 여관 앞 보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장, 지금….”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잿빛늑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그래. 나도 맡았다.”
창밖을 내다보자 외투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지나는 남자가 보였다.
체구로 보아 라이카는 아니었다.
라이카의 냄새 역시 미약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부하 중 하나같습니다.”
“드디어 흔적을 드러냈군요. 정찰을 보낸 것이 아닐까요. 대장.”
실버팽은 그 말에 동의했다.
수인의 경우 인간보다 체취가 더 강렬하고 특색이 있기에 쉽게 숨길 수 없다.
특히 수인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후각을 자랑하는 늑대 종 앞에서는.
104번 구역에 머무는 사흘 동안 라이카의 체취를 포착한 적은 없었다.
카인의 말대로 적이 먼저 도착해 감시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다면 분명 어디선가 라이카의 체취가 풍겨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 일어나라. 최대한 넓게 퍼져 미행한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라고 했던 카인의 말은 라이카에 대한 복수심에 묻혀 버렸다.
최근 아무런 전투가 없어 욕구 불만 상태였던 탓이기도 했다.
부하들뿐 아니라 자신 역시.
탁. 탁.
20여 늑대의 발걸음이 달빛 아래 골목을 지났다.
아주 은밀하고도 사뿐하게.
라이카의 체취가 풍기는 것은 오직 미행 대상 하나. 그를 쫓을수록 잿빛늑대는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역시 정찰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주변 다른 곳에선 라이카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미행 대상이 경매장 안으로 사라졌다.
실버팽은 뒤따라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복귀할 것인지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라이카의 얼굴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결정은 내려졌다.
“쫓아간다.”
미행 대상을 붙잡아 현재 라이카의 위치와 계획에 대한 정보를 캔다.
경매장에 상주하는 베릭트 역시 제거 대상이니, 지나치게 신중한 카인을 대신해 목적을 달성한다.
그것이 실버팽의 생각이었다.
“큽!”
입구를 지키던 직원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실버팽은 손톱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부하들과 함께 경매장 안으로 진입했다.
피.
오랜만에 느끼는 그 질감과 냄새에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지 안쪽에 다른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냄새를 따라 통로를 돌고 돌았다.
그리고 불이 켜져 있는 경매장 안에 도착했다.
미행 대상은 중앙의 단 위에서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붙잡는다.”
실버팽의 말과 함께 그를 포함한 잿빛늑대는 미행 대상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단 위에 오른 순간.
철컹.
쿵!
“……!”
미행 대상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던 실버팽이 뒤를 돌아보았다.
천장에서 거대한 철제 우리가 떨어져 내려 있었다.
“대장, 지금…!”
부하들 역시 크게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잿빛늑대들의 모습을 보며, 관객석 한쪽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인이 인간보다 열등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죠.”
쿵! 쿵! 쿵!
제이나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한 잿빛늑대들이 우리를 흔들고 내리치는 소리에 묻혀 전달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이내 원래대로 표정을 바꾸었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짐승들.’
수인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이기에 우리가 망가질 일은 없었다.
아무리 날뛰어 봤자 저들의 힘만 빠질 터였다.
어쨌든 쉽디쉬운 일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수인들을 인형처럼 조종하는 일쯤은.
짝.
제이나의 손뼉과 함께 경매장 입구에서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나타나 우리를 에워쌌다.
보스에게 배정받은 조직원들.
만일의 상황을 위해 배치하였긴 하나, 그들이 나설 일은 없을 터였다.
‘이제 이 각성제를 살포하기만 하면.’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찌르고.
저들 손으로 짐승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맞이할 테니까.
‘카인. 마법 실력은 모르지만 머리로는 내가 위인 것 같네. 그 의심 많은 성격인 네가 진 이유야.’
차라리 첫날 베릭트를 다 같이 제거하려 했다면 자신 혼자서는 막지 못했을 것이다.
제이나는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그리고 각성제가 담긴 병을 쥐고 철제 우리를 향해 던질 자세를 취했다.
“뭔가 재밌는 일이 있나 보군.”
그때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