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노예 시장 (1)
프로이드가 치료에 사용했던 거즈와 소독약을 정리하며 말했다.
“상처가 깊긴 하네만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네. 안정을 취하면 금세 회복할 걸세.”
“사과하지. 아직 집 정리도 다 안 되었는데 환자를 받게 해서.”
“아닐세. 필요한 도구는 병원으로 옮기려 이미 꺼내 놨었네. 이미 전에 진료했던 환자이기도 하고.”
카인은 부상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바마를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런 바마의 등장에도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니가 아는 자 같더군.」
오히려 놀란 쪽은 바마를 들쳐메고 프로이드의 집으로 옮긴 실버팽 쪽에 가까웠다.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이의 정체가 바마라는 말에 순간 얼어붙은 표정을 했었으니.
카인은 근처의 의자를 끌어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바마의 피부에 남은 거대한 손톱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가능성이 큰 건 라이카의 습격인가.’
바마를 저 꼴로 만들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적어도 ‘괴물’이라고 부를 만한 이가 많지 않은 30번대와 40번대 구역 일대에서는.
더욱이 러스트우드에서 라이카와 마주쳤었기에, 녀석이 내부의 첩자를 의심할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차피 바마는 언젠가 죽어야 한다.’
하지만 맹약을 맺었기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일 수는 없다.
블루서펜트를 무너트린 뒤 바마를 엘렌 교수와 재회시켜야만 맹약의 조건이 달성되어 녀석의 숨을 끊을 수 있다.
그 시점은 머지않았다.
하지만 바마와 재회한다면 엘렌 교수는 맹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엘렌 교수와 맺은 맹약.
자신의 친오빠와 재회할 때까지 이쪽에 무조건 협력한다는 것이 맹약의 조건이었으니까.
기한은 3년 내.
양측이 진심으로 동의해야 성립하는 것이 맹약이기에, 그녀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하지만 바마가 죽는다면.
바마와 맺었던 맹약은 자연스럽게 해제되어 지킬 필요가 없어진다.
엘렌 교수와 맺었던 맹약은 조건의 이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3년 동안 그녀를 종복으로 부릴 수 있다는 얘기와 같았다.
‘중간에 수가 틀어져 둘이 재회를 하고, 맹약이 해제될 걱정 없이 말이지.’
맹약 불이행의 대가로 3년 뒤 자신이 목숨을 잃을 것이긴 하나, 어차피 그때가 되면 이 세계에서의 모든 상황이 종결되어 있을 터였다.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 해도, 그에 대한 대비책 역시 생각해 둔 상태였다.
드륵.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마나를 퍼트려 한 차례 주변을 탐지하기도 했지만, 역시 미행은 달라붙지 않았다.
라이카가 뭔가 수를 쓰기 위해 일부러 바마를 살려 보낸 것이 아니라, 정말로 놓친 것이란 얘기였다.
다시 시선을 돌려 바마를 흘끗 보았다.
어차피 47번 구역에 기반이 갖춰지며 바마의 이용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복수 대상 중 하나기에 어쭙잖은 동정심을 품을 생각도 없었다.
철저히 체스 말로 사용하다 때가 되면 버릴 생각이었다.
‘죽지 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바마가 라이카의 손에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정해 둔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
바마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대로 다른 계획을 따라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다시 시간이 지났다.
사옥에서 업무를 보던 카인은 바마가 의식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달받고 다시 프로이드의 집을 찾았다.
옷가지로 피부를 가린 바마는 다소 멍해 보였다.
“…익숙한 상황이군. 그 의사가 나를 치료해 주었나.”
“나갈 때 고맙다는 말을 잊지 마라.”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다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이마를 찡그리며, 바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벽이었다. 아지트 중앙에 라이카가 나타났고, 부하들과 함께 날뛰었지. 모든 게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기습을 당했던 탓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이나가 끼어 있었다. 마법을 이용한 침입이겠지.”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나의 장기는 빙결 마법과 더불어 세밀한 좌표 지정을 활용한 이동 마법이었다.
