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투신 (2)
“그 부하들이 지금도 네 부하로 남아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투에 패해 도망치고, 그것을 넘어 회유를 당한 전투원들에 대한 보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금고에 있을 돈에 대한 일정 지분을 약속했지.”
“수작질 부리지 마라. 이미 일반 조직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급료를 지급하고 있다.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금고 따위에 그들이 위험을 감수할 것 같나!”
모든 부하의 충성도가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병적일 정도의 검증을 거쳐 뽑은 스무 명의 정예만큼은 자신을 쉬이 배반하지 않으리라 말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자신과 함께한 시간 자체가 적지 않았으며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목숨을 건 협박 따위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난 네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믿고 말고는 순전히 네 선택의 몫이다, 파르테르.”
호흡을 고른 밀시안과 에스텔이 다시 바닥을 박찼다.
둘의 공격을 받아 내는 파르테르의 머릿속엔 이미 혼란스러운 감정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은 믿을 수 없다.
가능성이 작을 뿐 부하들이 변절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만약 카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금고의 위치는 누구에게도 공유한 적 없다.
하지만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정예 중엔 그 위치를 짐작하고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 피어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투기장의 시설을 파괴하고, 금고문을 여는 정예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알고 있다.
이것이 녀석의 술수이자 계략이란 사실을.
전투 중 녀석의 뱀 같은 혀에 현혹되어 정신이 망가지는 적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이란 단어가 지닌 마력은 강력했다.
핏!
순간 집중이 흐트러지며 방어막의 강도가 약해졌다.
밀시안의 검이 파르테르의 어깨를 스치며 피가 튀어 올랐다.
“…….”
화끈거리는 통증이 올라오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 만에 입는 부상이란 말인가.
온몸의 피가 들끓으며 요동치기 시작했고,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파르테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겼다.
그래. 살아있다.
투기장과 금고.
모두 이제껏 자신이 살아온 이유이자 앞으로도 살아갈 이유이다.
남에게 유린당하는 일 따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팟!
파르테르는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켜 근접해 있던 밀시안과 에스텔을 밀쳐냈다.
그리고 옥상 사이를 건너뛰며 자신의 출발지였던 투기장 건물을 향해 달렸다.
“추격한다.”
밀시안과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이고 옥상을 건너뛰었다.
카인은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거리의 용병들과 적 조직원들을 내려다보다 발밑의 이동마법을 발동했다.
파르테르의 머릿속에 추격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투기장과 금고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그럴 리 없다. 다른 놈들이라면 모를까 그 녀석들이 나를 배신했을 리 없다.’
아니, 알고 있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상대가 ‘그’ 카인인 점을 고려하면 회유당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눈앞의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질주하는 발에 닿는 모든 것은 부서지고 으스러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 돌출부를 밟고 투기장 건물의 입구 앞에 뛰어내렸다.
“막아! 파르테르 님이 오실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정예들은 입구에서 퍼틸랜드의 용병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적의 진입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안도감도 잠시 분노가 치밀었다.
속임수인 걸 알면서도 놀아날 수밖에 없던 자신에 대하여 말이다.
“재지 말고 쏴! 뭐든 다 부숴도 된다고 했으니까!”
“진입하면 적은 무시하고 금고부터 찾아! 그것만 찾으면 이 짓도 때려치우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주제도 모르고 꼬여 든 이 벌레들에 대한 분노가 말이다.
툭.
뒷걸음치며 사격 거리를 확보하던 용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에 닿은 무언가를 확인했다.
“……!”
파르테르의 서슬 퍼런 두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새하얗게 얼굴이 질렸다.
“사, 살려…!”
벌레를 잡듯 양쪽에서 날아든 손바닥에 의해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탕!
총알이 발사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살점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파르테르의 쩌렁쩌렁한 포효는 빗소리를 뚫고 전장을 뒤흔들었다.
희망과 절망.
그를 발견한 각 진영 전투원들의 얼굴엔 서로 다른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파르테르는 전장을 날뛰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찢고, 뭉개 나갔다.
“사, 살려 줘!”
“지휘관님이 곧 오실 거다! 자리를 지켜!”
“난 주, 죽기 싫어!”
용병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갔다.
죽든, 공포에 사로잡혀 전장을 이탈하든.
붉게 변한 빗물이 바닥 타일의 틈새를 따라 흘렀다.
흐르던 빗물은 한 남자의 워커에 가로막혀 멈췄다.
“…….”
검은 머리의 남자는 빗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손바닥을 앞으로 향했고, 곧 그곳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돌풍」
마나의 정제는 이동 중 이미 마쳐둔 상태였다.
