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수사관 (3)
47번 구역의 슬럼.
한 소녀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나가는 길목을, 세 명의 남자가 가로 막고 있었다.
“하아…. 하아…. 결국 이렇게 잡힐 걸 진작 멈췄으면 좋잖아.”
“이 년이 걸음만 빨라서, 하아….”
후줄근한 옷차림새로 보아, 양쪽 다 슬럼에 사는 주민들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는 여자의 눈동자는 점점 공포심으로 물들어갔다.
‘무, 무서워.’
분명 기분이 들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전쟁이 지나가고 한동안 도시의 치안은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원래 경찰들이 자주 순찰을 돌던 상류층 구역은 말할 것도 없었고, 중산층 구역 역시 평화로웠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슬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경계하지 않고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들떠 있었으며, 어느 순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걷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제, 제발 누가….’
그녀가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범죄자들은 폭풍에 말려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소녀의 외침은 골목 벽을 타고 메아리처럼 울렸다.
남자들은 외침을 듣고 움찔했지만, 곧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긴장 풀린 웃음을 흘렸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우리가 괜히 이런 후미진 곳까지 몰고 온 줄 아나.”
“지르게 냅둬. 난 그편이 더 좋거든.”
남자 중 하나가 킬킬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집중 순찰 구역’이라 쓰인 녹슨 팻말을 지나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설사 누군가 외침을 듣는다 해도 도움을 주려 나서는 이가 이 슬럼에 얼마나 있을까.
이젠 모든 게 끝이었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탕!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런, 씨, 무슨─.”
“자, 잠깐.”
약간의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두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탕! 탕!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소녀의 어깨는 움찔움찔 떨렸으며, 감은 눈은 한참이 지나도 떠지지 않았다.
그저 양팔로 몸을 끌어안은 채 두려움에 벌벌 떨 뿐이었다.
탁, 탁.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빌고 빌었다.
앞으로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말썽도 피우지 않을 테니 제발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탁.
발소리가 바로 앞에 멈췄다.
“눈 떠도 괜찮아. 다 끝났어.”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네 명의 남자였다.
모두 총과 슈트, 헬멧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자신 앞에서 멋쩍은 몸짓을 하고 있었다.
“일어설 수 있니?”
네 명의 남자 중 하나, 게드먼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뒤쪽에선 동료들이 상부에 무전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가 꿰뚫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구의 시체를 보면서.
“예. 단순한 동네 건달들로 보입니다. 다른 범죄 조직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 안전 구역까지 호송하고 순찰을 계속하겠습니다.”
소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망울로, 내민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게드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동료들의 슈트 앞쪽에 새겨진 표식이 눈에 띄었다.
X자 형태로 교차된 두 정의 총과 배경으로 그려진 방패.
슈프림 시큐리티.
자신들의 지휘관이 창설한 조직의 이름이었다.
아니, 조직보다는 단체나 기업, 혹은 무장 세력 정도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했다.
현재 맡은 임무가 47번 전 구역의 순찰과 치안 유지이니 말이다.
「앞으로 너희의 주 임무는 거리의 치안 유지가 될 거다. 떠날 사람은 지금 떠나도 좋다. 잡지 않겠다.」
‘역시 그때 떠났어야 했나.’
용병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격렬한 전투와 작전 수행.
쉼 없이 울리는 총성과 금속음.
극한의 긴장감, 살아있다는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일사불란한 지휘.
‘전쟁 때 느꼈던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놈들이 적지 않았지.’
하지만 맡게 될 주 임무가 치안 유지라니.
민간인들의 안위를 우리가 왜 신경 쓴단 말인가.
실망감에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약 150명이 남았다.
‘치안 유지라니. 하다못해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조직을 상대라도 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범죄가 싹을 틔우기도 전에 모두 뽑아 버리고 있으니, 당분간 그런 기회가 올 일은 요원했다.
물론 계약 보수 자체는 몹시 마음에 들긴 했지만.
“흐아앙─.”
그때 소녀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건장한 사내 넷이 흠칫하더니 소녀 주위로 다가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쩔쩔맸다.
“야, 야, 네가 달래 봐.”
