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큐어올 (2)
“이거 정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에반 님?”
나는 흰 가운을 걸친 채 건물 입구에서 나온 벨포트를 바라보았다.
앞 포켓에 검은 글씨로 새겨진 ‘헥사메디컬 연구소장’이란 문구가 눈에 띄었다.
“…….”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연구소 외에도, 헥사메디컬의 부지 내에는 사무용 빌딩과 공장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가득했다.
“확실히 투자를 많이 받고 있나 보군. 갖춰 놓은 시설이 여느 대기업들 못지않은 것을 보면.”
“하하. 성장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저도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는 내 뒤쪽에 줄을 맞추어 주차된 탑차 쪽을 흘긋 보며 말했다.
“직원들을 보내셔도 되었을 것을, 이렇게 직접 방문해 주시다니 감사드립니다.”
“농장에서 수확된 첫 작물이니만큼 직접 차량의 호위를 맡았다.”
47번 구역의 농장에서 수확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재배를 마친 약용작물들이었다.
“역시 에반 님. 생각이 깊으십니다. 아니, 이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이제는 이름보다 직함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한 편이지.”
내가 빙그레 미소 짓자, 그는 따라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농장을 계속 늘릴 예정이고, 그때마다 슈프림 시큐리티에 경비를 맡길 생각이니까요. 그밖에 다른 사업도 병행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희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는 듯, 그의 어투에선 친밀과 신뢰의 감정이 묻어 나왔다.
정보 길드에서의 첫 만남부터 퍼틸랜드의 용병들을 인계하고 파르테르와의 전쟁 후 맹약을 완료하기까지.
생각해보면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으니, 그가 동료애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선 더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싶지만,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작물들이 창고로 잘 들어가는 것만 확인하고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업 발표회가 아흐레 남았으니 한창 준비할 것이 많겠지.”
“맞습니다. 제가 발표 중 일부를 맡아서 말입니다.”
그는 옆으로 다가와 내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자금에 여유가 있으시다면 있는 대로 모두 헥사메디컬 주식을 매수하는 데 쓰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고점이라 떠들고 다니지만, 제대로 된 주가 상승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이 곧 저점이라는 이야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조언 고맙군.”
“어쨌든 둘러보다 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만 일을 하러 가야겠군요.”
벨포트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 운전수들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연구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백색의 5층 건물.
이 안에서 온갖 종류의 신약 개발이 이루어지고, 그에 관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가고 있을 터였다.
마병의 치료제, ‘큐어올’에 관한 자료 역시도.
“…….”
하지만 내가 찾는 자료는 이곳에 있지 않았기에, 발길을 돌려 기업 단지 바깥으로 향했다.
62번 구역의 풍경은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 더 경직되고.
활기보단 적막함이 감돌며.
규율화 되어 있는 분위기.
다분야의 기업이 입주해 있는 도시로, 사옥과 공장, 그리고 기숙사가 구역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업종끼리는 뭉칠수록 반사 이익을 누리기 쉽기에, 거리마다 특정 분야의 기업들이 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식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제게 맞춘 무기를 만든다 생각하니 묘한 기분입니다.」
로우택틱의 ‘대장간’이 있는 구역이기도 했다.
밀시안은 두 개의 미스릴 원석을 가지고, 구역 외곽에 있는 대장간으로 가 있는 상태였다.
탁.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날 때,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어깨를 부딪쳐 왔다.
고개를 꾸벅인 그가 사라지고, 내 손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정보 길드의 요원이었다.
골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봉투를 뜯어 서류를 꺼냈다.
「나일스. 1년 전 발생한 셰비어 연구소 폭발 사건의 두 명의 생존자 중 하나. 사건 이후 연구소는 폐쇄. 나일스가 47번 구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폭발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라 추정. 폭발의 원인은 불명이며 더 자세한 사항은 자료의 부족으로….」
셰비어 연구소는 현 헥사메디컬의 전신이었다.
앞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크게 눈길을 주지 않고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나일스는 현재 66번 거리 12-1번지에 거주. 활동 반경은 그리 넓지 않음.」
내가 찾는 정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 * *
66번 거리에 위치한 한 카페.
나는 홀을 등지고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나일스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 1인석에 앉아, 가끔 나일스를 쳐다보는 세 명의 남자 손님들 역시도.
그들의 얼굴엔 따분함이 가득했으며, 간헐적으로 고개를 돌려 나일스를 보는 동작은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감시자들.
연구소 폭파에 관련된 비밀은 모르되 실력은 뛰어난, 외부에서 고용한 용병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나는 간단한 샐러드와 고기 요리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카페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굴은 에반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얼굴로 바꾼 상태였다.
탁.
테이블 사이를 지나, 나일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일스. 셰비어 연구소의 전 연구원.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야기하지. 당신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으니까.”
나는 잠시 바라보던 나일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다시 정방향으로 돌렸다.
식사를 계속하며, 다른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리 놀라지도 않고.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은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레.
“감시가 붙은 건 알고 있소. 1년 전부터 따라다니는 자들이니까. 아주 조금 정도는 더 크게 말해도 상관없을 거요. 최근 몇 달 동안은 별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고, 저들 입장에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 그리 열성적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지는 않소. 저들이야 고용주에게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나는 포크를 움직이며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깎지 않은 수염에 더벅머리.
오랫동안 세탁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추레한 셔츠.