현재 수준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마나를 쏟아부었다.
탕!
거대하고도 광포한 바람 줄기가 투기장 입구를 향해 쏘아졌다.
바람은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회전했다.
전장을 가로지르며 가로등이나 주차된 차량 등 경로에 닿는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목표 지점을 관통한 바람이 소멸했을 때, 투기장 입구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곳곳에 튄 핏자국과 찢긴 옷자락만이 그곳을 지키던 정예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예들의 전멸은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사정권에서 벗어난 이도 있었고 애초부터 입구 밖에서 전투 중이던 이들도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순간 집중되었을 때, 분대장들이 들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모든 분대는 건물 내부로 진입한다. 최우선 목표는 금고의 확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모든 분대는 건물 내부로 진입한다.」
“지휘관님이 돌아오셨다!”
용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건물 입구를 향해 달렸다.
“막아라! 절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라!”
파르테르가 바닥을 박차고 입구로 몸을 날렸다.
정예들이 뒤를 따르려던 순간 검은 전류가 날아들었다.
파직!
“끄윽!”
“커헉!”
전류는 그들이 들고 있던 검을 타고 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어대다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움찔거리는 몸 주위론 작은 전류가 파직거렸다.
“카인!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찢어주마!”
입구에서 용병을 막던 파르테르는 전장 멀리 서 있는 카인을 발견하고 외쳤다.
이미 내부로 진입한 용병의 수가 적지 않았다.
수적 열세로 인해 현재도 용병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실시간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차라리 안에서 막는 것이 났다.
어쨌든 금고 앞을 지킨다면 적은 더 이상 전투를 회피할 수 없을 테니까.
“안으로 들어간 벌레들부터 잡아 죽인다!”
파르테르가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향했고 몇 남지 않은 정예들이 뒤를 따랐다.
남은 용병들이 마저 진입한 뒤 거리엔 고요가 찾아왔다.
찰박.
카인의 워커가 입구 앞 물웅덩이를 밟았다.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카인의 뒤를 따랐다.
1층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빗물과 핏자국.
탄흔 가득한 벽과 기둥.
깜빡거리는 불과 안쪽이 헤집어진 채 나뒹구는 집기들.
「치지직─. B4 분대… 지금….」
빗물을 먹은 탓인지 무전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지시를 내릴 일은 없기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배에서 피를 흘리며 벽에 기대어 있는 용병이 카인을 발견하고 말했다.
“파르테르는 위로 향했습니다. 금고를 지키러 가는 거라 생각하고 대다수 분대가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것이 사명이 되기라도 하듯, 그는 힘겨운 숨소리로 모든 말을 또박또박 뱉어냈다.
“고생했다. 전장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점 기억해 두겠다.”
카인의 손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빛에 닿은 용병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었다.
“……!”
놀란 밀시안이 에스텔에게 설명을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건물 사무실 어딘가에 내 부하들을 추격했을 때 작성했던 보고서가 있을 거다. 그것을 우선적으로 확보한다. 지금부터는 내 한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 다시 지시가 있기 전까지 내 안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지하부터 수색해라. 무전기가 고장 났으니 통신용 마법을 걸어 주지.”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두 사람의 모습은 계단을 통해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카인은 주변을 둘러본 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과 3층 역시 1층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4층에 도착했을 때 격렬한 총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쏴! 어차피 지금 발 빼기는 늦었어! 전진밖에 없다고!”
“분명 어딘가에 금고가 있다!”
용병들은 총격전을 벌이며 사무실 곳곳을 헤집고 있었다.
“하수구의 오물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누구의 부를 탐내는 것이냐!”
파르테르와 정예들은 그런 용병들을 급급히 막아서고 있었다.
공간이 좁아 밖에서와 같이 마음껏 날뛰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탕!
카인은 피스톨을 꺼내 쏘며 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육체적으로 지쳐있던 정예들은 마법으로 관통력이 극대화된 탄환을 막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카인!”
“네가 원한 것이 이런 전쟁터가 아니었나? 어때? 이제 조금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드나?”
아득.
파르테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카인을 공격하지 않고 위층으로 향했다.
4층의 수색을 마친 용병들이 이미 5층으로 올라간 상태였기에.
카인은 시체들에서 마나를 흡수하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층을 오를 때마다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카인은 피스톨을 쏘며 적의 수를 줄이거나 파르테르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파르테르는 메뚜기 떼처럼 층을 휩쓰는 용병들의 뒤를 급급히 쫓았다.