“어, 어떻게? 이, 인형? 이 나이대 여자애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멍청아, 인형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 그런 거 가지고 놀 나이는 지나 보이는데.”
“그, 그럼 뭘?”
“사, 사탕? 과자 같은 것을 주면 울음을 그치지 않을까?”
평생 거친 전장만 뒹굴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사람, 특히 어린 아이를 대하는 일에 그들은 익숙지 않았다.
한 명만 남기고, 뭐든 소녀를 달랠 물건을 찾으러 나머지 용병들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감사, 흑, 워요. 흑, 감사해요. 흐극, 구해 주셔서.”
용병들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소녀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진짜, 흐끅, 진짜 감사, 흑, 흐아앙─!”
울음에 섞여 제대로 들리진 않았으나 그 뜻은 분명히 전해졌다.
감사해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이 씨앗이 되어 내린 것처럼, 순간 묘한 감정이 용병들의 마음속에 번졌다.
그동안 살면서 고맙다는 말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의뢰에 대한 보수입니다.」
「덕분에 물건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응? 술 한 잔 산다고? 고맙게 마시지!」
하지만 대부분 금전 관계에 의한 것이거나, 형식적인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때문에 소녀의 감사 표현은 용병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껏 겪은 적 없던, 순수한 감사 인사였기에 말이다.
“히끅, 히끅.”
잠깐의 침묵, 용병들은 왜인지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소녀의 울음이 잦아들고, 그들은 소녀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시 순찰을 시작하며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
고마워요.
소녀의 감사 인사를.
어쩌면 이 일이 그렇게까지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이제는 정말 잘 훈련된 군인 같군요.”
“이미 전투 경험 자체는 풍부한 이들이다. 단지 체계적인 용병술을 익히지 못했을 뿐이지.”
밀시안과 카인은 시체가 치워져 핏자국만 남아있는 바닥을 보며 말했다.
“업무에 불만을 품고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모두가 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이들만이 남겠지. 그걸로 충분하다. 앞으로 계속 이탈이 발생하고, 2주 정도 뒤면 인원이 안정될 거다.”
그때 골목 앞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건달들이 나타났다.
“이쪽이야! 분명 여기에서 총소리가…!”
“분명 한스 비명 소리도 들렸어.”
그들은 골목 가운데 선 정장 차림의 두 남자를 보고 순간 흠칫했다.
바닥의 핏자국과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이 새―!”
탕!
건달들은 총을 꺼내 쏘려 했지만, 그보다 상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 역시 품에서 총을 꺼냈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총을 쏘아 건달들을 모두 쓰러트렸다.
정확히 한 사람에 한 발.
심장 위치가 꿰뚫린 시체들이 바닥에 나부라졌다.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확실히 다뤄 본 어떤 총기보다 사용감이 좋습니다. 장비 때문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인원도 있다고 하더군요.”
용병들의 장비는 모두 새것으로 교체한 상태였다.
기존의 것보다 한 단계 더 성능이 높은 것들로.
전쟁 중 파손된 것들의 교체.
더불어 용병들의 기존 신분을 감추고 주민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가려는 의도도 있었다.
끼익.
표식이 새겨진 차량 한 대가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
용병들이 내려 내게 한 차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체는 수거 후 외곽에서 소각 처리하겠습니다.”
곧 작업이 시작되었다.
어느 새 몰려든 주민들이 그 광경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저 새끼 카탄 아니야?”
“몰려다니던 패거리 다 있는데. 저, 저, 양아치 새끼들.”
“언제 한 번 등에 칼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 죽었네, 잘 죽었어.”
호의적이지 않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들것에 실린 시체가 지날 때 그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거나 침을 뱉는 이도 있었다.
밀시안이 주목한 것은, 그보다는 다른 쪽이었다.
카인에게 속삭였다.
“치안대의 정체를 눈치채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현재 장비들이 전에 것과는 외형이 판이하게 다르다 해도 말입니다.”
카인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더러 눈썰미 좋은 이들이 있겠지.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을 거다.”
