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112화 (112/227)

#112. 러스트우드 (3)

언제부터였을까.

녀석이 지켜 보고 있던 건.

간혹 눈을 뜨고 자는 수인들이 있기에 가만히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곧 들려온 목소리가 녀석이 깨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내가 잘 때는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이름을 말해라.”

회로의 마나를 어깨와 가슴, 목 부근으로 끌어올렸다.

기도를 타고 빠지는 공기에 인위적인 압력이 가해지며, 내 목에선 초소에 있던 한 수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투카입니다. 죄송합니다. 건물 뒤로 누군가 침입한 것 같아 순찰을….”

“이리 가까이 와라.”

시야가 어두워 저쪽에선 이쪽을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변용마법으로 다시 한번 얼굴을 바꾸고, 달빛이 드는 창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맞군.”

부스럭 소리와 함께 어둠 속 녀석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몸을 일으켜 창문과 눈높이를 맞췄고, 달빛이 녀석의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방금 잠에서 깨었다. 침입자가 있었다면 기척을 느끼고 그보다 더 일찍 깨어났겠지. 순찰을 마치고 돌아가라.”

“예. 알겠습니다.”

몸을 돌려 창문에서 멀어졌다.

그때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멈춰 세웠다.

“잠깐. 옷이 삐뚤어졌군.”

녀석의 긴 팔이 창문을 열고 내쪽을 향해 다가왔다.

사방은 고요해 건물 밖 벌레 소리만이 들려왔다.

지난하고 길게 느껴지는 순간.

마침내 녀석의 손이 내 앞에 도달해 멈춰 섰다.

“내가 고쳐 주지.”

시간의 흐름이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후웅-!

천천히 펼쳐지던 녀석의 손바닥이, 돌연 기세를 바꿔 번개같이 나를 움켜쥐려 들었다.

명백한 살의.

나는 예비해 두었던 마나로 각력을 강화하는 동시, 발바닥 밑에 바람을 일으켜 복도를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냄새가 다르군. 누구지?”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손바닥에 끌어올린 풍(風)계 원소와 금(金)계 원소에 절삭과 유지 두 종의 보조원소를 결합했다.

지잉!

손아귀를 중심으로 물리적 형태를 갖춘 바람의 검날이 형성되었다.

역수로 고쳐 쥐어, 낙하와 동시 티르혼의 손등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끼기긱!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충격의 반동을 이용해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바닥에 착지했다.

탁.

‘마법저항능력을 갖췄나.’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더러 특정 속성에 대한 마법저항을 지닌 녀석들도 있었다.

마나를 다루기 힘든 대신 육체 능력이 극대화된, 수인이라는 종족 자체의 특성이었다.

조금 전 사용한 마법의 정제 단계가 높진 않았다곤 하나, 그걸 감안해도 상대하기가 골치 아픈 특성이란 점엔 변함이 없었다.

“실버팽이 보냈나? 얼굴은 어떻게 바꾸었지? 에투카와 단순히 비슷한 수준이 아닌데, 마법인가?”

녀석은 딱히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호기심을 내비쳤다.

“…….”

대답하지 않고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도주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물러설 때 물러서더라도 녀석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파악해야 했다.

“대답이 싫다면 잡아서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들면 되겠지.”

쐐액!

녀석의 거대한 손아귀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시 바닥을 박차 피하는 동시, 출력을 높인 바람칼날을 손가락 사이 한 점에 찔러 넣었다.

챙!

강한 반발과 함께 몸이 밀렸다.

‘확실히 바람 계열의 마법은 먹히지 않는다. 정제 단계를 높이는 것보다는 다른 속성의 마법을.’

녀석은 상체 일부를 창문에 비집어 넣은 상태였다.

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반대편 손이 날아들었다.

쾅!

몸을 피하자 허공을 스친 녀석의 손이 벽에 충돌했다.

건물이 흔들리고 돌조각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멈춰 선 녀석의 팔에 전격 마법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도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수인이 마법을 쓴다고. 그래,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지.”

계속해 몸을 움직였다.

녀석의 공격은 민첩했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중, 원소의 조합과 배합, 그리고 정제 단계와 출력을 달리해가며 여러 마법을 시험했다.

“언제까지 잔재주만 부릴 생각이지!”

내가 붙잡히지 않자 슬슬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건물이 무너질 수 있어 마음껏 팔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때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초소에서 이만한 소란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지.’

포위당한다면 탈출이 여의치 않아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티르혼의 팔에 고출력의 화염마법을 사용했을 때, 나는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출력, 같은 보조 원소 조합의 다른 속성마법을 사용했을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이 조합은 반응이 있군.’

사용했던 원소의 종류과 배합 비율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나는 점멸을 사용했다.

1층 방의 실내가 나타났고, 벽 앞에서 연이어 점멸을 사용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오오-

등 뒤론 티르혼의 짜증 섞인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 * *

티르혼의 거처에 설치했던 도청 장치의 상당수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했으니, 거처를 한 번 수색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나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도청 장치의 대부분은 중요한 위치에 숨긴 몇몇을 숨기기 위한 미끼용과 다름없었기에.

─팔에 부상을 입으신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니다. 간밤에 벌레 한 마리에 침소에 들어와서 말이지. 나를 미워하는 녀석이 보낸 것 같더군.

덕분에 나는 지금 블루서펜트와 티르혼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있었다.

─예. 어쨌든 방금 말씀드린 것이 저희의 전달 사항 전부입니다. 보스께서는 30번대 구역 일부의 관리를 티르혼 님께 맡기고, 47번 구역을 탈환할 시 추가적인 포상을 내리는 것 역시 고려한다고 하셨습니다.