그의 퀭하고도 멍한 눈빛엔 어떤 삶의 의지도,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왔소? 일단 목적이 무엇이든 내게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을 거요.”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프로젝트 큐어올은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지. 적지 않은 돈을 쏟아부어 치료제를 개발했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순간 그는 들어 올리던 나이프를 멈칫했다.
“멈추지 말고 식사를 계속해라. 감시가 허술하다 해도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치료제를 수년간 복용한 피실험자들의 몸에서 마병의 문양이 사라졌을 때만 해도 성공인 줄로만 알았을 거야. 임상 실험 종료 후, 피실험자들이 모두 마병의 원래 증상대로 심장이 멈춰 죽지 않았다면 분명 원래 계획대로 세간에 치료제를 발표했을 테고.”
“…….”
“당시 프로젝트의 총괄자는 막대한 손해를 입을 위기에 처했고, 실험 결과의 마지막 부분만을 잘라내 세간에 발표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지. 입막음을 위해 당시 연구원들과 아직 마병의 증상이 발현되지 않은 피실험자들을 모두 죽이면서 말이야.”
옆자리에서 헛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나일스가 말했다.
“…꽤 많이 알고 있는데. 당시 프로젝트와 관련된 자요? 연구소 밖의? 극소수를 제외하면 살아남은 자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중 하나요?”
“헥사메디컬의 몰락을 바라는 자란 사실은 분명하지.”
짧은 침묵이 오가고, 식기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내 생각을 정리한 투로 그가 말했다.
“나를 찾은 이유가 뭐요?”
“헥사메디컬의 사업 발표회가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겠지. 당신의 증언이 필요하다. 큐어올이 실패작이라는 증언.”
“소용없소. 걸인 꼴에 가까운 지금의 내가 사실을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완치된 줄 알았던 피실험자들이 마병으로 죽었다는 자료를 공개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나일스, 당신이 불타는 연구소에서 간신히 빼돌려 숨긴 자료 말이지.”
나일스의 포크가 다시 한번 허공에서 멈췄다.
“…정말 정체가 뭐요?”
“주변의 감시는 전 연구소장이 붙여 놓은 걸 테고.”
“…….”
나일스의 포크는 고기를 찍었다.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당신 말대로 연구 자료는 내가 숨겨 놓았소. 하지만 감시가 붙어 찾으러 갈 수가 없소. 놈들은 24시간 내내 나를 따라다니니까. 심지어 이 도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가로막고 있소.”
헥사메디컬 측으로서는 당연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나일스가 기업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 있는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셈이니.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을 터였다.
연구 자료를 영원히 묻어 버리기보단, 언제 어디서 발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내가 그쪽을 지켜 줄 수 있다.”
“하, 당신이 무슨 수로? 감시자가 이 카페 안에 있는 셋이 전부라 생각하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계획을 세워 그쪽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제거해 주지. 헥사메디컬이 몰락할 때까지 신변을 책임져 주겠다.”
나일스가 ‘쯧’하고 혀를 찼다.
“당신 정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지 않소. 나를 납치해 뒤를 캐려던 경쟁 기업들이 몇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소. 지금 이 카페 밖에도 헥사메디컬이 고용한 용병이 수십이나 깔려 있으니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일을 벌인다면….”
“그래서 그렇게 패배자처럼 살 텐가?”
“뭐요?”
“나일스, 평생 그렇게 살 거냐는 말이다. 과거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른 구역에 있는 가족도 보지 못한 채 평생 이곳에 갇혀서 말이지.”
“아니, 밖에는 용병들이….”
“스스로 발버둥은 쳐 보았는지 모르겠군.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 사내라 들었는데 겁쟁이에 불과했어. 나는 먼저 일어나지.”
“잠깐….”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 그릇을 반납한 뒤, 카페를 나섰다.
통유리로 된 카페의 벽,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일스와 눈이 마주쳤다.
“…….”
그는 나를 대차게 노려보았지만 이내 자괴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단시간에 양극을 오가는 감정.
내면에 많은 갈등을 품고 있으며, 심리 상태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증거였다.
‘은폐한 연구 자료의 위치는 도심에 있는 대도서관. 정확한 위치는 그만이 알고 있다.’
레드스컬의 비자금을 숨겼던 반 우즈 때와 같았다.
에피소드는 설계했지만, 주요 사물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내가 설정한 부분이 아니었다.
도서관 전체를 수색하는 품을 들이면 자료를 찾을 수는 있으나, 문제는 사업 발표회까지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나일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나는 기한 내에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 역시 내가 설정한 조연이니까.
* * *
나일스의 일과는 별것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거리를 방황하다 늦은 오전에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공원에서 멍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일과에 맞추어, 매일 오전 카페를 찾았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매번 다른 얼굴을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도 참 끈질기오.”
나일스는 처음에는 낯선 얼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와 흠칫 놀랐으나, 이내 내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당신이 했던 말을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소. 틀린 말은 아니더군. 나는 막연히 구원만을 바랐소. 경쟁 기업이 나를 빼내려 시도할 때, 그저 상황에 몸을 맡겼을 뿐 무언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지.”
카페를 찾은 지 사흘째에 그가 꺼낸 말이었다.
“분명 꿈이 있었소.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 저런 아이들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오?”
통유리 밖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팔뚝엔 마병의 문양이 나타나 있었다.
“한데 그 꿈은 언젠가 사라져 버렸던 것 같소. 당신이 한 말을 듣고 조금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지.”
그가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