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큐어올 (6)
“에반 대표! 이제 대체 무슨 상황이오!”
아닐 것이다.
정말로 아닐 것이다.
이제껏 쌓아 온 경험이 있기에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반의 배신.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함정을 파 놓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인지도 모른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머리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펠릭스 대표. 그쪽이 보는 그대로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소? 벨포트도, 벨포트도 한패는 아니겠지!”
“딱히 끌어들일 만한 가치도 없는 자라. 나 혼자 벌인 일이오.”
펠릭스의 얼굴은 시뻘개져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같은 배를 탄, 아니 같은 교인끼리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카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멍청하고 힘없는 자들은 똑똑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이이…!”
술자리에서 자신이 꺼냈던 말.
그 순간 상대가 어떤 타협의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웅-!
개인 호위로 붙어 있던 펠릭스의 마법사가 주위로 방호를 펼쳤다.
최소한 총알에 몸이 벌집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한 후에, 펠릭스는 즉시 입구 쪽의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저자들을 제압해라! 죽여도 좋다! 어서! 목을 베는 이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용병들이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박찼다.
“밀시안이라고 했소! 그자 밑에서 얼마를 받고 일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최소한 그 두 배는 줄 수 있소! 당장 그자의 목을 베시오! 무기 역시 그런 허접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을 지급해 줄 수 있소!”
펠릭스는 재력이라면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쌓아온 개인 자산뿐 아니라, 회사에 쌓여 있는 투자금 역시 어마어마했다.
계약이 끝나면 회수할 것이긴 하나, 용병들에게도 오르하르콘 합금으로 된 무기를 지급하지 않았던가.
“…….”
밀시안은 말없이 펠릭스를 바라보았다가 용병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릉.
그가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그의 낡은 검집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몇 번의 선을 그린 것은.
채챙!
“……!”
깔끔하게 반으로 잘린 용병들의 검이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마나를 두를 무기가 없는 마나유저는 그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일반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카인의 강화 마법을 받은 밀시안은 용병들 사이를 빠르게 누볐고, 검 손잡이 아랫부분으로 명치를 찍어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용병들 사이에 홀로 선 밀시안이 말했다.
“애초에 에반 님 외에 다른 사람을 따를 생각도 없습니다만, 설사 소속을 옮긴다 해도 그쪽이 지금보다 더 좋은 장비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군요.”
순도 100퍼센트의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이 조명 아래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일스를 지나, 카인은 펠릭스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 무기 없이 맨손으로 다가가고 있음에도, 펠릭스와 그 호위들은 더 없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승자와 패자는 결정되었다.
바로 앞에 다가온 카인이 피스톨을 꺼내 펠릭스의 목대에 바짝 붙이는 순간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올라가지. 발표회가 곧 시작될 테니까.”
* * *
벨포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단 위에 섰다.
기자와 주주, 업계 관련인들의 이목이 모두 자신에게 몰려 있었다.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고도의 집중 상태였다.
긴장과 흥분감이 반씩 섞인 미소를 지었다.
역사적인 순간이 될 터였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거짓이 탄로 나면 최악의 사기극으로 기록될 테지만, 어쨌건 업계의 역사에 큰 방점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니까.
“지금부터 이번 연도 3분기 사업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외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먼저 신약 큐어올의 재료 수급 현황을 말씀드리면….”
흥분과 기대를 잔뜩 안고, 벨포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어디에….’
강당 안을 둘러보았지만, 발표 앞부분에 단 위로 올라 인사를 하기로 했던 펠릭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강당 뒤쪽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펠릭스.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뒤따라 들어온 얼굴을 보고 벨포트는 속으로 경악했다.
‘나일스? 대체 저 녀석이 어떻게 이곳에….’
침착하게 발표를 이어 나갔지만, 머리는 이미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위험 신호를 울리고 있었다.
펠릭스 대표의 표정도 이상했다.
마치 뒤에 바짝 붙어 선 에반 대표가 총이나 칼 따위를 등에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서, 설마.’
나일스의 손에 들린 자료 뭉치.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나일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는 에반 대표.
그 모습에 용기를 얻기라도 한 듯 주먹을 쥐고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녀석.
벨포트는 본능적으로 외쳤다.
“저자를 막아!”
일순간 장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 정적은 나일스의 발소리를 오히려 더 돋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벨포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 끝에 있는 나일스를 보고 웅성거렸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사람들의 반응 따위, 벨포트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장내에 배치된 경비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마치 사전에 어떤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사옥에 배치된 경비들은 모두 슈프림 시큐리티 소속이라는 사실.
