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옥한 천재마법사-84화 (84/227)

#084. 개전 (2)

전투는 구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옥상 사이를 건너뛰며 거리 전체를 조망했고 분대를 실시간으로 지휘했다.

마치 체스를 두듯이.

결국 수 싸움이었다.

전투원 개개인의 실력 차가 난다고 하나 그 차이는 전술과 장비의 우위로 메꿀 수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또 도망을 쳐!

─퇴로를 막아! 막으라고!

─분명 어디에 지시를 내리는 놈이 있을 거다! 그놈부터 찾아!

용병들의 무전기를 통해 적의 고함이 들려왔다.

기본적인 전술은 ‘히트 앤드 런’이었다.

서른네 개의 분대는 나와 함께 도시 곳곳을 누볐고 조금이라도 본대와 떨어져 있는 적을 찾아 제거했다.

적의 지원이 도착할 즈음엔 모두가 현장에서 빠진 뒤였다.

─F2 분대. 사상자 둘, 부상자 셋입니다.

“시체를 수습해 외곽으로 복귀한다. 부상자는 예비 전력과 교체한다.”

물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건 적도 마찬가지였다.

수적 우위가 있었기에 사상자의 교환비에 있어선 우리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용병들의 움직임은 점점 나아졌으며 종래엔 그들의 얼굴에 ‘정말 이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소집되어 지시를 받을 때면 그들은 내게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카인 님. 40번대 구역 일대 투기장의 운영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파르테르의 병력 모두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애써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겠군.”

라이카의 구역에서 47번 구역 방향으로 차량이 출발하는 모습 역시 목격되었다고 했다.

그 사이 라이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걱정할 것은 없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녀석의 성격상 단순히 보여 주기 식의 지원일 테니까.

녀석 입장에선 죽어도 상관없는, 실력이 떨어지는 조직원들일 가능성이 컸다.

“치안국은 바마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에스텔에게는 말씀하신 대로 상황을 지켜보다 이쪽으로 합류하라 메시지를 전달해 두었습니다.”

나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은 일은 이제 이곳, 47번 구역에서 파르테르의 숨을 끊는 일이었다.

피슉!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동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호를 발동시키려는 찰나 밀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챙!

총알은 정확히 검 옆면에 가로막혀 떨어졌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건물 옥상에 허둥지둥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저격수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새겨 두었던 이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마나에 여유가 있었고 옥상 곳곳에 마법을 새겨둔 상태였다.

풍경이 순식간에 몇 번인가 바뀌고 눈앞엔 당황한 저격수가 나타났다.

“컥!”

함께 이동한 밀시안이 주변에 호위로 있던 적들을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그리고 발포 직전의 저격수의 총을 검으로 밀쳐냄과 동시에 한 손으로 멱살을 틀어잡았다.

“위치가 발각되었습니다. 죽입니까?”

“…….”

주변 옥상에 또 다른 적은 보이지 않았다.

“위치가 드러나는 건 상관없다.”

이동마법진의 설치가 끝났기에 이제는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

또한, 때가 되면 먼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컥! 컥컥!”

나는 천천히 저격수에게 다가갔다.

허공에 손을 뻗자 밀시안의 손 주위로 바람이 일었다.

밀시안이 주춤 손을 떼었고 바람이 저격수의 목을 죄었다.

땅에 떨어진 스나이퍼 라이플을 보자 남매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슬럼을 떠돌던 누나와 남동생.

둘의 재능을 알아본 카인을 그들을 거둬 저격수로 키웠다.

파블리라는 성은 주었지만 이름은 주지 않았다.

자신이 보스 자리에 오르면 그때 이름을 주겠다고.

그들에게 행동의 동력을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정을 붙이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다.

“내 부하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눈에 띄는 곳을 저격 장소로 정하지 않았을 거다.”

쾅! 끼기기긱-!

저격수의 숨을 끊으려는 순간 건물 아래에서 무언가 충돌한 소리가 들려왔다.

