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뱀이 기는 거리 (3)
“슈프림 시큐리티 사옥 근처의 쓰레기장에서 찾은 종잇조각이에요. 무슨 글씨가 쓰여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
폴라 경위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불에 탄 자국이 남아 있는 종잇조각이었다.
“9월 16일, 12번 거리. 그렇게 쓰여 있군요.”
종잇조각을 집어 글씨를 들여다보던 자비르 경위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네, 맞아요. 카인의 필체죠. 위조 가능성도 있지만 저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비르 경위님 생각은 어떤가요? 특무대에서 경위님만큼 카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잖아요?”
“…….”
종이를 잡은 자비르 경위의 손끝이 떨려왔다.
곧 떨림이 멈추고 그녀가 말했다.
“카인이 쓴 글씨가 맞습니다. 이런 악필은 글자 하나하나의 굵기와 열까지 완벽히 모조하기가 힘듭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 성격이니 모조 대상이 될 원본 글씨가 세상에 많지도 않을 겁니다. 슈프림 시큐리티 근처의 쓰레기장에서 찾았다고 하셨습니까?”
“네. 쓰레기봉투 밖으로 흘러나와 있던걸요.”
폴라 경위는 ‘역시’하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수사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비셔스 경사?”
종잇조각을 보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아, 예.”
“경사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아요? 경사도 카인을 꽤 쫓아다니지 않았었나요?”
“전 잘 모르겠군요. 너무 갑작스럽게 발견된 단서이기도 하고, 위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서….”
폴라 경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아도 확실한 증거를 두고 고작 위조 가능성 운운하는 판단을 내리다니.
역시 이 남자는 집안만 조금 볼만 할 뿐 업무 면에선 능력이 썩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앞에서 끌어줘야겠지. 동기이기는 하니까.’
동정심.
어렵게 찾은 단서를 공유하는 것은 조금이지만 그런 이유도 있었다.
수사 기간이 길어져 빨리 일을 진척시켜야 한다는 점이나, 그의 가문에서 금품을 동반한 청탁이 들어 왔다는 점 외에도.
자비르 경위가 말했다.
“역시 제이슨 대표가 카인과 연관되어 있다는 추리가 맞았던 것 같군요. 그의 대리인이든, 단순히 매수인과 매도인 관계이든.”
“날짜와 장소는 무엇을 뜻할까요?”
“접선, 혹은 그날 12번 거리에서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거란 뜻일 수도 있겠군요.”
“일단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글씨가 진짜 카인의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고, 제이슨 그자가 수사에 혼란을 주려 판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두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비셔스 경사를 빤히 쳐다보고 연이어 말했다.
“카인의 글씨임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위조된 글씨라면 제가 경찰직을 그만두죠.”
“함정일 가능성은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저희가 비셔스 경사처럼 아마추어도 아니고.”
비셔스 경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지금 그는 면박을 당한 것보다도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불에 타고 남은 조각인가. 그 새끼, 뒤처리를 이 따위로…!’
물론 아직까지는 괜찮다.
혹 종이에 쓰인 글귀가 접선 장소와 날짜라 추측한다 하더라도 이 두 여자는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공로를 빼앗고 자신을 비웃는 그녀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폴라 경위가 말했다.
“제이슨 대표를 다시 수사의 중심에 놓아야 할 것 같죠?”
“예. 일단 우리가 이 종잇조각을 발견한 건 그가 모르게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면담 요청을 해서 독대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미 사옥에 대한 조사를 마쳐서 다른 구실을 생각해 보아야겠네요.”
그때 대화를 듣고만 있던 비셔스 경사가 말했다.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오후에 그자와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수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요.”
* * *
띵-.
비셔스 경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화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복도를 지났다.
“손님이 도착하셨다고 대표님께 말씀을….”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을 무시하고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는 제이슨이 예의 그 평온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셨군요. 원래 약속은 내일입니다만, 갑자기 오늘로 당기다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탁.
비셔스 경사는 문을 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놓여 있던 명패를 세로로 세워 제이슨이 보고 있던 서류 위에 내리 찍었다.
쿵!
서류 가운데 부분이 찢기고 책상은 움푹 파였다.
마나를 실은 움직임이었다.
“카인에게 왔던 서신, 확실하게 불태운 것이 맞나?”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르비아와 폴라 경위가 서신의 타고 남은 밑 부분을 발견했다고. 이곳 근처의 쓰레기장에서.”
비셔스 경사는 이를 악물고 단어를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발음했다.
제이슨은 잠시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완전히 불태운 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내용은 어떤 것이 적혀 있었습니까? 그들이 어디까지 정보를 파악했습니까?”
“날짜와 12번 거리라는 대략적인 장소 정도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로서는 드물게 초조해하는 모습으로 창가를 서성였다.
이내 생각 정리한 듯 말했다.
“그래도 그들이 정확한 장소와 시간까지는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통신 장치는 비셔스 경사님 손에 있으니까요.”
“그래.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하지만 머리가 좋은 여자들이야. 카인이 나타나는 날 12번 거리를 떠나지 않고 대기하고 있을 거다. 어디든 최단거리로 갈 수 있게끔 자리를 잡고 말이지.”
“어쨌든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장소와 시간은 저희조차도 당일이 되어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비셔스 경사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품은 열등감이, 상황을 실제보다 더 심각하고 불안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셔스 경사님.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될 겁니다. 카인을 잡는 이가 경사님이 될 거란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
그럼에도 비셔스 경사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가시지 않자, 제이슨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린호드의 용병들이 고양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복용하는 각성제입니다. 아마 저보다는 경사님이 더 잘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이건….”