과거 파르테르와의 일전 당시, 이쪽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지척에 다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이나가 개입했다면 보스가 너를 제거하는 것을 허가했다는 얘기가 되겠군.”
“그렇지. 그런데 라이카는 내가 너와 내통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보안을 유지했는데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
바마의 섬세한 성격을 고려하면 딱히 결정적인 증거는 새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보다는 추측을 토대로 내린 라이카의 신중하고도 과감한 결정이라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었다.
녀석의 촉은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예리했으니.
‘의심 가는 부분은 확실히 도려내고 재정비를 하겠다는 건가.’
바마가 최근 조직 내에서 보인 미적지근한 태도도 의심의 단초를 붙이는 데 한 역할을 했을 터였다.
“…전투 중 라이카는 그런 이야기도 했다. 자신이 다음으로 포섭할 인물은 104번 구역에 있으니 이번에도 어디 방해해 보라고.”
카인은 순간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도전할 테면 도전해 보라는 건가.’
어쩌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바마를 일부러 놓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어마어마한 자신감과 오만함이라 할 수 있었다.
‘104번 구역에 세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몇몇 후보가 떠올랐고 그중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을 추렸다.
노예 상인 베릭트.
인간과 수인이 거래 품목으로 오르는 블랙마켓의 주인.
“갈 생각인가? 라이카 혼자라면 모를까 제이나가 붙어 있어 함정일 가능성이 있다.”
“…….”
카인은 생각에 잠긴 채 베릭트에 관한 설정을 떠올렸다.
‘녀석은 인간과 수인, 혹은 혼혈까지 손대지 않는 것이 없지.’
104번 구역에 갔을 때 벌어질 상황이 여러 경우의 수로 나뉘어 카인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카인이 말했다.
“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출발하지.”
상대가 하고 있는 대단히 큰 착각을 깨트리고 사실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도전을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라는 사실을.
* * *
“이런 외곽 지대에 위치한 땅에 오는 것은 오랜만이군.”
카인은 ‘104번 구역’이라 쓰인 낡은 표지판을 땅에 바로 꽂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푸석하게 갈라진 흑갈색 대지.
그 위에 다닥다닥 자란 건물들은 풍파와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거리엔 쓰레기가 나뒹굴고 쥐가 돌아다녔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은 생활 하수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카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자리가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군. 이런 높은 번호 대의 구역에 고급 숙박 시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알고 있다. 용병 시절 이런 곳을 뒹굴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실버팽은 카인과 마찬가지로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뒤로 늘어선 스물의 잿빛늑대 무리 역시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꽤나 주목을 끌었을 만한 인원수와 행색.
하지만 거리를 오가는 이 누구도 카인과 잿빛늑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행인들 모두 얼굴과 몸을 가린,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 와 본 적이 있기도 하다. 시중을 들 노예를 구하는 귀족의 호위를 맡아 오기도 했었지.”
엄밀히 말해 노예는 불법이다.
하지만 경찰의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에 공공연하게 거래가 된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고 다닐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시중을 들 이를 구하는 건 양호한 편이겠지.”
쓰다 버릴 실험체가 필요해.
성적 취향을 충족하기 위해.
혹은 미식을 위해.
그리 떳떳지는 못한 목적으로 노예를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카인의 시선이 바마를 향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썩 유쾌한 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역겨운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이기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몸의 감각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까.
바마의 가느다란 동공은 과거의 기억을 잡아보려는 듯 거리를 바라보다가 잿빛늑대 무리로 향했다.
“그보다 호위가 이 녀석들로 충분할까. 라이카가 팔을 휘두르면 다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
그 말에 실버팽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봐 주는 건 한 번만이다. 내 부하들을 모욕하는 말을 또다시 한다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비늘 한 조각 남지 않도록.”
프로이드의 집으로 옮길 때 실버팽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바마의 피부를 본 상태였다.
때문에 바마가 인간과 수인의 혼혈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늘이라는 단어에 바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해 볼 테면 해봐. 개새끼들 발이 느려서 내 옷자락 한 번 스칠 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마의 적대감은 인간과 수인 양쪽에 차별을 받으며 자라 왔기에 세상 그 자체에 품은 악감정에 가까웠다.