움켜쥔 손아귀를 풀자 저격수가 바닥에 떨어져 급히 숨을 들이켰다.

난간 아래를 보았다.

퇴각 중이던 아군의 밴이 몇 바퀴 돌아 뒤집혀 있었다.

앞에는 옆쪽이 찌그러진 적의 대형 리무진이 있었다.

내 무전이 잠시 끊긴 타이밍.

적의 차량들이 뒤쪽에서도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차에서 내려 퇴로를 확보한다. C3와 C5는 즉시 6번 거리 2블록으로 이동해 F2를 지원한다.”

밴에서 빠져나온 용병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앞쪽으로 달렸다.

그 순간 리무진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내렸다.

190센티미터를 넘는 거대한 체격과 얼굴에 가득한 흉터.

사내는 물고 있던 양담배를 부하가 들고 있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성큼성큼 용병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 파르테르다!

─우리 숫자가 더 많아! 겁먹을 필요 없어!

무자비한 손속과 잔인함.

이번 전쟁이 파르테르가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지만 그의 악명은 이미 익히 퍼져 있었다.

존재만으로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 느껴졌다.

“침착해라. 양쪽으로 갈라져 퇴로를 확보한다.”

─이길 수 있어! 마나유저라고 별거 없었잖아!

─쏴!

용병들이 술렁였다.

일단 퍼진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몸집을 키워갔다.

내 지시는 이미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탕!

가장 앞에 있던 용병이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순간 파르테르가 움켜쥐었던 손아귀를 피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총알이 굴러떨어졌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열리며 흉터가 기이한 모양으로 뒤틀렸다.

“시궁창의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

파르테르의 걸음이 빨라졌다.

─쏴! 쏘라고!

─사격 개시!

투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으며 총알을 쏟아냈다.

하나 사격이 계속될수록 용병들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사격은 단 1초도 파르테르의 전진을 늦추지 못했다.

방어막을 뚫지 못해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파르테르는 그저 빗방울 정도를 맞는다는 투였다.

─컥!

가장 앞쪽 용병의 몸이 붕 떴다.

얼굴 전체가 파르테르의 거대한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방탄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그것이 별 도움이 안 되리라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파각!

용병의 머리가 파르테르의 손아귀 안에서 터져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죽음이었으며, 살점과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파르테르의 얼굴에도 튀었으나 그는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살려 줘!

─나, 난 죽기 싫어!

─쏴! 쏘라고!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파르테르는 초식동물 사이에 떨어진 맹수처럼 용병들을 학살해나갔다.

손바닥을 휘둘러 머리를 날리거나, 손아귀에 힘을 주어 으깨버렸다.

바마만큼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용병들에겐 충분히 공포로 비칠 수 있는 속도였다.

우왕좌왕 달아났지만 이미 앞뒤로 퇴로가 모두 막혀 죽임을 당할 뿐이었다.

그 순간, 며칠 전 밀시안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추적 끝에 잡혀 온 것은 저뿐 만은 아닙니다. 다만 나머지 모두는 파르테르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메시지가 울렸다.

[‘카인 리베르’와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현 동기화율 - 91.2%]

“…….”

악문 이에 힘이 들어갔다.

죽임을 당하는 내 부하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래 펼쳐지고 있는 풍경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부하…. 카인의 부하…?’

순간 고개를 치켜든 혼란스러운 감정에 멈칫했다.

동기화가 진행되며 나의 존재가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런 감정을 느낄 틈 따위는 없다.’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내려가라. 퇴로를 확보하고 최대한 사상자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밀시안은 굳은 얼굴로 난간을 뛰어넘었다.

벽면에 돌출된 발코니와 통풍구를 밟아가며 빠르게 지상으로 향했다.

우웅-!

“컥!”

거칠게 인 바람이 쓰러져있던 저격수를 내 앞으로 패대기쳤다.

나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 난간 사이 틈으로 빼냈다.

단두대에 머리가 끼인 사형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자, 잠깐…!”