아귀다툼을 벌이던 범죄 조직이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치안대로 한순간 변모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령 눈치 챈다 해도 상관없다. 거부감은 결국 꺾일 거다. 주민들에게 중요한 건 도시 지배 세력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얼마만큼 불똥을 덜 튀기느냐 일 테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 주니 군말 없이 받아들일 거다.”
밀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주둔지로 삼을 곳의 안전성 확보가 일 순위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주민들의 민심을 함께 잡는 것도 의도하신 부분 같군요.”
“어떤 일이든 득을 보는 방향이 있다면 굳이 고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카인과 밀시안은 시체가 치워지는 모습을 보다가 골목을 벗어났다.
도로변에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는 두 대의 리무진 앞에 각각 섰다.
“그럼 저는 다음 경매를 위해 출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블리 남매의 추적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다는 장소 역시 조사해 보고 오겠습니다.”
“부탁하지.”
“예.”
카인이 차에 타 문을 닫으려던 때 직원 하나가 파일철을 들고 와 말했다.
“대표님. 말씀하셨던 대상을 찾았습니다.”
“위치는?”
“42번 거리. 2번 구획의 술집입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건네받고 문을 닫은 뒤 기사를 향해 말했다.
“멀지 않군. 바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노후 되고 후줄근한 건물들이 창밖으로 계속 이어졌다.
탁.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옷차림을 후줄근한 여행자의 그것으로 바꾸고, 얼굴 역시 이번 한 번만 사용할 일회용 얼굴로 바꾸었다.
몇 여분 걸음을 옮겨 허름한 술집 앞에 도착했다.
「트러블러즈 하우스」
곳곳이 부서지고 먼지가 쌓인 간판은 고장이 났는지 낮에도 깜빡거리고 있었고, 녹슨 철문은 경첩 하나가 떨어져 기묘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침한 실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낮의 술꾼들이 물에 젖은 걸레짝처럼 테이블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이는 바 안쪽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군.’
카인은 가게 구석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쥐머리 수인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성큼성큼 다가가 테이블 위의 물병을 들어 그대로 녀석의 머리 위에 부었다.
“일어나라.”
“키, 키이익!”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녀석이 기이한 쇳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너, 너, 너 뭐, 뭐, 뭐야! 키힉!”
녀석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주사기와 회색빛 액체가 든 작은 병으로 보아 약에 잔뜩 취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물 과다 사용으로 퇴출당한 그린호드의 전 용병, 하멜락. 맞나?”
“뭐, 뭐, 키익, 내 이름을, 킥, 알고 있어?”
“맞는 것 같군.”
“누, 누군지, 킥! 모, 모르지만 꺼져!”
실소를 흘리던 녀석이 돌연 길게 뻗은 손톱을 휘둘러왔다.
약과 술에 취해 있던 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내가 펼친 「중력장」에 의해 녀석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
아니, 손뿐만이 아니라 녀석의 몸 전체가.
“키, 키킥, 이, 이게 뭐, 킥!”
“일단 술과 약이 좀 깨야 할 것 같군.”
나는 높이와 너비가 있는 접시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곳에 녀석의 얼굴을 처박았다.
곧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 위로 거품이 터져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녀석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학!”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너, 너, 내가 죽일―!”
풍덩!
녀석의 얼굴을 다시 접시에 박았다. 그리고 앞서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은 몇 차례 반복했다.
“깨, 깼어! 킥, 지, 지금 다 깼다고!”
“다행이군.”
녀석의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녀석의 얼굴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고, 곧 격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있던 천 조각으로 손을 닦으며 나는 말했다.
“나와 일 하나 같이 하지.”
* * *
끼익.
도심에 위치한 높은 건물.
그 앞에 고급 리무진이 한 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남자를 향해 경비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카인은 고개를 까딱이고 안으로 진입했다.
내부를 돌아다니던 직원들 역시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멜락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슈프림 시큐리티의 사옥으로 복귀한 참이었다.
“대표님. 건물의 수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여기 인부들과 들어간 자재들의 비용 내역입니다.”
직급이 있어 보이는 남자 하나가 카인에게 따라붙었다.
카인이 파일철을 받아 들자 긴장한 얼굴을 했다.
“…….”