「지상 7층입니다. 말씀하신 서류를 확보했습니다.」
「거기 있었구나! 지하에서 올라와서는 갈라지길 잘했네요. 여긴 4층이에요. 서류가 이것저것 많긴 한데 투기장 운영에 관련된 것 말고는 없더라고요.」
“수고했다. 두 사람 모두 합류해라. 중간에 적이 없으니 곧장 내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을 거다.”
계속 층을 올랐고, 어느 순간 복도의 풍경이 바뀌었다.
“과연 궁전이라 부를만한 공간이군.”
층고 자체가 다른 층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곳곳에 세워진 기둥은 황실의 궁전 같은 위압감을 주었다.
고급 건축재로 지어진 벽면엔 고가의 미술품이나 귀금속이 든 액자가 장식되어 있었다.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지폐 더미도 눈에 띄었다.
“도, 돈이다!”
“저 보석들 좀 봐!”
투기장 건물의 꼭대기.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장소.
삼엄한 경비에 의해 지켜지던 심처가 용병들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지고 있었다.
“혼자 쓰는 전용 층이라 했나.”
지금도 파르테르는 홀로였다.
몇 남지 않았던 정예들은 모두 죽어, 물욕에 눈이 돌아간 용병들을 홀로 쫓아 죽이고 있었다.
용병들의 수 역시 두 자릿수로 줄어 있었다.
부상, 혹은 공포로 전장을 이탈한 이가 대다수이나 사상자의 수도 적지는 않았다.
뒤따라온 에스텔과 밀시안이 놀란 얼굴을 했다.
“…건물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금고라는 것이 이 층 자체를 의미했군요.”
카인은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켜 외쳤다.
“이곳에 도착한 이들에겐 약속한 대로 일정 비율의 추가 보수를 지급하겠다. 역할은 여기까지이니 지상으로 돌아가 대기할 수 있도록 해라.”
카인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이들은 명령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모두가 명령에 따르는 것은 아니었고, 어떻게든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겨 나가려던 이들은 파르테르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오래지 않아 최상층엔 네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카인.
에스텔과 밀시안.
그리고 파르테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파르테르를 향해 카인이 입을 열었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
“나만 그런 게 아닐 텐데. 허세를 부릴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카인.”
카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지속되며 비축해둔 탄환을 거의 소진했고 마나 역시 많은 양이 남아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챙!
양측이 거의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벽과 기둥,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빗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벽을 돌며 보석을 챙기는 카인을 보고 파르테르가 외쳤다.
“내가 주변이 신경 쓰여 마음껏 싸우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오히려 그런 것은 네 쪽인 것 같은데, 카인! 이런 상황에서 보석을 챙기다니 너도 결국 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어!”
“…….”
카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르는 분명 지쳐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점점 얇아지는 방어막과 늘어나는 상처가 그것을 증명했다.
“큭!”
밀시안의 검이 파르테르의 어깨를 관통했다.
파르테르는 주먹을 휘둘렀고 밀시안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한 번 패배한 개 따위가!”
파르테르는 어깨에 꽂힌 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를 계속했다.
빼내기엔 너무 깊숙하다 판단했는지, 고통조차 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상처가 계속 늘어남에도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기세는 더 흉포해져 갔다.
그렇게 몇 여분이 지났을 때.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쪽은 밀시안과 에스텔이었다.
파르테르도 지쳐있긴 하나 여전히 두 다리로 꼿꼿이 서 있었다.
종이 한 끗 차이로 승부가 갈릴 것을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화륵.
카인의 손 위에 불덩어리가 피어올랐다.
파르테르가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불덩이가 쏘아져 간 곳은 천장이었다.
쾅!
연기가 걷히고, 거대한 구멍을 통해 먹구름 낀 하늘이 나타났다.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뭘 하는 거지? 이기지 못할 거란 생각에 정신이 나갔나? 아니면 땀을 흘려 몸을 식히고 싶었던 건가?”
파르테르의 비웃음을 들으며 카인은 나직이 말했다.
“파르테르, 마법이 기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같잖은 말로 내 정신을 현혹하려 하는군.”
파르테르가 으르렁거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카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마법은 자연 현상 그 자체가 된다. 모방 따위가 아니라.”
“다시는 그따위 짓을 못하도록 입을 찢어 주지!”
파르테르가 자리를 박찬 순간 카인의 손에 있던 보석들이 빛을 발하며 부서졌다.
콰릉!
낙뢰가 내리쳤다.
궤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기세로.
먹잇감의 어깨에 꽂힌 피뢰침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