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늑대와 소녀 (2)
“석화증의 치료제라니….”
나일스는 혼란스러웠다.
마병만큼은 아니지만, 악명이 높은 세 개의 질병이 있다.
온몸의 근육이 돌처럼 굳어 전신이 마비되는 석화증.
수면 시간이 길어져 끝내는 영영 잠들게 되는 영면증.
시야가 흐려지다 암흑 외엔 보이지 않게 되는 암증.
마병과 마찬가지로 정기가 부족한 땅에서 태어난 탓에 걸리는 질병.
물론 나일스는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세 질병 모두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석화증의 치료제라고.’
말도 안 된다.
그게 그렇게 쉽게 가능하다면 치료제는 진즉에 개발되어 대륙 전체에 퍼졌을 것이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는 펠릭스와 같은 또 다른 사기꾼인가. 그럴 목적으로 나를 끌어들이려 했는가.
‘이런 배합식이 말이나 된다는 말인가.’
일반적인 약학 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배합식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살필수록 치료제의 개발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재의 조합은 앞서 들어간 재료의 부작용은 제거하고 본래의 효과는 극대화되도록 맞물리는 방식으로 짜여 있었다.
배합에 들어가는 각 양도 정밀하기 짝이 없어, 마치 하나의 아름다운 수학 공식을 보는 것 같았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뒤 나일스가 입을 열었다.
“이 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간혹 황무지의 유적 같은 곳에서 고대마도왕국의 기록서 같은 게 발견된다고 듣긴 했소만….”
“직접 고안했다.”
“…….”
역시 쉽게 알려 줄 생각은 없는 듯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눈앞의 배합식이 이제까지 보아 온 그 어떤 배합식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것을 실험해 보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근질거린다는 것.
“지나오는 길에 연구 단지가 될 곳이라 했던 곳이 있지 않소.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겠소?”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헥사메디컬의 연구소와 창고에서 온갖 장비와 약재를 함께 가져온 상태였다.
지금쯤 일꾼들에 의해 장비의 설치와 약재의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다.
“직원을 붙여 줄 테니 먼저 출발하지. 나는 이야기가 마저 끝나고 가겠다.”
나일스는 카인이 부른 직원과 함께 응접실에서 퇴장했다. 얼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카인이 시선을 돌려 말했다.
“프로이드. 클랙필드를 떠나 이곳에 왔다는 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결정한 것으로 여겨도 되겠지.”
“물론이네. 너무 큰 기회를 잡게 되어서 아직도 떨떠름할 뿐이네.”
클랙필드에 프로이드를 호위하러 갔던 직원이 이미 카인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상태였다.
「47번 구역에 세울 병원의 원장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적은 정해진 상태였다.
블루서펜트.
라이카와 보스.
파르테르와 마찬가지로 병력과 병력의 싸움이 될 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었다.
프로이드를 부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공 힘줄의 정비자를 곁에 두는 것 외에도, 부상자를 치료할 인력이 필요했다.
“다방면의 의료 지식이 있으니 병원을 운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건물 부지는 나일스의 연구 단지 옆. 후에 기회가 된다면 정식 의사 면허를 딸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
프로이드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면허까지…. 아닐세. 발급 비용이 어마어마한데. 그렇게까지 도움을 받으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않겠나.”
의사 면허는 ‘벽 안쪽’의 의료 협회에서 이뤄진다.
시험의 난이도는 평이하나 발급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높아 최상류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
의사 수를 제한해 밥그릇을 지키려는 행위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벽 바깥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의사는 모두 무면허라 보아도 무방했다.
“병원이 커지면 분명 후에 문제 삼는 이들이 있을 거다. 부담 갖지 않아도 좋다.”
“고, 고맙네. 받은 도움이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을 해야겠어.”
프로이드가 감격한 얼굴을 해 보이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석화증의 치료제라니. 아까 보여준 배합식은 진짜이거나 혹은 그에 준한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근거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니까. 치료제를 만들어 팔 생각인가?”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된 목적은 또 다른 자금원의 확보였다.
47번 구역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에서 적지 않은 수익이 나긴 하나 나가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직원들에게 주는 급료를 비롯한 시설의 운영 비용은 땅을 파서 나는 것이 아니니까.
‘석화증의 치료제라면 당장 급한 숨은 틀 수 있다.’
치료제 개발의 성공은 확정되어 있다. 자신이 짠 설정에 대한 지식을 그대로 이용하는 일이니 말이다.
약재를 기를 농장은 확보되어 있고, 치료제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설비 역시 헥사메디컬의 기업 단지에서 운송해 오고 있다.
곧 대량 생산에 들어가 상품화하여 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늦어도 두 달 이내로는.
“세상에 내놓기만 하면 분명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걸세. 완치가 아니라 증상을 조금 늦춘다고만 해도 사겠다는 이가 넘쳐날 거야. 매출이 얼마로 잡힐지 상상도 안 되는군.”
카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매출에 더해, 종잇조각에 가까운 가격으로 사들인 헥사메디컬의 주식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릴 것도 명확한 일이었다.
“기업의 몸집은 최대한 불릴 생각이다. 벽 안쪽도 활동지로 삼아야 할 테니.”
벽 안쪽으로의 ‘입국.’
자산 조건은 쉽게 충족될 터였다.
신분의 경우, 제르비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물론 치료제를 출시하기 전에 약효 검증은 거칠 필요가 있겠지.”
카인이 실버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은 좀 어떤가?”
“…똑같다. 주기적으로 근육이 마비되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하고 있지. 덕분에 쓸데없는 부상도 입고 말이다.”
실버팽이 자신의 어깨에 난 검상을 흘끗 보았다.
“그런데 석화증의 치료제라고.”
“가능하다.”