“불법 침입자입니다. 쫓아내십시오! 어서!”
여전히 경비들은 반응이 없었다.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본데?”
“일단 지켜보자고.”
펠릭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세상 전체가 기울어져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퍽! 퍽!
단 위로 올라오는 나일스를 막기 위해 발길질을 퍼부었다.
하지만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녀석은 도리어 자신의 발을 붙잡고 그대로 밀어내며 단 위로 올라왔다.
쿵.
덕분에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상황에 대한 혼란스러움 탓에 에반 대표가 근력 강화 마법을 걸어 주었다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삐이-
넋을 잃고 있는 벨포트에게 나일스가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좌중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셰비어 연구소의 전 연구원 나일스라고 합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만 그 소리는 크지 않았고, 장내엔 오직 나일스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렸다.
“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술렁임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빛은 호기심, 혹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개중엔 특종을 예감했는지 자세를 고쳐 앉아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
벨포트는 망연한 눈으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입술을 덜덜 떨며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장년밖에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다.
나일스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큐어올은 가짜입니다.”
짧고 나직한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공기를 울린 순간, 농도 짙은 혼란과 소란스러움이 장내를 덮쳤다.
“지금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야?”
“큐어올이 가짜라고?”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웅성거림은 커져만 갔다.
“약이 가짜라고! 헛소리하지 마! 사기꾼아!”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부받았던 음료 캔을 던지며 외쳤다.
헥사메디컬에 많은 돈을 쏟은 투자자이리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
발치에 떨어진 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일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말씀드리겠습니다. 1년 전 셰비어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와 그 이후 벌어진 모든 일에 관해.”
나일스가 들고 있던 자료를 좌중들을 향해 펼쳐 보였다.
그것을 빼앗으려 벨포트가 달려들었지만, 나일스의 팔 움직임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당시 진행되던 연구는 마병의 치료에 관한 것으로 피실험자들은….”
나일스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장내의 소란은 잦아들었다.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 어느새 모두가 집중해 있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절박한 이들의 피땀 어린 돈을 갈취하려는 사기꾼들을, 저는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장내는 고요했다.
분명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누구도 곧장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기자만이 강당을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서로 속삭이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가짜입니다! 자료도 다 위조된 것입니다! 주주 여러분! 기자 여러분!”
등 뒤로 벨포트의 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일스는 강당 뒤쪽을 보았다.
에반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탁.
품에서 녹음기를 꺼내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버튼을 눌렀다.
「대중들이야 개나 돼지 같은 짐승들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 보겠다고 치료제를 기다리는 꼴이라니.」
장내의 모두가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루한 삶은 목숨이 늘어나도 여전히 비루할 뿐인데, 참 우습지 않습니까?」
하나 그 목소리는 평소와 온화하고 기품 있는 어투가 아닌, 거만하고 냉소적인 어투를 하고 있었다.
의자가 와르르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에 확신을 가진 기자들이 특종의 전파를 위해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약이 가짜라고!”
“거래소에 연락해! 지금 당장 헥사메디컬의 주식을 모두 팔아 버리라고! 어서! 빨리!”
뒤이어 이성을 잃은 주주들이 급히 통신을 돌렸고 먼저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펠릭스 대표! 이게 대체 무슨─!”
“이 개새끼가!”
카인은 붙잡고 있던 펠릭스의 등을 달려오는 주주들 쪽으로 툭 밀었다.
펠릭스는 주주들에게 멱살을 붙잡혀 점점 벽 쪽으로 밀려 나갔다.
장내는 완전한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 속에서, 카인과 나일스는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주변 상황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풍경처럼.
나일스는 속이 꾹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샌가 눈가에 눈물도 맺혀 있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엔 정말 자신이 믿고 따라볼 만한 이가 나타난 것 같다고.
잠시 나일스를 바라보던 카인은 휴대용 통신기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곧 피에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헥사메디컬의 주가가 폭락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떨어질지 무서울 정도인데요?」
카인이 대답했다.
“계획대로 진행하지. 헥사메디컬은 우리가 집어삼킨다.”
* * *
실버팽은 맨션 고층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한 차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뿌옇게 올라가는 담배 연기 너머, 슬럼가의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벌써 열흘째인가.’
러스트우드를 떠나 47번 구역에 도착한 후로 지난 시간이었다.
카인이 마련해 준 거처에서 지내며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필품이나 담배와 술 같은 기호품 모두 카인이 공급해 주었기에 외출할 일 자체가 많지 않았으니까.