잿빛늑대의 경우, 바마가 원수인 라이카와 같은 조직의 간부라는 이유에서 적대감을 느꼈다.
“그만.”
순식간에 험악해졌던 분위기가 카인의 한 마디로 가라앉았다.
바마와 실버팽 모두 못내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호위는 이들로 충분하다. 이런 시가지에선 숫자보다 전략이 중요하니.’
확실히 라이카는 강적이었다.
수인 중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육체에, 수인으로서는 극히 갖추기 힘들다는 마나회로까지 구축했으니.
부상으로 운신에 제한이 생기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직접 싸움에 참여할 때가 많지 않지만, 만에 하나 녀석이 앞뒤를 재지 않고 진심을 다한다면 전장이 초토화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마나 실버팽 역시 만만치 않은 전력이다.’
라이카의 숨을 끊을 수 있을지 장담치는 못하지만, 적절한 지시하에 싸운다면 적어도 패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는 전력이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현재 47번 구역에서 업무 대리를 보고 있는 밀시안까지 대동했을 것이다.
주요 전력이 빠진 빈틈을 타 라이카나 제이나가 본진을 급습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본진의 방어 외에도, 슈프림 시큐리티는 이런 음지에서 사용할 패가 아니기도 하고 말이지.’
그들은 어디까지나 ‘에반’으로서 양지에서 활동할 때 운용할 패였다.
그래서 지금 자신은 변용 마법으로 또 다른 얼굴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꼴꼴꼴-
하수가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카인 일행은 구역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매 참가인과 그를 수행하는 호위들. 어디를 가든 이쪽과 비슷한 구성의 무리가 보였다.
구역 주민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외지인을 대상으로 주점이나 여관을 운영하는 이가 대다수였다.
‘상대는 이쪽보다 먼저 도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미 노예 상인 베릭트를 만나 포섭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아직 구역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이카와 제이나, 둘 다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인물들이니.’
도망친 바마가 어디로 피신을 할지 추측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다음 행선지가 104번 구역이라는 정보가 상대에게 넘어갈 것이란 사실을 추측하는 일 역시도.
추측은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카인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주요 병력을 47번 구역에 잔존시키고 소수 병력만을 대동해 104번 구역으로 올 것이라고.
‘나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리가 없다.’
카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적의 입장이라면 분명 함정을 파 두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것이 합리적이니까.
“주변에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실버팽이 카인에게 속삭였다.
“아직 적도 우리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나 보군.”
104번 구역은 딱히 진입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은 광활한 장소로, 누군가 구역에 새로 진입하는 것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감시책을 심는다면 경매장 주변이겠지. 건물이 단 하나뿐이니. 근처의 적당한 곳에서 대기해라. 지금부터는 바마와 둘이서 움직이지.”
“알겠다.”
카인에게 통신 기기를 받은 실버팽은 잿빛늑대와 함께 거리 한쪽으로 사라졌다.
곧 거대한 크기의 경매장 건물이 나타났다.
“경매 시작은 10분 뒤입니다. 서둘러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매장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딱히 신분 증명도 필요 없었으며 경매 참여금이 많음을 내보일 필요도 없었다.
투기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기에 좌석의 수가 넉넉하고, 경매 분위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열띠어 가기 때문이었다.
물론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자유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입구 옆쪽에는 또 다른 입구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재력을 입증하기만 한다면 층이 높은 더 좋은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이그니스의 옐로우 카드. 인증되었습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내가 먼저 줄을 서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하? 줄은 그쪽이 먼저 서 있었지만 이쪽 입구에 먼저 도착한 건 나요.”
그 앞에서는 직원이 쩔쩔매고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남아 있는 최고 등급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모양이었다.
카인의 입장에서 더 높은 장소란 경매 참가자들의 면면을 더 용이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나가지.”
카인이 직원에게 다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고, 실랑이를 벌이던 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