까마득한 지상을 보며 그가 헛숨을 삼켰다.

나는 바람으로 된 칼날을 만들어 그의 목을 내리쳤다.

서걱.

머리는 밀시안보다 더 빠르게 낙하했다.

방향은 정확히 파르테르의 옆이었고, 기척을 느낀 그가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둘렀다.

파직!

마나가 실린 손에 강타당한 머리는 허공에서 수박처럼 깨져버렸다.

휘둘러지는 손의 경로에 말려든 파르테르의 부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자신의 부하를, 파르테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적막이 흐르고 서로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파르테르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건물을 타고 올라왔다.

정확히 말해,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벽면을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밟으며 올라왔다.

쿵! 쿵! 쿵!

그의 발치엔 마나가 피어올랐고 벽면은 움푹움푹 패었다.

그의 모습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져 왔고 동시에 나는 피스톨을 꺼내 쏘았다.

탕! 탕! 탕!

조준하는 지점은 미간.

정제 4단계의 「칼날바람」을 새긴 탄환들이었으나 방어막은 깨지지 않았다.

아무 감정의 동요 없이, 같은 곳을 노려 계속해 쏘았다.

철컥, 끼릭.

빈 탄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이 정도로는 잡을 수 없나.’

방어막은 금이 조금 가 있을 뿐이었다.

파르테르는 섬뜩한 안광을 발하며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에반의 목소리가 아닌 카인의 목소리로.

벽을 박차고 올라 주먹을 휘둘러오는 그의 동공은 더 없이 커져 있었다.

주먹이 얼굴 바로 앞에 다다른 순간 나는 발밑의 이동마법을 발동시켰다.

* * *

파르테르의 참전으로 도시 중앙의 투기장을 향해 밀고 나가던 전선은 주춤했다.

하나 전투는 지속되었다.

계속되는 유격전 양상.

나는 옥상에서 지상을 향해 마법과 총탄을 퍼부었다.

적진에도 마법사가 나타났다.

다만 파르테르의 원래 부하 중엔 마법사가 없었다.

“급히 고용한 용병들로 보입니다. 시간이 촉박해 그리 실력 있는 이들을 구하진 못한 걸로 보입니다.”

마법사들은 옥상에 설치된 이동마법을 해체하거나 내가 직접 마법을 사용할 때 방해하려 들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역으로 마나의 흐름을 ‘간섭’당해 피를 토했다.

혹은 미간이 총알에 꿰뚫려 쓰러지거나.

“흑마법…. 카인 님이 이렇게 단기간 내에 강해지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투가 종료되고 적의 마나를 흡수하는 나를 보며 밀시안이 말했다.

“카인 님이 흑마법을 사용하시는 것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취사 선택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이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마법을 익히셨는지 굉장히 궁금하기는 합니다. 평소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으시고 그중 마법도 분명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말해 줄 수 없다. 들어도 혼란스럽기만 할 테니까. 하지만 약속하겠다. 언젠가 그럴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모든 걸 말해 주겠다. 그때까진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네가 알던 나다.”

“알겠습니다. 카인 님은 약속하셨던 것은 반드시 지키셨으니까요. 주제넘을 수도 있는 질문에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밀시안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조금 가셨다.

마치 내가 이런 말을 꺼내 주길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파르테르가 나타날 때면 용병들을 정해진 루트를 따라 신속하게 퇴각시켰다.

피해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파르테르가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양측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갔다.

적이 훨씬 손해를 보는 비율로.

애초에 파르테르의 전력은 탄탄한 조직력보다는 파르테르라는 한 사람의 압도적 무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성격이 강했다.

전투원들이 명확한 지휘 아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이쪽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가지.”

다음 목표 지점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철컥. 철컥.

총과 슈트, 헬멧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용병이 뒤를 따랐다.

맨 처음 보았을 때의 오합지졸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군대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발걸음엔 투지와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하나 결국 내가 쓰러트려야 할 것은 파르테르였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그는 여전히 전장 속에서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나와라 카인! 내 목숨을 원하나! 내 돈을 원하나!