외출이 적은 것은 자신과 부하들 모두 과거 오랜 시간 용병으로 활동했던 점도 한몫할 것이었다.
인간이 건설한 도시에서의 생활엔 뼈가 굵어,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새로운 것도 없었으니까.
“…….”
따지고 보면 인간 세상이라고 러스트우드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인간 사회에도 강자와 약자 간의 계급 차이가 존재하며, 먹이사슬이 하층에 있는 이들은 포식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약탈당하기 마련이었다.
실버팽의 시선에 셋으로 짝을 지어 움직이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총과 방호복.
그리고 깊게 눌러 쓴 헬멧.
카인이 운영하는 슈프림 시큐리티라는 경비업체의 대원들.
47번 구역의 특별한 점을 꼽자면 저들의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버팽의 눈으로 봤을 때 카인은 분명한 포식자였다.
어중간한 포식자들은 그 앞에서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할, 포식자 중의 포식자.
그런 존재가 사비를 들여 피식자들을 지킨다니.
꽤나 생경하고 신선한 일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더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주변에서 잦은 빈도로 일어나는 소란을 저들이 진압하지 않는다면, 밤낮으로 들리는 비명과 고함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을 테니까.
─꺄아악!
생각과 동시에 시선 아래 골목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를 후줄근한 옷차림의 남자 셋이 둘러싸고 있었다.
실버팽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어차피 근처를 지나는 경비대원들이 곧바로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비명을 못 들은 것인지, 예상과 달리 경비대원들은 소녀가 있는 골목을 지나쳐 반대편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실버팽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둔다면 소녀가 어떤 꼴을 당할 지는 분명했다.
고함을 질러 소녀의 위치를 경비대원들에게 알릴까 했지만, 카인 외의 인간과 불필요하게 말을 섞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고민하는 사이에도 상황은 위급해져 가고 있었다.
탁.
결심은 마친 실버팽은 피우던 담배를 난간 밖으로 튕겼다. 그리고 동시에 난간 밖으로 몸을 날렸다.
탓.
유연하고 탄탄한 그의 다리가 담배보다 먼저 지면에 닿았다.
머릿속으로 골목의 위치를 떠올리며, 땅을 박차고 달렸다.
골목을 돌고, 돌고, 다시 돌고.
눈앞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소녀와 침을 흘리는 남자 셋이 보였다.
“뭐, 뭐야?”
남자 셋이 반응하기도 전 실버팽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개중 둘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어 기절시킨 뒤 양 어깨에 들쳐 메었다.
그리고 경비대원들이 지나고 있을 골목 쪽으로 떨어지도록 허공을 향해 힘껏 던졌다.
남은 적은 하나.
마저 제압하려던 순간,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석화증.
특정 부위에서 시작해 몸의 근육 전체가 돌처럼 굳고 마는 질병.
꽤 오래 앓아온 병으로, 석화가 진행된 범위는 왼쪽 다리의 무릎 아래까지였다.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아 일상생활에는 아직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처럼 격한 움직임을 취할 때면 일시적으로 증상이 심해졌다.
쐐액!
날아드는 나이프를 보고 실버팽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살의를 품은 나이프가 어깨를 스쳤고, 허공엔 핏방울과 함께 은빛 털이 휘날렸다.
‘이런 뒷골목의 인간 따위에게….’
실버팽이 인상을 구겼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상대 따위 자신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해야 옳았다.
그리고 몸 상태가 멀쩡했다면, 라이카와의 일전에서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실버팽의 인상이 험악해진 것을 본 적이 움찔했다.
다음 순간 석화가 풀린 실버팽이 적에게 돌진해 멱살을 잡았다.
“커, 커걱!”
“…….”
순간 목을 비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카인의 당부가 다시 한번 머리를 울렸다.
실버팽은 적을 힘껏 들어 골목 너머로 던져 버렸다.
차분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를 돌아보자, 눈을 꼭 감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갈색 머리의 소녀의 몸집은 실버팽에 비하면 너무도 작아 보였다.
한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소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실버팽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실버팽은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해 몸을 돌렸다.
‘내가 달래 주려 해 봤자 더 겁을 먹고 울겠지.’
인간과 수인이 서로에게 품은 두려움, 혹은 혐오감.
그것을 실버팽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불량배들이 날아온 방향을 추적해, 곧 경비대원들이 도착할 것이었다.
실버팽이 막 걸음을 떼려던 때.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가지 마요.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도와주세요. 제, 제 이름은 레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