─블루서펜트의 간부라.

─예. 결코 나쁘지는 않은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묻지. 전에 의뢰를 맡아 외부로 나갔을 때 라이카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녀석이 블루서펜트의 간부를 맡고 있다고.

─예. 맞습니다. 저희가 모시는 분이 라이카 님입니다.

티르혼이 꺼끌꺼끌한 웃음을 흘린 뒤 말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재미있어. 이미 지난 줄로만 알았던 인연이 이렇게 현재에 다시 이어지니. 게다가 나도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려던 때니 이보다 더 타이밍이 좋을 순 없겠지.

─사업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곳, 러스트우드의 짐승들에게서 돈을 있는 대로 빨아 먹을 사업 말이지.

티르혼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좋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보스도 분명 추가적인 투자를 약속하실 겁니다.

─한 가지 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땅에 박힌 돌을 솎아내야 한다.

─돌이라고요.

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분명했다.

티르혼은 분지를 지키고 있는 실버팽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곳이 노른자 땅이라고 할 수 있지. 러스트우드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으니까. 사실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 투자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지.

녀석의 말대로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실버팽의 무리가 티르혼의 무리를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구성원 개개의 전투력은 실버팽 측이 높을지 모르나 숫자에서 배 이상 차이가 나니.’

게다가 실버팽 측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분지 중앙의 묘목들.

신경 쓸 것이 있다는 말은 전투에서 큰 불리함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간부직을 수락하셨으니, 이미 블루서펜트의 일원과 다름없으시니까요.

─그래. 사업 건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지.

나는 도청을 종료했다.

티르혼이 간부직을 수락했다.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며, 내가 다음으로 취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 * *

새벽.

희미한 달빛 아래.

타박. 타박.

나는 분지로 향하는 야트막한 내리막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분지 중앙의 풍경이 가까워져 왔다.

어설프게 쌓아 올려진 몇 개의 망루 위에 횃불이 일렁였다.

아래쪽엔 근무 외 인원이 수면 중인 걸로 보이는 천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막 하나가 스물을 수용한다면, 총인원은 200가량인가.’

고철 더미로 만든 울타리 앞, 경계를 서고 있는 늑대 수인 둘이 내 앞을 막아 세웠다.

“이 시간에 누구지? 용무를 밝혀라.”

“실버팽을 만나러 왔다.”

“뭐? 이 새끼가 지금 실버팽 님의 이름을 함부로….”

왼쪽 녀석이 흥분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오른쪽 녀석이 제지했다.

“잠깐. 이 시간에 찾아온 건 이상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일 수 있으니까. 실버팽 님을 무슨 일로 만나러 왔지?”

“전해라. 빼앗긴 생명수를 되찾을 때가 왔다고.”

두 녀석의 얼굴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생명수 이야기는 수인들에게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특히 오랜 기간 숲을 가꾸기 위해 노력해 온, 실버팽이 이끄는 잿빛늑대들에게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뭘 알고 있지? 어디 소속이냐?”

“그건 실버팽에게 직접 할 이야기다.”

두 녀석이 서로에게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나를 보았다.

“실버팽 님을 만나게 해 주지. 양손을 묶고 무릎은 꿇은 채로!”

두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바람을 일으켜 스텝을 꼬이게 만들었고, 어렵지 않게 두 녀석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컥!”

망루에서 뛰어내린 다른 넷 역시 몸을 움직여 빠르게 제압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주위는 배를 부여잡고 엎어져 있는 늑대 수인들로 가득해졌다.

“침입자다!”

울타리 안쪽에서 다른 녀석들이 몰려나와 공격 자세를 취했을 때, 사이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너희들이 상대할 자가 아니다.”

다른 녀석들보다 체구가 더 크고, 털은 잿빛이 아닌 은빛을 띠는 늑대 수인이 무리를 헤치고 나왔다.

한쪽 눈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안대를 하고 있었다.

“피 냄새가 짙군. 인간의 것도 있고 수인의 것도 있어. 이제까지 몇이나 되는 이를 죽인 건지 가늠도 안 되는군.”

“네 부하들 것은 없으니 안심해라.”

실버팽은 앞으로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불빛 아래, 녀석의 그림자가 나를 가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안에서 대화를 들었다. 생명수를 되찾을 때가 왔다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적어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다.”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등을 돌려 안쪽의 천막으로 향했다.

부하들이 양옆으로 쭉 갈라졌고, 나는 그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1인용의 작은 천막이었다.

간이침대 옆에 자리한 탁자 앞에 앉아 녀석이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지. 부디 영양가가 있기를 바란다. 모두가 예민한 시기고,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내 발톱이 널 갈기갈기 찢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과격한 내용과 달리 정적이기만 한 말투와 표정.

눈빛은 고요했으나, 그 안에 작은 폭풍이 담겨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천막의 문을 여미고 녀석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바깥에 묘목을 심고 있던데. 성목이 되기 전에 말라붙겠지. 토지에 식생이 빨아들일 영양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멈추는 순간 그 자리에 숲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영 잊혀질 거다.”

“아니. 몇 년 동안 네가 해 온 일은 헛수고다. 라이카에게 생명수를 도둑맞지 않았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라이카.

그 이름에 녀석이 입가를 씰룩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라이카와 관련이 있는 자인가? 너는 누구지?”

나는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변용마법을 풀고, 원래의 얼굴로 돌렸다.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녀석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카인. 너와 같이 라이카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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