도주하는 용병을 찍어 눌러 머리를 터트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확실히 전보다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는군요.”

“결국 빈틈을 드러낼 때가 올 거다.”

조각상을 내리치다 보면 바깥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결국 뼈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적의 수는 꾸준히 줄고 있다.

그는 결국 홀로 남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잠시 지휘를 맡기지.”

“다녀오십시오.”

용병들이 퇴각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 나는 몸을 돌려 건물을 내려왔다.

은밀히 47번 구역을 빠져나와 46번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에스텔과 합류했다.

“전황은 전해 들었어요. 꽤나 몰아붙이고 있다고.”

“바마는 제 역할을 잘하고 있나?”

“시선은 잘 끌고 있죠. 건물 사이 사이를 뛰어다니는데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가 없던데요.”

이미 포위된 상태인 데다 비교적 사방이 트여 있던 저번 공장에서와는 달랐다.

“자기한테 부상을 입혔던 특무대를 죽이지 못하고 시간을 끌기만 해서 조금 답답한 모양이긴 해요. 마음대로 날뛰게 두었으면 지금쯤 특무대 인원 중 반 이상은 죽었을 거예요.”

“앞으로 며칠 정도의 시간은 더 충분하겠군.”

나는 에스텔과 함께 46번 구역의 투기장 건물 앞에 도착했다.

운영이 중단되어 주변은 한산했다.

출입문의 내부 구조와 작동 원리는 전에 라이티노에게 들었던 기억으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카드를 인식하는 단자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곧 스파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을 열고 내부로 진입했다.

상주하고 있던 직원과 전투원들이 있었으나 에스텔에게 모두 제압당했다.

“제, 제발 목숨만은!”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들을 모두 살려 보냈다.

에스텔이 의문을 표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목숨 걸고 시설을 지키지 않았다. 끝까지 싸우기보단 도망을 택했다. 죽이는 것보단 이쪽이 녀석의 심리에도 더 큰 타격을 줄 거다.”

“…새삼 느끼지만 남 괴롭히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

부정하진 않았다.

운영이 중단된 투기장에 온 것도 적의 정신을 갉아먹기 위한 연장선이니까.

“내가 나타난 목적을, 파르테르는 무엇이라 생각할 것 같나?”

“음…. 잘은 모르겠는데, 복수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그리고 쓰러트리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고요.”

가장 직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나는 용병들을 47번 구역 곳곳에 보내 ‘무언가를 찾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도록 지시했다.

그 모습은 그대로 파르테르에게도 보고되었을 터였다.

“그래. 분명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거라 생각하겠지.”

비밀 금고, 또한 농장과 투기장을 비롯한 시설 전반.

시설엔 타격을 입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41번 구역에서 일으켰던 폭발은 자신의 부하를 구하기 위한 특수한 케이스 정도로.

실제로 그 이후엔 농장과 투기장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나는 투기장 가장 아래층에서부터 폭발 마법을 설치하며 위층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만약 파르테르가 죽으면 투기장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땅과 건물의 주인임을 나타내는 서류가 따로 있다. 그 역시 금고에 보관해 놨겠지.”

하지만 경찰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구역 내에서 법적 서류는 큰 의미가 없다.

땅과 건물이 있더라도 그걸 지킬 무력이 없다면 온갖 방해와 협박을 받아 제대로 운용을 하지 못할 테니까.

즉, 반강제로 빼앗는 게 가능하다.

“우리 것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 땅과 건물을 투기장으로 운용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니 부숴야 한다.

새로운 시설을 짓기 위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더 큰 목적으로서, 적의 무의식 밖으로 아픈 기억을 끌어 올리기 위해.

“멈춰라!”

그때 적 하나가 복도를 가로막았다.

전투원이 아닌 직원 복장을 하고 있으나 검을 들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으로 비교적 체격이 건장했다.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투기장 안에 남아 있는 이가 있었나.’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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