“가능한가?”
“그래.”
“그렇군.”
실버팽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 역시 이제까지 석화증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시도해 본 상태였다.
치료가 말처럼 쉽게 가능하지 않음을 다른 누구보다 뼛속 깊숙이 알고 있었다.
섣부른 기대를 걸지 않는 것.
일종의 방어 기제인 셈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감도 큰 법이니까.
‘인간에 대한 불신도 한몫하겠지. 나를 믿고 따라왔다고는 하나, 아직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으니.’
카인은 실버팽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뒤로 치료제와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오갔다.
“그럼 나는 먼저 가 보겠네. 새집을 둘러보고 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
대화에 지루함을 느껴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레니가 프로이드의 말에 쪼르르 다가왔다.
“또 봐요! 아저씨!”
응접실을 나가기 전, 레니는 환한 미소로 카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실버팽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늑대 아저씨도 또 봐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곁에 있어 주셔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어요.”
레니의 조그마한 손이 그보다 두 배는 될 실버팽의 손을 꼭 붙잡았다.
“늑대 아저씨는 에반 아저씨가 주는 느낌이랑 비슷해요.”
실버팽은 순간 흠칫했지만 달리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잠시 정적이 흐르고, 레니는 실버팽에게도 환한 미소를 지어 준 뒤 프로이드와 함께 사라졌다.
탁.
방 안에는 카인과 실버팽만 남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인이었다.
“의외군. 몸에 인간의 손이 닿는 걸 꺼리는 줄 알았는데.”
“…….”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실버팽도 스스로 조금 놀란 상태였다.
레니의 훅 들어오는 행동에 순간 반응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후에도 손을 떨쳐 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왜 가만히 있었을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카인은 레니의 스스럼없는 행동에도 다시 한번 놀랐다.
레니는 과거 늑대 형태의 수인에게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었으니까.
‘과연.’
카인은 아직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실버팽과 레니가 사라진 문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넌지시 말했다.
“47번 구역에는 잘 적응하고 있나?”
“적응이랄 것도 없다. 나를 비롯해 부하들 모두 거처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으니까. 전투가 없으니 몸이 근질근질하기는 하더군.”
“라이카와의 일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꽤 오래 이곳에 머물러야 할 수 있으니 도시 곳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시간이 남았다는 말은 말 그대로였다.
백수왕 라이카.
이제까지의 적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뒤에 전쟁에 임할 생각이었다.
오히려 초조한 것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일 터였다.
자금원이 줄어들고, 인력 확충을 위해 보낸 조직원들이 모두 차단당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반응이 없는 실버팽에게 카인은 다시 운을 띄웠다.
“대기하는 동안 부탁을 하나 하지?”
“부탁?”
“조금 전 보았던 아이에게 도시를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수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혼자 집 밖으로 나오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다. 최근에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실버팽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었다.
카인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이상하게 너에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니, 함께 시간을 보내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
덧붙여 실버팽 역시 인간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앞으로 지시에 따라 인간과 협력을 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기에, 고칠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다.
그게 카인의 생각이었다.
실버팽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지. 일단은 돌아가겠다.”
카인과 실버팽은 빌딩 밖으로 나갔다.
“직원을 붙여 줄 테니 차를 타고 가지.”
“괜찮다. 걸어가겠다.”
실버팽은 예의 무뚝뚝한 걸음걸이로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를 본 행인들이 움찔움찔 멈춰 섰지만 그뿐,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카인은 도시 외곽 쪽에 위치한 농장으로 향했다.
끼익.
농장 정문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경비를 서고 있던 슈프림 시큐리티의 대원들이 경례를 올렸다.
카인이 손짓을 하자 경비들이 일제히 손을 내리고 양옆으로 길을 비켜섰다.
47번 구역 내 농장 대다수는 본래 헥사메디컬의 소유였다.
심은 작물이나 노동자의 고용은 그들 소관이었기에, 살펴본 뒤 새로운 치료제 생산에 맞춰 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카인이 농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 남루한 차림의 주민 몇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슈, 슈프림 시큐리티의 대표님이시죠? 저, 저기 이것을….”
그들이 내민 꼬깃꼬깃 접힌 봉투에는 수십 장의 지폐가 들어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안심하고 거리를 돌아다녀 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인근 주민들이 함께 모은 돈으로 보였다.
과거 들었던 보고가 떠올랐다.
순찰을 도는 대원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기호품이나 먹을 것을 주려 하는 주민들이 종종 있노라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는 오히려 사회의 더 낮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부분이겠지.’
오히려 도심으로 가며 거리의 생활 수준이 나아질수록 이런 감사함의 표시를 하는 이들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카인은 봉투를 다시 주민들에게 내밀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금액이 너무 하찮아 받을 마음이 들지 않는군.”
주민들은 다시 봉투를 권하려 했지만, 카인의 냉랭한 눈초리에 움찔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봉투를 가지고 사라졌다.
“이 거리 주민들의 대표인가 보군. 대원 몇 명을 붙이지. 돈 냄새를 맡은 벌레들이 꼬일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민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카인은 뒷짐을 지고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토지의 관리 상태나 작물의 수확 현황 하나하나를 모두 살피며 미비한 사항을 지적했고, 그때마다 관리자들은 쩔쩔매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이번 수확이 끝나면 빈 땅엔 모두 내가 지시한 작물을 심도록. 종류와 양 무엇 하나 어긋나지 않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외곽을 따라 헥사메디컬 소유의 농장을 계속 돌았다.
그리고 여섯 번째 농장을 시찰하고 나올 때, 차량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레니와 함께 도시를 돌고 있던 실버팽이 길에 쓰러진 누군가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쓰러진 자의 입에서 대표님의 성함이 나왔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