비닐 백 안에는 회색빛의 고운 가루가 담겨 있었다.
그도 현장을 뛰며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각성제로, 수인이 복용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인간이 복용하면 한동안 마나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는 물건이었다.
“접선 당일 어떻게든 다른 두 수사관과 식사 자리를 만드십시오. 모든 대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이요. 시중에 떠도는 것보다 농도가 높은 물건이니 소량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그만큼 상대가 눈치채기도 힘들 테고요.”
비셔스 경사는 잠시 고민했다.
제이슨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다른 두 경위는 이미 단서를 습득했으며 그에 대한 수사를 벌일 것이다.
다만 종잇조각 하나만으론 정확한 접선 장소와 시간을 알아내지 못한다.
어쨌거나 카인을 잡는 것은 자신이다.
“…….”
그렇다면 만일의 가능성을 위해 동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까지 안배해 두어야 하는가.
비셔스 경사는 고민 끝에 각성제가 든 비닐 백을 받아 품에 넣었다.
“일단 받아 두도록 하지.”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이제까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수사에 임해 웬만한 실적은 모두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지 않았던가.
실제로 이 약을 사용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일을 대비해 챙겨 두는 것은 나쁘지 않을 터였다.
‘동료가 아니다. 내 출세를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이어서 말했다.
“다른 두 수사관은 다시 너를 의심하고 있다. 네가 분명 카인과 연결점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행동에 주의해라. 한 번은 실수라 여길 수 있지만 두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그건 나를 물 먹이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으니까.”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비셔스 경사는 조금 차분해진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호텔 최상층의 불 꺼진 특실.
폴라 경위는 책상 앞에 앉아 쨍한 불빛의 마법 스탠드 아래 종잇조각 하나를 비추어 보고 있었다.
「9월 17일. 47번 구역. 12번 거리.」
필요한 내용만을 담은 간단명료한 메시지.
분명한 카인의 필체.
자비르 경위가 그것을 보증했다.
‘카인의 대리인?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사업가?’
아직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기에 가능성은 어느 쪽으로든 열려 있다.
하나 카인에게 닿을 연결 고리가 될 남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뿌드득-
한 차례 기지개를 켜자 뼈마디들이 소리를 질렀다.
필기 가득한 노트와 펜을 내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심야 시간대로, 복도엔 비상구를 표시하는 초록색 등만이 침침히 빛나고 있었다.
한 층 전체를 특무대의 대장 두 사람만 쓸 수 있도록 배려받았기에 복도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대원들의 방은 모두 아래층으로, 새벽 거리에 탐문을 나간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잠들어 있을 터였다.
탁. 탁.
걸음을 옮겨 복도 끝에 있는 창 쪽으로 향했다.
바람을 조금 쐬어 굳은 머리를 풀 생각이었다.
「도시에 머무시는 동안 저희 호텔에서 지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제이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는 종종 운영과 관련하여 호텔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그의 거동을 살필 수 있었다.
「…그 자가 카인의 대리인이라면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르 경위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조심하고 몸을 사리기만해서는 남들보다 앞서나갈 수 없는 법이야.’
어차피 이 호텔에 머무는 특무대 인원은 적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대.
그리고 비셔스 경사와 그가 이끄는 대.
임시로 편성된 대이긴 하지만 그 무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기습이 들어온다 해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
이제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
복도를 걷던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
복도 끝 저편에 무언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명백한 악의를 뿜어내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손바닥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배어들고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이제껏 무수히 많은 현장을 거치며 길러진 감각이 적신호를 울렸다.
허리춤에 급히 손을 가져다 댔으나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에 검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나 아차 싶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며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고?’
호텔 고층 전체는 특무대가 쓰고 있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엘리베이터는 부분적으로 운행 중이었고, 사실상 이곳에 오르는 경로는 복도 중앙에 난 계단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계단은 대원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둘 중 하나였다.
계단 입구를 지키던 대원들을 소리도 없이 죽였거나, 생각지도 못한 다른 경로로 들어왔거나.
입술을 질끈 물고, 발에 힘을 주었다.
마나를 끌어올리며 번개같이 몸을 돌려 뒤로 뛰었다.
쐐액!
‘무언가’가 날아들며 어깨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세 줄기로 그어진 찰과상.
손톱. 수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상등 아래 녀석의 실루엣이 드러났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 제대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쐐액!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다음 공격을 피했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면했지만 이번에도 팔에 상처가 남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마주쳤던 상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약에 취한 눈동자였다.
‘수인 중에선 최상위에 속하는 개체야. 아무리 각성제 따위를 복용했다 해도 이 정도 빠르기는….’
지금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래층의 대원들이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올라오기를 바라며, 검이 있는 자신의 방으로 뛰는 것밖에는.
몇 번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더 피해내며 그녀는 방에 도착했다.
검 집에서 검을 빼어, 곧바로 몸을 돌려 방 문 방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키키킥! 너, 너구나! 보, 보라색 머리카락!”
쐐액!
상대의 다음 공격은 이미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젠장.’
상대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있지만, 자신 또한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을 거란 사실을 그녀는 직감했다.
검과 손톱이 교차되고, 각자 상대에게 닿기 직전의 순간.
탕!
복도 끝쪽에서 한 차례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