“지하의 투기장은 일단 폐쇄해 두도록. 후에 다른 용도로 활용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서류를 살핀 카인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파일철을 받아 들었다.
복도를 걷는 카인에게 직원들이 서류를 들고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일이 바빠 자리를 자주 비우는 대표 덕에 결재를 받을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슈욱.
카인의 손짓 한 번에 직원들이 들고 있던 파일철이 모두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검토 후 이야기하지. 돌아가 대기하도록.”
직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이 관리를 맡아온 시설을 인수한 이가, 서류에 기재된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성정임을 며칠 만에 파악한 까닭이었다.
횡령을 저질러오던 누군가가 외곽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거나.
서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들이 단체로 해고당했다거나 하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띵-.
그들의 표정이 어떠하든 카인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몸이 올라가는 감각과 함께 곧 13층에 도착했다.
띵-.
잘 닦인 복도를 지나 도착한 집무실.
가운데 놓인 책상엔 금발의 여자가 서류 더미를 앞에 두고 펜을 든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
“할 만한가.”
“나 죽어요. 더 이상 못해. 아니, 안 할 거야.”
그녀가 고개를 뒤로 꺾어 의자 등받이 뒤로 목을 넘겼다.
그리고 노이로제에 걸린 고양이처럼 이상한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호위를 핑계로 집무실에 얼쩡거려, 붙잡아 업무 일부를 맡긴 상태였다.
“일하는 데 방해 안 할 테니 차라리 다른 일을 줘요. 다른 일…. 다른 일….”
“…….”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카인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염동」으로 둥실 띄워 보냈다.
밀시안이 최근 경매에서 구해 온 미스릴 원석이었다.
“네 장비가 될 재료다. 무엇을 만들지 구상해둬라.”
“어? 어? 내 거에요? 진짜로?”
그녀는 눈앞에 둥둥거리고 있는 원석을 보고 놀랐다.
이내 그 밑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양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미스릴 님에게 제가 감히 손대도 되는 걸까요. 제 20년 치 연봉을 합친 것보다 몸값이 비싸신 분인데.”
그녀의 눈동자는 화려한 귀금속 앞에 선 귀족가의 여성처럼 몽롱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미스릴은 철저히 전투용 장비를 제작하는 데만 쓰인다는 것이었지만.
“부담된다면 굳이 받지 않아도 좋다.”
“아뇨!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
카인이 손을 들자 그녀는 황급히 미스릴을 낚아챘다.
옷깃으로 겉을 살살 닦고 신줏단지 모시듯 품 안에 넣었다.
“이따 방에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볼게요. 딱 내 손에 맞는 무기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인이 다가가 자리에 대신 앉았다.
퉁.
새로 받은 서류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투기장과 도박장, 마약거래소 같은 불법 시설물을 모두 폐쇄했음에도 관리해야 할 시설이 적지 않았다.
중상류층을 주 대상으로 한 대형 백화점 외에도, 자잘한 시설이 스무 곳을 넘었다.
“서류를 살피다가 봤어요. 경찰청장의 지시가 떨어져 수도에서 수사관들이 다수 파견될 거라고요.”
정보 길드를 통해 얻은 정보였다.
정보비로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나,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잠깐 몸을 사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설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고 잠시 다른 구역으로 가 있다든가….”
“아니, 나는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는다.”
카인은 의자에 몸을 푹 뉘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새벽에 바마와 나눴던 통신을 떠올렸다.
「보스에게선 아직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다만 경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당분간 활동을 주의하라고 했지.」
카인은 현재 상황을,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가늠했다.
‘역시 그쪽을 먼저 움직이는가. 특정 범죄자에게서 손을 떼라는 명령은 의심을 살 위험이 있지만, 반대로 붙잡으라는 명령은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을 테니.’
이미 말을 뱉은 대로 47번 구역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적지 않은 수의 손님들이 찾아올 테니, 그에 맞는 준비는 해 놓아야 할 터였다.
우웅.
카인의 손바닥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이 내려왔을 때, 얼굴은 바뀌어 있었다.
카인의 것도.
에반의 것도 아닌.
제 3자의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